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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박물관] 강원도의 자연과 사람

강원도는 산악지역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고장이다. 동해안 일대의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산악지역에서 화전을 일구며 힘들게 살았갔던 사람들, 남한강과 북한강이 지나가는 영서지방의 원주나 춘천지역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다양한 지역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고위 관리들을 많이 배출하지는 못해 양반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강릉이나 삼척지역, 남한강의 원주지역, 북한강의 춘천지역에는 양반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고택들이나 관아건물 등이 남아 있다. 또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이름난 산에는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전통깊은 사찰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 관동지방 유람의 전통과 함께 왕실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춘천지도, 조선후기>

물길과 산길이 선명하게 그려진 춘천 지도이다. 중앙에는 소양강과 봉의산 아래 관아가 들어가 있는 읍이 표시되어 있고, 주변에는 사창리, 후평리, 약사원, 석사리, 거두곡, 지석리 등 춘천 시내의 지명들이 보인다. 지도의 테두리에는 화천, 가평, 홍천, 강릉, 양양 등 외부 지역과의 경계를 나타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강원도의 관동지방 지도, 조선후기<

조선시대 강원도의 행정업무 중심지인 원주를 중심으로 군현이 붉은 선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회양, 통천에 빽빽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금강신이 표현되어 있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지는 관동팔경의 명승지가 그려졌는데 바닷물이 들어와 이루어진 호수인 경포호의 모습이 잘 보인다.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를 험준하고 높은 산으로 표시해서 공간을 한정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지방관을 평가한 문서, 조선 1860년>

암행어사가 각 고을의 수령을 시찰하고 승정원에 낸 문서다. 강원도 편에는 총 28명의 지방관이 평가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상을 받았고, ‘중’ 1명, ‘하’는 2명이었다. 원주의 김백균은 ‘공적이 뛰어나다는 소식이 많았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라고 했고, 춘천의 조병흔은 “정치가 얼음보다 맑서 백성들이 물같이 바라보았다. “라고 평가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강원도 진상품 목록, 조선 1476년>

원주도회를 비롯한 강원도 내 각 도회소에서 왕실과 중앙에 매달 진상하는 물품을 적어놓은 문서다. 문서에 보이는 품목은 말린 넙치와 문어, 홍합, 복어, 황어, 대구, 송어, 볼락, 연어, 은어, 송이버섯, 미역, 김, 자라 방풍, 잣, 옥수수, 꿀, 고등어, 해삼, 전아, 호두 등이다. 그 중에서 생복이 가장 많았는데, 한 해 동안 상납된 생복의 수는 총 5,595마리였다. 특히 삼척과 양양에서 진상품이 가장 많으며 상납 일자도 빈번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강원의 지리와 행정
강원도는 영서의 평야지대와 태백 산간 지역, 영동의 해안지대로 이루어져 농촌과 산촌, 그리고 어촌이 함께 있습니다. 영서에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흘러 수운이 발달하여 나루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산간에는 화전에 의지한 작은 마을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삶들이 강원의 문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강원도는 1395년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면서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고 강릉과 원주의 머리글자를 취해 그 이름을 정하였습니다. 강원 감영을 원주에 설치하고 관찰사르 ㄹ파견한 이래 1895년까지 약 50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백자 명기, 춘천 서상리, 조선 후기>
<쌍륙말, 원주 감영터에서 발굴된 것들, 원주 일산동 조선>
<접시, 잔, 발>
<상평통보, 건륭통보>
<글자가 있는 암막새, 무늬 없는 전돌, 암키와>
<수키와>
<원주 강원감영(사적)>

강원의 수령과 강원감영
술형의 임무는 농업의 장려, 세금을 낼 수 있는 호구의 확대, 교육의 진흥, 군정의 정비, 균등한 부역 부과, 간결한 소송, 그리고 향리의 부정 방지 등이었다. 그강ㄴ데 중요한 것은 중앙 및 상급 관청에 대한 각종 세공의 납부와 민심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 지방에서 수령의 위치는 절대적인 권위자이면서도, 지역민들에게는 1~2년 머물렀다 가는 나그네로 인식되기도 했기 때문에 수령들은 효과적인 목민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강운감영의 건물지는 현존하는 감영 건물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현 위치는 고려와 신라시대에도 관아 자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395년 원주에 감영이 설치될 당시에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건립된 건물은 임진왜란 중에 왜구가 7개월 동안 점령하였고 후퇴 시 크게 불을 내어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1632년부터 감영 건물이 재건 되었는데 특히 1665년에는 관찰사 이만영이 정청인 선화당을 세웠다. 1759년 경에는 공해 13동 276칸, 정각 3동 16칸, 창고 11동 213칸 등 도합 27동 505칸에 달하였고, 1830년 경에는 37동의 건물이 있었으며, 1875년 경에는 53여 동의 관아 건물이 존재하였다. 원주 강원감영은 1395년 설치된 이후 1895년 폐지될 때까지 강원도에 부.목.군.현을 관할하고 정치.경제.행정.사회.군사 업무의 중심지였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허목 초상, 복제품, 이명기, 조선 1794년, 보물>
<허목이 짓고 쓴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새긴 비석의 탁본, 비건립 1661년>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했던 시기에는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았다., 특히 풍수해가 심했는데, 허목이 이것을 보고 손수 192자를 써서 동해 퇴조비를 세우고 나서 수해가 줄었다고 한다. 허목은 삼척 주민들에게 향약을 실시하도록 하고 마을 100호 단위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허목은 이로써 삼척에 유교 윤리를 보급시키고, 수령을 중심으로 향촌의 운영 질서를 확립하려고 했으나 잦은 자연재해로 인해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에 동해송을 짓고 비를 세우면 홍수를 막을 수 있는 여론을 형성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보살, 조선 17~18세기>

