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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불교미술] 신라의 부처와 보살

불상은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하지만, 대체로 보살상.신장상 등도 불상에 포함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보리시, 금강보좌 등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나 간다라 지방과 인도의 마투라에서 처음 만들어져 대승불교의 전파경로를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불상을 보신 금당이 사찰 중심 공간이 되었다.

<약사여래, 통일신라 800년 전후, 경주 백률사, 국보>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은 경주 백률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으로 옮겨졌다. 높이 1.7 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금동불상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현재는 약단지를 쥔 손이 없지만, 옛 사진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남아 있다. 원래는 금도금을 하였던 것을 후대에 금도금이 없어지고 채색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오른쪽에서 본 모습>

금동불상은 동을 부어 만든 후 금도금을 한 불상이다. 불교가 전래된 시기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석조불상과 함께 대표적인 불상을 만든 재료였다. 오늘날 예술적인 조형미와 작품성을 보여주는 불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부처, 통일신라 9세기><수정과 비취, 통일신라, 경주 월지>

보석으로 장엄한 부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각각에 보석을 넣어 장식한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주목되는 예이다. 원만한 얼굴, 이상적인 신체 비례, 선으로 새긴 옷 주름, 양어깨 위에 걸친 법의 등에서 통일신라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대좌는 팔각형과 연꽃잎 모양으로 구성되었고, 광배는 넝쿨무늬와 불꽃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탄생불은 석가모니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한 장면을 표현한 불상이다.

<1 탄생불, 신라 7세기, 충남 논산>
<4 탄생불, 신라 7세기, 경주 월정교 터>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상의 협시보살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단독 불상의 형태로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5세기말 운강지역에서 미륵불과 삼존상의 협시보살이 형태로 나타나며, 6세기 북제(北齊)에서 크게 성행했다. 한반도에서는 서산 용현리마애삼존여래상(국보)에서 왼쪽 협시불로 나타나고 있다

<2 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경주 성건동>
<3 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위대한 탄생과 사유
탄생불은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장면을 표현한 불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고, 후대에는 석가탄신일에 깨끗한 물은 탄생불 머리에 붓는 관정의식을 할 때 사용되었다. 반가사유상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는 출가 전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타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인 6~7세기에 유행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1 보살, 신라 7세기>
<2 보살, 신라 7세기>
<3 보살, 통일신라 8세기, 대구 동구>
<4 보살, 통일신라 8세기, 경북 상주>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
보살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를 가리킨다. 이들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 머리 위에는 보관을 쓰며, 몸에는 천의와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 손에는 연꽃, 정병, 구슬 등의 지물을 든다. 널리 알려진 보살로는 지혜의 상징 문수, 실천의 상징 보현, 자비의 화신 관음, 미래에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교화하는 미륵, 부처가 없는 시기에 모든 중생의 구제를 돕는 지장 등이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1 부처, 신라 7세기>
<2 부처, 통일신라 8세기>
<3 부처, 통일신라 8세기>

소망을 들어주는 부처
오른손을 위로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한 시무외인과 왼손을 내린 여원인의 손갖춤을 한 불상이다. 이는 중생을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시무외인.여원인은 여러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손갖춤이어서 통인이라고도 한다.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 불상에서 등장하며 삼국시대는 물론 통일신라시대에도 유행한 손갖춤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비로자나불, 통일신라 9세기>

진리의 부처, 비로자나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부처이다. 비로자나 불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한쪽 손으로 반대편 손 검지를 감싸 쥐는 지권인 자세를 취한다. 중국과 일본의 비로자나불은 보살의 모습이지만, 신라의 비로나자불은 부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약사여래, 통일신라 8세기>
<약사여래, 통일신라 8세기, 경주 건천읍 방내리>

