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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불교미술]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

신라에서 불교는 왕실과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 불교가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신라의 신장상에 생생하게 구현되어 있다.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과 같은 다양한 신장상이 만들어졌다. 신장상에서 보이는 강렬한 표정, 근육질의 몸, 힘차게 움직이는 듯한 자세는 불국토 신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임무를 잘 보여준다.

‘이차돈 순교비’는 신라의 불교 공인에 큰 역할을 한 이차돈을 기리는 비석으로 통일신라 헌덕왕 때 세워졌다. 비석은 높이 106 cm 이며, 화강암으로 만든 육면 기둥형태이다. 가운데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자를 새겼다. 글자는 마모되어 절반 정도만 판독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차돈 순교비, 통일신라 817년 (또는 818년), 경주 백률사 터>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반대편)>

신라에서는 전통 신앙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반발로 불교를 받아들이기사 쉽지 않았다. 그러자 법흥왕은 이차돈의 희생을 계기로 527년에 불교를 공인하였다.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는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우윳빛 같은 흰 피가 솟아올랐고, 머리는 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자취를 새긴 비석이 백률사 근처에서 발견된 이차돈 순교비이다. 비석은 6면으로 구성되었는데,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로 묘사했다. 나머지 면에는 불교를 전파하려는 법흥왕의 의지, 이차돈과 법흥왕의 대화, 불교 공인을 둘러 싼 왕과 신하들의 대립, 이차돈의 죽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차돈 순교비는 불교 공인의 순간을 글과 그림으로 담은 중요한 비석이며 불교 공인은 신라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라의 조각은 석굴암 불상처럼 전신을 조각한 것도 있지만, 당시에 많이 세워졌던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 을 돋을 새김한 부조작품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으며, 그 조각 수법들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보다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부중(긴나라), 통일신라 9세기, 출토지 모름>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신으로 팔부신중이라고도 하며,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睺羅迦가 있다.

<팔부중(가루라), 통일신라 9세기, 출토지 모름>

통일신라 석탑의 위층 기단 면석에 새겨지는 팔부중 가운데 가루라와 긴나라 상이다.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들으려고 모인 무리 중 하나로 불교 경전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들은 불교 미술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하늘에 사는 가루라는 인도에서 용을 잡아먹는 상상의 새이며, 가루라 상의 입은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다. 긴나라는 노래하고 춤추는 신이다. 긴나라 상 머리 위쪽에는 새, 얼굴 양쪽에는 소와 말의 머리가 달려 있다. 이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천의를 휘날리며 구름 위에 앉아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으로 부처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수호자로 여겨지는 존재로 주로 지금은 사찰의 출입문을 지키고 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석탑 탑신을 새겨졌던 조각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금강역사, 통일신라, 경주 하동>
<금강역사 1>
<금강역사 2>
<금강역사 3>
<금강역사 4>
<금강역사 5>
<금강역사 6>
<금강역사 7>
<금강역사 8>

석탑 1층 몸돌 네 귀퉁이라고 생각되는 돌에 조각한 금강역사상이다. 대부분 한 손을 들어 권법 자세를 취했는데, 한 구는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눈은 부릅뜨고 윗몸은 한 쪽으로 꺾었으며, 팔다리의 움직임은 힘차고 활발하다. 금강역사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금강역사, 통일신라 7세기, 경주 구황동 절터>
<금강역사, 통일신라 7세기, 경주 구황동 절터>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인 금강역사가 불교가 성립된 이후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맡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한 쌍으로 등장하는데 한 구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구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은 범어의 첫글자인 ‘아’를ㄹ, 입을 다물고 있는 상은 범어의 마지막 글자인 ‘훔’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금강역사상은 석탑 1층 몸돌 네면에 세운 금강역사상 여덟 구 가운데 두 구이다. 구황동 절터에는 지금도 금강역사상이 네 구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벽돌 모양 석재도 발견되었는데, 분황사탑과 마찬가지로 이 상도 감실 좌우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본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금강역사, 통일신라 751년경, 경주 석굴암>