1972년 평창 대화면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백색을 띠는 무른 재질의 비석으로 조각한 것이다. 조선 후기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비석을 사용한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불상들은 17세기 후반부터 승호와 경옥 등으로 대표되는 조각승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래 턱이 넓고 두터운 각진 얼굴, 다부진 어깨와 상체의 모습이 특징이다. 보살상 위에는 옻칠을 한 후에 금을 얇게 붙였던 것으로, 현재는 대부분 탈락되어 있다. 머리에 쓴 관과 귀걸이, 가사 등에서도 백색과 붉은 색으로 채색했던 흔적이 보인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보살, 조선 후기>

강릉시 성산면 보현사에 있었던 불상으로 일제강점기 때 구입되었다. 높지 않은 보관 모양, 불상과 같은 대의를 입고 있으며 어깨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삼각형 모양으로 젖혀진 옷 깃 등이 닮았다. 오른 손은 결실되었으나 수인 또한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창 보살상과 달리 몸의 비율이 날씬하고 길며, 대의 자락이 대좌 아래로 내려와 장식성을 띤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전패, 조선 1701년>

조선시대 원찰의 불상 앞에 설치된 수미단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나무에 왕이나 왕비, 세자 등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구를 적은 전패가 세워졌다. 이 전패는 왕과 세작의 전패와 함께 입수된 것으로 왕의 전패 뒤에 1701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국왕인 숙종을 위해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전패 중앙에는 ‘오아비전하수제년’이라는 왕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금색 글씨가 쓰여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강원의 불교와 왕실의 원찰
강원의 불교는 조선 초부터 억불 정책 속에서 왕실과 관계 맺은 사찰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왕실은 원찰에 왕과 왕후, 선왕과 선후, 왕자와 왕녀 등의 위채를 봉안하고 그들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강원에는 왕실의 원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평창 오대산의 사자암은 태조 이성계의 원찰이었고,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이었습니다. 세조는 금강산 건봉사도 원찰로 삼았는데, 건봉사는 그 뒤에도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또한 양양 낙산사는 예종의 원찰이었으며, 영월 보덕사는 단종의 원찰이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는 효종과 인연을 맺으며 조선후기 왕실 원찰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태항아리>
<태지석(복제품)>
<석함>
<왕녀 복란 태실, 조선 1456년>

1991년 원주 태장동 산 57번지 일대 발굴시 이미 도굴된 상태로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없었다. 석함 주변에서 토기항아리와 백자 항아리, 접시, 발 등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왕녀 복란 태실과 강원의 태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묻었습니다. 이 과정을 안태라고 하며, 국가의례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태실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작은 항아리에 태를 담고 다시 큰 항아리에 넣은 후 지석과 함께 묻고 태비를 세웠습니다. 성종의 왕녀 복란의 태를 묻은 태실은 원주 태장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석에 따르면 왕녀 복란은 1486년 10월 13일 진시에 출생하였고, 그녀의 태는 같은 해 12월 29일에 묻었다고 합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단종과 정순왕후 어보, 조선 1698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쫓겨나 1457년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고, 그 해 10월에 죽음을 맞았다. 단종의 비도 부인으로 강봉되고 궁에서 나와 1521년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단종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나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고, 숙종 24년(1698) 11월에 왕으로 복위되었다. 단종이 복위됨에 따라 정순왕후도 다시 왕후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단종과 정순왕후의 어보와 책문을 만들어 신위와 함께 종묘에 배향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준경묘와 영경묘의 제기와 촛대, 대한제국 1901년>

강원과 조선 임금들
조선의 임금들은 선왕의 묘소 참배, 군사 훈련 참관이나 사냥, 병 치료 등을 이유로 종종 지방으로 행차하였습니다. 세조는 1466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고성 온정에 머물렀고, 낙산사와 상원사를 거쳐 환궁했습니다. 1890년에는 춘천부 관아에 이궁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에 유배와서, 1457년 장릉에 묻혔습니다. 삼척에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고려 무신 이양무와 그 부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고종은 1899년에 이 두 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로 고쳐 쌓은 후 제사를 지냈고, 40여 종의 제기를 내려 주었습니다. 황제가 된 고종이 조선을 세운 태조의 5대조까지 높이 모신 것이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화승총, 횡성 학골리, 조선 19세기><화약통, 횡성 학곡리, 조선 19세기>
<소의신편, 유인석, 조선 1899년>

의병장 유인석과 그의 동료들의 글을 모아 간행한 책이다. 한말 항일구국운동의 사상과 활동, 유인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유인석과 그 동료들의 호좌의진은 1895년의 을미 의병 당시 강원도 지방에서 봉기한 지역 의병 집단 가운데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윤희순이 지은 의병 노래, 복제품, 윤희순, 조선 1896년>

강원 항일 의병
조선시대 말 일제의 침략에 맞선 민간으 자발적 항거인 항일 의병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강원 지역 의병에는 유학자를 비롯하여 군인, 포수, 상인,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산포수가 많았고, 무기제조소를 만드는 등 전투력이 강했으며, 산악지대인 강원도의 환경을 활용하여 여러 차레 유격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강원도의 의병장으로 춘천 이소응, 제천 유인석, 강릉 민용호, 원주 민긍호 등이 활약하였습니다. 한편 윤희순은 의병가를 지어 보급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23년)

<출처>

  1.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