치유하는 부처, 약사여래
약사여래는 질병을 치료하고 괴로움을 없애며 무지의 질병까지 치유하는 부처다. 대부분 왼손에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못브으로 표현된다. 약사여래 신앙은 인간 생활 전반에 이익을 준다는 현세이익적 성격이 있어 일찍부터 대중 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부터 약사 신양이 본격적으로 유행했다. 특히 통일신라 후기에는 약사여래를 형상화한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손안의 부처
법당에 있는 큰 불상이 누구나 찾아가 소원을 비는 대상이라면, 손안애 들어올 정도로 작은 불상은 개인의 소망을 담은 나만의 부처였다. 신라에서는 크기가 30cm 이하의 작은 금동불을 많이 만들었다. 금동불은 청동으로 형상을 만든 뒤 금을 입혀 황금색 부처의 몸을 구현한 것이다. 금동으로 만든 작은 불상과 보살상은 불감에 안치하거나 사리자엄구로 조성하였으며, 새로운 양식과 도상을 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금동불은 신라에서 불교신앙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널리 퍼졌는지 잘 보여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10점의 판불상이다. 판불은 밀랍을 녹여서 만든 주조품들이다. 삼존판불의 광배에는 가장자리에 못구멍이 있고 일부에는 못까지 남아 있어, 불감 같은 곳에 부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표현이 사실적이며 입체감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당나라 전성기 불상양식이 잘 반영되었으며,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표현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살, 통일신라 7세기, 경주 월지, 보물>
<삼존불, 통일신라 7세기, 경주 월지, 보물>
<보살, 통일신라 7세기, 경주 월지, 보물>

신라 왕실의 부처, 월지 금동판불
신라 궁궐 안 연못 월지에서 화려한 금동판불이 10점 나왔다. 아랫부분에 촉이 있고 테두리에 못 구멍이 있어 불감에 고정되어 있던 불상으로 추정한다. 삼존형식을 보여주는 판불은 중앙에 설법하는 손갖춤을 한 부처를, 양옆에는 몸을 틀고 있는 보살을 배치했다. 보살 한 구를 단독으로 보여주는 판불에서 보살은 손을 합장하고 있다. 몸에 걸친 천의가 우아하게 날리며 불꽃 모양 장식은 화려함을 더한다. 월지 판불은 생명력있는 사실적 표현과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불교 미술 도상이 결합된 예로 통일신라 불교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비로자나불, 통일신라 9세기>
<부처,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월지>
<부처,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월지>

8~9세기 불상의 양식
통일신라 불상은 8세기에 사실적 표현, 입체감, 균형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고 평가된다. 석굴암 본존과 월지 판불은 이러한 전성기 양식을 대표하는 예이다. 9세기에는 몸과 옷주름의 유기적 조화가 약화되며, 얼굴에서는 이상화된 모습이 사라지고 개성이 드러난다. 8세기와 ㄱ9세기 불상을 구분하는 것이 때로는 쉽지 않은데 9세기 불상 중에는 8세기 불상의 느낌을 일부 지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자세로 표현된 불상에서 옷 주름은 통일신라 초기부터 보이는 두가지 형식이 8~9세기에도 이어진다. 하나는 U자형 주름이 다리 아래까지 이어지는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U자형 주름이 갈라져서 두다리로 나뉘는 형식으로, Y자형 옷주름이라고도 부른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발, 통일신라 7세기, 경주 능지탑터>
<나발, 신라 6세기, 경주 황룡사터>
<귀, 통일신라, 경주 월지>

신라 왕경 불상의 재료와 크기
신라 왕경 경주의 사찰 금당에는 돌, 흙, 청동, 금동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불상이 모셔졌다. 특히 흙과 청동은 불상을 만드는 주재료였다.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하는 본존상은 거의 없지만 남아 있는 편만으로도 당시 불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능지탑 터 소조 불상은 거대한 발의 일부만으로도 2m가 넘는 대형 불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황룡사 터에서 발견된 청동나발 편은 크기로 보아 574년에 만들어진 장육상의 일부로 생각된다. 동궁에서 발굴된 금동불상의 귀는 왕궁 안에 봉안되었던 상당히 큰 불상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높이 200.0cm인 이 불상은 경주 낭산 중생사 터 부근에 있던 삼존불 가운데 오른쪽 협시보살로 여겨진다. 현재 본존불과 왼쪽 협시보살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십일면관음보살은 얼굴이 11개인 관세음보살의 다른 모습이다. 이 불상은 머리 위에 11구의 화불이 조각되어 있다. 통일신라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석굴암, 경주 굴불사 터 사면석불에서도 볼 수 있다.

