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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박물관] 관동팔경 유람

관동팔경은 금강산에서 울진 월송정까지 강원도 동해안 주요 명승지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 꿈꾸었던 금강산 유람과 함께 동해안 경치가 빼어난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향정, 평해 월송정을 일컫는다. 대체로 명승지이기도 하지만, 주위에 넓은 농토와 부유한 마을이 있어 여행할 때 쉬어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금강산 장안사와 유점사, 건봉사, 설악산 신흥사, 양양 낙산사,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 등 왕실과 사찰들도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었다.

<돌로 만든 차를 가는 도고, 신라 삼국시대, 강릉 경포대><철로 만든 차를 가는 도구, 고려, 영월 하송리>
<철로 만든 차를 가는 도구, 통일신라, 경남 창녕 하왕산성>
<흙을 빚어 만든 풍로, 신라 삼국시대>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는 선덕여왕 때 당에서 처음 들여왔고, 흥덕왕 3년(828)에 대렴이 차의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경덕왕대인 756년에 충담사가 다구를 가지고 다니며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하고 왕께 차를 다려바쳤던 일화가 있다. 대략 7세기 전반에는 차 마시는 습속이 시작되어 8세기 신라 사회에 차문화가 펴져 있었고 9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차를 재배했다고 할 수 있다. 당.송.원대의 중국 자기가 유입되고 고려.조선의 청자와 백자가 다구로 만들어지면서 한국의 차문화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관동팔경과 외금강의 불교유적>

낙산사는 관동팔경 유일의 불교유적입니다. 신라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인도로 굴에서 수도하고 직접 관음보살을 만나 절 지을 장소를 안내받았다는 설화가 전하며, ‘낙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관음보살이 사는 보타락가산에서 온 것 입니다. 외금강에도 오래 전부터 사찰이 세워졌는데, 신계사는 법흥왕 때, 유점사는 남해왕 때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특히 53불을 넣은 무쇠종이 인도로부터 저내진 곳에 세웠다거나 당시 53불과 9마리 용이 싸웠다 하는 등의 창건 설화는 외금강 여기저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겨 우리의 상상을 자극합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청자로 된 차를 가는 도구, 고려><숟가락, 고려><청자완, 고려>
<청자 단받침, 원><연꽃무늬가 새겨진 백자 잔, 송,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옥벽 모양의 굽을 가진 백자 주발, 당>

한국의 차문화와 금강산 관동팔경
신라 화랑이 차를 끓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겨오대와 한송정에는 고려시대만 해도 돌화로, 석지, 돌우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경포대에서 신라의 다연, 원월 하송리에서 고려 철제 다연, 동해 삼화동에서 고려 청자와 백자, 중국 자기 등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다도는 말린 찻잎을 끓이거나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포다법에 익숙하지만, 당시는 덩어리진 차를 가루내 솥이나 찻잔에 푸어서 마시는 점다법이 성행했습니다. 이는 찻덩어리를 빻을 절구나 맷돌, 물 끓일 화로, 깊고 큰 차사발 등이 필요한 다도입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담무갈.지장보살의 나투심음 그린 그림, 복제품, 노영, 고려 1307년, 흑칠 목판 위에 금니>

금강산에 오른 고려 태자가 담무갈보살을 직접 만나 예배했던 전설을 그렸다. 뾰족뾰족 솟은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출현한 담무갈보살과 1만 2천 권속을 지장보살과 더물어 그리고, 뒤에 아미타불과 팔대보살이 있는 아미타구존도를 그려 고려 말의 금강산 신앙을 전해준다. 절하는 인물을 3곳에 그렸는데 근처에 “태조”, “노영” 등이 쓰여 있다. 밑면의 명문에서 1307년 8월에 노영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금강산 그림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서산대사 비석에 새겨진 글자의 탁본, 조선 1632년, 종이에 먹으로 탁본>

표훈사 백화암 부도군에 있는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이다. 글은 이우신이 지었고, 비의 전서는 조영교, 해서와 행서는 윤득화가 썼다. 글자 형태가 길죽길죽한 가운데 중봉의 부드러운 필치가 돋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모아 구국에 앞장섰던 서산대사의 애국적인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이 땅에 나투신 부처, 나라의 안위를 지키시다.
부처와 보살이 이 땅에 늘 머물면서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신라인들은 오대산과 낙산, 금강산을 불교의 성지로 만들었습니다. 금강산에 사는 담무갈보살과 1만 2천 권속에게 귀의하고자 하는 믿음은 <화엄경>에 근거한 것으로 고려와 조선에서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새로운 왕조 건설과 이상 정치 실현의 꿈을 금강산의 불보살에게 의탁한 고려와 조선의 두 태조, 임진왜란 때 부처의 지혜로 왜병을 물리치려 한 서산대사와 금강산에서 승병을 모은 사명대사 역시 그러한 믿음에 기초했을 것입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내금강의 불교 유적>