일제강점기에 석굴암을 해체해서 수리할 때 발견되었으며, 뒷머리가 평평하여 벽에 붙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위로 올린 왼팔과 아래로 내린 왼손이 남아 있어 원래 금강역사상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만 남아 있지만 금강역사의 강인한 모습을 입체감 있고 생생하게 표현하여, 석굴암의 명성에 어울리는 높은 조각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이 금강역사상에 대해서는 만들다가 실패하여 폐기한 것이라는 의견, 원래 벽에 붙어 있었는데 석굴암 전실을 늘려 지을 때 현재의 상으로 바꾸었다는 의견, 처음부터 금강역사상 네 구를 만들었다는 의견 등이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지키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증장천왕),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읍성>
<옆에서 본 모습(광목천왕)>
<뒤에서 본 모습(다문천왕)>
<옆에서 본 모습(지국천왕)>

석탑 1층 몸돌 네 면에 새겨진 사천왕이다. 사천왕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불법의 수호신이다. 여기에 표현된 사천왕 네 구 모두 갑옷을 입고 천의를 휘날리며 악귀를 밟고 구름 위에 서 있다. 이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천왕이 다문천이다. 북쪽에 위치한 다문천은 고려 말 이전까지 일관되게 보탑을 든 경우가 많다. 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서방 광목천은 모두 칼을 들었다. 네 구 모두 강인하고 힘찬 모습으로 불국토를 지키는 사천왕의 역할이 잘 드러난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신장, 신라와 불법을 보호하다
신라인들은 불교가 그들의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신라의 신장상에 생생하게 구현되어 있다. 신장은 부처, 보살보다 지위가 한 단계 낮은 신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주로 갑옷을 입고 적을 항복시켜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한다. 신라에서는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과 같은 다양한 신장상이 만들어졌다. 상에서 보이는 강렬한 표정, 근육질의 몸, 힘차게 움직이는 듯한 자세는 불국토 신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임무를 잘 보여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사자, 통일신라 8세기, 경주 분황사>
<앞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사자는 불법 수호의 상징적 존재로, 불상 대좌, 석탑, 사리기, 병향로, 석등 등 다양한 조형물에 등장한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튀어나온 눈과 이빨을 드러낸 용맹한 모습을 한 이 사자상은 분황사 탑 앞에서 발견되었다. 팔각 대좌 아래 속이 둥글게 파인 촉이 있어 사자상이 원래 돌기둥 같은 곳에 꽂혀 있다가 나중에 분황사로 옮겨진 것으로 본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천불소탑, 통일신라 751년경, 경주 석굴암>

일제강점기 석굴암 조사 당시에는 천불소탑이 두 구 있었으나, 한 구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전한다. 탑의 몸돌 네 면을 4단으로 나눠 탑을 배치하고, 탑과 탑 사이에 작은 불상을 새겼다. 현재 석굴암 전실 금강역사상 앞에 있는 석재는 천불소탑을 받쳤던 돌로 알려져 있다. 석탑의 원래 위치를 두고 석굴암 본존상 앞과 뒤에 봉안되었다는 의견, 본존상 전면 좌우의 비어 있는 두 감실에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 등이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석굴암 제석천, 복제품, 경주 석굴암, 통일신라>
<석굴암 문수보살, 복제품, 경주 석굴암,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 복제품, 경주 석굴암,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보현보살, 복제품, 경주 석굴암,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범천, 복제품, 경주 석굴암, 통일신라 8세기>

신라의 불교조각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삼국시대인 4세기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고구려, 백제에 이어 신라에도 일찍이 불교가 알려졌지만 전통적 신앙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반대로 쉽게 자리잡지 못했다. 6세기 전반이 되어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불교 사상과 신앙은 신라 사람들의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불교조각은 불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입체적 형상으로 표현한 미술 분야로, 묘사된 대상을 실제로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부처의 모습을 담은 불상은 경전과 함께 불교 전래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신라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요구와 취향에 맞춰 다양한 상을 만들었다. 이 공간에서는 불법과 신라를 수호한 신장, 신라 사람들과 삶을 함께한 부처와 보살, 청정한 유리광세계의 백률사 약사여래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