<십일면관음보살, 통일신라 8세기, 경주 낭산>

경주 낭산 중생사 터 부근에 있던 보살상으로 얼굴이 모두 11개인 십일면관음보살이다. 십일면관음보살의 정면 세 얼굴은 악한 중생을 구하며, 오른쪽 세 얼굴은 바르게 행하는 사람을 더욱 정진하도록 권장하고, 뒤의 얼굴 하나는 웃는 얼굴로 모든 중생을 웃음으로써 거두어들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 십일면관음보살은 이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관음상은 목걸이와 어깨에서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영락을 걸쳤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을 아래로 내려서 정병을 쥐고 있다. 통일신라 십일면관음보살은 석굴암, 경주 굴불사 터 사면석불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보살상 역시 불교조각의 전성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이 불상(석조불입상)은 경주읍성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화강석으로 조성된 다른 석조불상과는 달리 무른 석재로 만들어졌다. 외형이나 옷주름 등이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인도 굽타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처,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읍성>

우리나라 석불상은 대부분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은 무른 석재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생김새도 특이한데, 굴곡이 강안 육감적인 몸매와 입체적인 옷주름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중국 당시대에는 인도 굽타시대 불사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불상이 만들어졌다. 이 상은 신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하며 새로운 양식을 수용한 결과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부처, 신라 7세기, 경주 인왕동>

돌 하나에 부처와 광배, 대좌를 함께 새겼다. 머리 위에 표현된 육계는 큼직하며, 대좌는 옷자락으로 덮여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위로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시무외인.여원인 자세를 했다.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과 고요히 명상에 잠긴 모습이 인상적이다. 4등신에 가까운 신체, 두꺼운 옷 주름, 동글동글한 얼굴은 7세기 전반 신라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부처 얼굴, 신라 7세기, 경주 남산 용장곡>

1925년 남산 용장곡에서 발견되었다. 머리 위 육계는 낮고 넓적하며, 이마 중앙에는 백호를 끼웠던 자리가 구멍만 남아 있다. 궁글고 통통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남산 장창곡 미륵여래와 닮았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보살, 통일신라 9세기>

돌 위에 돋을새김한 얼굴만 남아 있는데, 머리에 보관을 써서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넓적한 얼굴에 눈.코.입은 작고 오밀조밀하다. 이러한 얼굴 형태는 9세기 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보살 머리 주변의 광배는 원 두 개로 표현했다,. 인자한 얼굴이 이 세상에 머물며 중생을 구하는 보살의 의미를 담은 듯하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부처, 통일신라 9세기, 경주 외동읍 입실리>

얼굴이 넓적한 데 비해 눈.코.입이 작고 귀가 길며 어깨가 좁아서 왜소해 보이는 불상이다. 동심원이 반복되는 두광은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다. 덜다듬은 돌에 부처의 형상을 얕은 부조와 얇은 선으로 은은하게 표현하여 자연암석 자체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는 예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이 불상은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몸의 질병과 무지의 병을 고쳐주고 크고 작은 재앙도 물리쳐준다고도 믿어져 통일신라 때 약사여래 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항마촉지인을 취한 약사여래좌상은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약사여래, 통일신라, 경주 낭산>

<조선고적도부>에 낭산 출토 십일면관음보살상과 함께 광배 일부가 실려 있어 경주 낭산에서 발견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광배와 불신, 대좌 윗부분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왼손에는 약단지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을 한 약사불상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얼굴, 아담하지만 당당한 신체,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대좌 바닥까지 흘러내린 두꺼운 옷 주름이 이 불상의 특징이다. 광배는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대좌의 연꽃잎 안에는 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부처, 통일신라 8세기, 경주 남산 왕정곡>

커다란 배 모양 광배에 고사리와 같은 식물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였다. 이러한 식물무늬는 빛을 형상화한 것이다. 동일한 광배형식을 가진 불상이 더 남아 있어 당시 이러한 양식으로 불상을 만드는 장인 집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굴과 몸이 긴 편이며, 이마에는 큰 백호 구멍이 있다. 몸 전체를 덮은 법의의 옷 주름은 촘촘하다. 특히 가슴 위에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이 잘록한 허리 부분에서 반원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약사여래, 통일신라 9세기, 경주 남산 오산계>

오른손은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왼손은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약사여래이다. 조각상이지만 높이가 5cm에 불과한 얕은 조각면과 발꿈치를 맞대고 옆으로 벌린 모습은 부조가 갖는 평면적 특징을 보여준다. 법의 위에 그은 선은 두 다리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굴곡이 적고 밋밋하지만 높은 육계와 기다란 귀, 근엄한 얼굴로 인해 조각으로서의 입체성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경주 남산 장창곡 석실에서 발견된 불상과 보살상 2구이다. 본존불은 의자에 앉은 자세를 하고 있는 미를불이며, 양쪽에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보살상이다. 의자에 앉은 불상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삼국시대 미륵신앙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에 등장하는 ‘삼화령 미륵’으로 여겨진다.