남성적 산악미를 자랑하는 외금강에 비해 내금강은 온유하고 수려한 계곡미로 유명합니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를 만나게 됩니다. 고려 출신 황후 기 씨의 후원으로 일만 오천불을 봉안할 정도로 장엄했다는 장안사는 내금강 유람의 입구입니다. 표훈사와 정양사는 법기(담무갈)보살이 일만 이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머무는 바로 그 곳이라는 금강산 법기신앙의 중심지이자 내금강 최고의 전망을 제공하는 승경처입니다. 엣 시인 묵객들은 이곳에서 주옥같은 시와 글씨, 그림을 남겼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존래, 풍악행, 율곡전서, 이이, 조선, 목판본>

모친 신사임당의 3년 시묘살이를 마친 이이는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심취했다가 1년 여만에 속세로 돌아온다. 이때 지었던 기행시가 10여 편인데, 그 중 600구 3000자의 <풍악행>은 그의 대표작이자 조선 문인의 금강산 기행시 중 최고로 꼽힌다. 문집에는 “내가 풍악산을 돌아다니면서는 게을러서 시를 짓지 않았다. 산에 올라 유람하기를 마친 뒤 들은 바와 본 바를 수합하여 삼천자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혀져 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관동지역을 유람하고 쓴 일기, 관동일록, 홍인우, 조선 1553년, 목판본>

이황의 문인인 홍인우가 1553년에 허국선, 남시보 등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 명승지를 유람하며 쓴 일기체의 기행문집이다. 그가 49일 동안 돌아보았던 주변 경치와 마을의 실태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등, 조선, 목판본>

이행, 윤은보, 신공제 등이 중종의 면에 따라 1530년에 <동국여지승람>(1481년)을 중수해 펴낸 관찬지리서이다. 전체 55권 중 강원도는 권44에서 권47까지고, 금강산 자료는 권47에 있는 회양도호부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정양사 항목을 보면, 금강산을 찾은 태자가 담무갈보살의 진신을 예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찰이 세워졌다는 창건담과 더불어 방광대, 배점, 진헐대 같은 명소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 유래가 실려 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이적과 불로장생의 땅>
<열한 개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이 새겨진 청동 거울, 고려, 청동>
<불보상을 새긴 은으로 만든 장신구, 고려, 금은>
<동으로 만든 생각에 잠긴 미륵보살, 고려>
<십장생무늬 청동거울, 조선, 강원도 원주>
<양사언의 글과 글씨를 탁본해 모은 첩, 양사언, 조선>

초서와 큰 글씨를 잘 써서 안평대군, 김구, 한호 등과 함께 조선전기 4대 서예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양사언은 회양군수로 부임한 이후 금강산을 자주 유람하곳 많은 시를 남겼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그의 시풍은 종종 도교의 신선계와 연결된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청화와 철채를 사용한 산 모양의 백자 필세, 조선 19세기>
<청화와 철재를 사용한 산 모양의 백자 향로, 조선 19세기>
<동천문벼루, 조선 19세기>

풍류는 영동의 바닷바람을 타고
금강산 관동팔경 유람의 기원은 신라 화랑에서부터 보입니다. 일찍이 사선이라 불리며 신선에 비유된 영랑, 술랑, 남석, 안사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경주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 금강산에서 심신수련과 산천제사를 마친 그들은 총석정, 삼일포, 경포대, 한송정, 월송정 등에서 노닐다 경주로 되돌아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산수기행문화의 발전과 금강산 관동팔경>

관동팔경
동아시아에는 풍광이 아룸다운 여러 장소를 하나로 묶어 시나 그림의 주제로 정한 뒤 각각을 노래하고 그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강원의 관동팔경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과 유사한 관동팔경 개념은 17~18세기에 정착했고, 조선후기와 말기에 무수한 화가들이 관동팔경도를 즐겨 그리게 되었습니다. 관동팔경도는 대관령 이남에 위치한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에다 대관령 이북에 있는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와 청간간정, 양양 낙산사를 더해 그린 그림빈다. 시중대, 해산정을 더하거나 월송정을 빼고 관동구경, 관동십경을 이루기도 합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총석정 그림, 작자미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필묵을 표현된 금강산 관동팔경
17~18세기 동아시아 문인문화의 새로운 조류를 수용한 조선의 선비들은 팔경구곡 전통을 재해석해 자신이 거닐고 머문 시공간을 문학과 예술로 찬미하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활동 속에서 방 안에 누워 글과 그림을 감상하면서 산수 사이를 노닌다고 하는 와유 문화가 널리 퍼졌습니다. 정선, 김홍도 같은 위대한 화가의 대두와 성장은 그러한 공간과 수요에 기반하여 이루어졌고, 그들이 개척한 새로운 산수 표현과 형상은 보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향유되고 모방되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삼불암 그림, 작자미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장안사 만천교 그림, 금강산도 화첩, 작자 미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색>
<중대폭포 그림, 금강산도 화첩, 작자 미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색>
<낙산사 그림, 관동명승첩, 이의성, 조선 19세기 초, 종이에 엷은 색>

현재 12폭 편화로 전하는 화첩 중 1폭이다. 대부분 김홍도가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관동팔경을 그린 1788년 화첩을 본받았는데, 이 장면만큼은 창의적으로 재해석해낸 결과다. 그림 위에 “청류”, “이의성” 인장이 있어 19세기 초 문인화가인 이의성 작품으로 간주된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비선대 그림, 관동명승첩, 이의성, 조선 19세기 초, 종이에 엷은 색>

18~19세기 금강산 관동팔경 그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활동한 18세기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린 다양한 산수화들은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범주의 하나로 부상하였습니다. 동시대와 후대의 화가들 대부분은 두 거장의 구도와 필치를 따라 금강산 관동팔경의 경관을 그리게 되었고, 특히 김홍도가 1788년에 정조의 어명에 따라 수행한 작업의 결과는 19세기의 많은 화가들이 따라 그리는 금강산 관동팔경 회화의 모본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선비들의 여행채비, 조선 후기, 1 남여>
<2 휴대용 묵호와 필통><3 휴대용 묵호와 붓><4 먹물 담는 작은 용기>
<5 종이 두루마리>
<6 예기>
<7 휴대용 의서>
<8 나침반><9 휴대용 해시계>
<10 여행용 작은 지도>
<11 여행용 작은 지도>
<12 술잔>
<12 술병>
<13 찬합>
<강릉 경포대 그림, 작자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물결 잔잔한 경포호와 파도가 넘실거리늘 동해를 배경으로 이를 조망하기 위한 경포대, 호해정, 매학정, 방해정이 그려져 있다 낚시와 고기잡이, 뱃놀이 등 호수와 바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무리 지은 오리, 물고기 등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되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영랑호 그림, 민화 금강산도 6폭, 작자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감호 그림, 민화 금강산도 6폭, 작자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금강산을 그린 민화 병퐁, 작자미상, 조선 19세기>
<김씨오선생진적, 김수증 외, 조선 17~18세기, 종이에 먹>

취향, 가문과 사회를 영광되게 하다.
산수유람과 서화감상, 시문짓기에; 조예가 깊었던 김수증의 취향은 곡운구곡으로 대표되는 강원의 구곡이 예술의 경지로 바뀌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곡운구곡을 방문한 이들은 실제 경치를 감상하는 한편 이를 그린 화첩과 시문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장동 김씨 가문의 문예취향이 성숙해갔고 조선 후기 문인사회는 물론 화단에 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실경, 실제, 실질 등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18세기의 새로운 조류를 세련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것입니다. 그 세련된 문화적 역량은 당시 최고의 예술형식이었던 서예와 회화의 풍성한 발전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청옥협, 곡운 김수증이 사는 화천 백운산 아래 아름다운 아홉 구비 중 두 번째, 곡운구곡도첩, 조세걸, 조선 1682년, 종이에 엷은 색>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첩 중 청옥협을 모방한 그림, 임곡운구곡도첩, 작자미상, 조선 1804년, 비단에 엷은 색>

김수증과 곡운구곡
김수증은 서인 노론계를 이끈 장동 김씨 집안의 장남으로, 16세기 이래 한양에 대대로 거주한 유력 가문인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습니다. 당쟁으로 어지럽던 한양을 벗어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 일대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주희의 무이구곡, 이이의 고산구곡의 뜻을 쫓아 경관이 아름다운 주변의 9곳을 곡운구곡으로 정했습니다. 이를 1682년에 조세걸에게 그리게 했고, 11년 뒤인 1693년에 자신과 두 아들, 다섯 조카, 외손 등 9명이 나이순으로 주희의 <무이도가>에서 차운한 시를 짓게 해서 <곡운구곡도첩>을 완성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출처>

  1.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