<미륵여래삼존, 신라 7세기, 경주 남산 장창곡, 보물>

1924년 경주 남산 장창곡의 석실에서 발견된 불상과 보살상 두 구이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부드러운 조형미를 표현한 신라 조각의 대표작이다. 본존 불상은 의자에 앉은 의좌상이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큰 신체 비례와 어린아이 같은 모습, 천진난만한 표정은 7세기 신라 불상의 특징적 표현 방식이다. 왼손은 법의 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살짝 구부려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불상 양옆의 보살상은 손의 위치나 장식이 다를 뿐 불상과 조각 수법이 거의 동일하다. 두 보살은 사랑스럽고 친근한 모습 때문에 ‘아기 부처’로도 불린다. <<삼국유사>> <생의사석미륵>에 등장하는 ‘삼화령 미륵’으로도 여겨진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전설이 된 신라의 부처와 보살
오랫동안 숭배되고 사랑받은 부처와 보살은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와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부처와 보살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한 관음보살은 신라의 왕경 경주에 있는 중생사, 백률사, 민장사 세곳에 나타나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후백제 병사로부터 지켰고, 효소왕 떄는 잃어버린 신라의 국보 만파식적을 되찾아 주었다. 또한 경덕왕 때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인 보개의 아들 장춘을 해난 사고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었다. 미륵은 644년생이 스님 꿈속에 찾아와 남산 삼화령 생의사에 머물렀다. 709년 신라의 성인 둘은 관음의 도움으로 미륵과 아미타여래가 되었다. 선덕여왕은 <약사경>의 힘으로 병이 나았다. 755년 장인 강고는 구리 30만 6,700근으로 분황사 약사여래를 만들었다. 이 전시실에서도 신라 사람들고 함께 하며 위로 완식을 주었을 여러 부처와 보살을 만날 수 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석조 약사여래 좌상’은 높이 305.5cm의 큰 불상으로 경주 남산 용장골에서 파편으로 있던 것으로 옮겨와 복원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표면이 많이 마모되었으나 원래 불상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표현되었으며 광배 안쪽에는 넝쿨무늬를, 그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연꽃대좌 형태를 하고 있다. 신체의 표현이나 옷주름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화려한 광배 장식 등 9세기 불상의 특징도 있다.

<약사불, 경주 남산, 통일신라, 높이 305.5cm>

왼손에 약을 담은 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불로 여겨지는 불상입니다. 약사불은 여러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을 고쳐주고 나아가 다양한 현세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부터 신앙되었습니다. 오른손은 통일신라시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촉지인, 즉 땅을 짚은 손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촉지인을 취한 약사불이 특히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약사불은 남산 용장골에서 파편으로 전하던 것을 옮겨온 것이며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동부동에서 인왕동으로 이전할 때 머리와 광배의 일부를 접합하여 현재의 못브으로 복원했스빈다. 비바람에 표면이 깎여나갔으나 머리 위의 육계와 통통한 얼굴은 여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측 어깨만 드러낸 옷을 입은 편단우견의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표현되었으며 광배 안쪽에는 넝쿨무늬를, 그 바깥에는 불꽃무늬를 돋을새김했습니다. 연꽃대좌도 매우 화려합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비해 신체의 탄력성이 줄어든 점과 장식성이 강조된 광배의 문양 등으로 보아 8세기 말 내지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반가사유상, 경주 송화산, 신라, 높이 125cm>

한쪽 다리를 내리고 다른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린 반가 자세와 한쪽 손을 뺨에 대고 생각에 잠긴 사유 자세를 결합한 반가사유상 형식은 인도에서 창안되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특정 존상에 한정하지 않고 싯타르타 태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보살과 마왕을 표현할 때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5~6세기에 활발히 제작되었으며, 한국에 이르러서는 미륵보살 신앙과의 관련 속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비대칭의 미학과 생각에 잠긴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에서 6~7세기에 꽃피우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도 전해져 7~8세기에 일본에서 많은 반가사유상이 제작되었습니다. 이 불상은 커다란 돌 하나로 조각한 반가사유상입니다. 머리와 두 팔은 파손되었지만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로 보아 건장한 성인 남자의 신체에 가깝습니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하체에 걸친 치맛자락은 서로 겹치어 주름지고 끝자락에서 물결을 이룹니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정성 들여 표현한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습니다. 조각하기 까다로운 화강암에 신라 장인의 불심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없어진 모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잠시 이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사유에 잠겨 보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경주박물관, 202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