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들은 정치를 주도하고 지역을 이끌어가는 지배세력으로 정치가이자 관료였다. 양반들은 과거를 통과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학문적 수양을 필요로 했다. 이들은 어린시절부터 유교경전을 익히고 심화하여 학자적 소양을 갖추었으며, 중앙에 진출하여 관료를 역임하며 많은 인사들과 교류를 하였다. 대구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이 문구를 기준으로 ‘수신’을 의미하는 양반들이 과거에 진출하기 전 공부해야 했던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경전, ‘제가’를 의미하는 집안을 운영하는 기준이 되는 책자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조선시대는 유교관료사회로서 경제활동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가 관료를 중심으로 움직인 사회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을 진출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삶의 목표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과거합격증서라 할 수 있는 홍패나 관직임명장 등은 수많은 집안에서 가보로 간직해 왔기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유물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김귀주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문묘향사에 관한 기록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유교의 기본 윤리 덕목을 보급하기 위하여 제작한 책이며,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한 것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여사서는 청나라 왕진승이 여자가 읽을 책이라 하여 주를 단 네 가지 책을 말하며, 조선에서는 이덕수가 영조의 명을 받아 제작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신라시대부터 충, 효, 열의 삼강을 지킨 이름난 인물의 해적과 전설을 기록한 책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송의 여씨 형제가 지은 <향약>을 주자가 가감하여 주석을 붙인 책이며, 조선에서는 1518년에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간행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서매수는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1787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에 여러 관적을 두루 거쳐 180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1894년에 치러졌던 갑오년 사마시의 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1483년에 간행한 중국의 역사서로 조선시대 임금뿐만 아니라 신하들도 읽었던 대표적인 책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흉배는 조선시대 관리들이 관청에 출근하여 일을 할 때 입는 옷에 붙인 것으로, 무늬에 따라 품계와 상하를 구분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문관은 학을, 무관은 호랑이 문양을 사용하였다. 이 흉배는 1871년에 정한 제도를 따른 것이며, 당상관은 쌍학흉배, 당하관은 단학흉배를 붙인 단령을 입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호패는 신분에 따라 기재 내용이 달랐다. 생원이나 진사의 경우는 황양목을 재료로 하여 이름, 출생 연도, 생원과 진사가 된 연도 등을 기재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암행어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지방 출장 때에 역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신표이다. 마패에 새긴 말의 수는 징발할 수 있는 말의 수를 나타내며,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삶과 정신문화
조선시대에는 왕이 유교 덕목을 갖추고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다. 일상생활에서는 삼강오륜과 <주자가례>에 따른 관혼상제의 예법을 중요시했다. 향촌 사회에서는 자치 규범인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유교 공동체를 결속하려 했다. 조선의 백자에는 유교의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비는 겉의 화려함을 좇기보다는 청렴하고 고고한 내면의 기품을 다지고자 했으며, 이 정신은 단순하며 소박한 백자와 닮았다. 조선의 선비가 지향한 청순함과 결백함은 흰옷을 즐겨 입었던 우리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 후기 유학자 안진석이 각종 문헌에 나오는 관혼상제의 사례를 상세히 고증하여 편찬한 책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회혼례 장면을 그린 화첩이다. 회혼례는 결혼한 지 60년 되는 해에 부부가 다시 혼례를 치르는 행사이다. 태어난 지 60년이 되는 회갑, 과거에 등재한 지 6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회방과 함께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성인 여성은 머리를 곱게 빗어 둥글게 틀어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비녀는 여인의 머리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면서 재료와 형태가 더욱 다양해졌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성인 남성이 머리를 끌어 올려 정수리 위에 틀어 매는 방식으로 만든 머리모양을 상투라고 한다. 상투관은 상투에 씌우는 작은 관으로, 왕과 사대부가 집안에서 주로 사용했다. 먼저 망건을 쓴 다음에 상투관을 쓰며 비녀를 꽂아서 고정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기러기가 질서와 의리를 따르고 제 짝이 죽으면 따라 죽거나 평생을 혼자 사는 새로 여겨 혼례에 많이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기러기를 썼으나 나중에는 나무기러기로 대체되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묘지는 죽은 사람의 성명과 태어나고 죽은 연월일을 비롯하여 경력과 자손의 성명 등 여러 사항을 새겨서 무덤 안에 넣은 것이다. 이상일은 1630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박사, 황해도도사, 사헌부장령, 진주목사, 승지, 동지부사, 황해도감찰사를 역임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죽은 사람의 내세를 위해 그릇 등을 모형으로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는 껴묻거리이다. 조선은 성리학에 근거한 유교식 상장례로서 명기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나 전란을 겪은 17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소멸하기 시작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감묘여재도는 사당과 위패를 그린 그림이며, 사당도라고도 한다. 집안에 조상의 사당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제사 그릇은 제례에 사용한 그릇이다. 공공제례는 종묘, 대성전, 향교, 서원 등에서 지내는 것이고, 개인 제례는 보통 조상숭배를 말한다. 제기는 용도에 따라 술과 물을 다루는 데 쓰이는 것, 제사에 쓰이는 물건이나 음식인 제수를 담는 것 등으로 나누어진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유교 의례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따라 국가를 바르게 다스리고자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 규범을 세워 나갔다. 왕실은 다섯 가지 예에 따른 의례를 시행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사대부는 사례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관례는 남자가 성인이 되기 위해 상투를 틀고 치포관, 유건, 갓 등을 차례로 쓰며 성인 이름인 자字를 받는 의례이다. 혼례는 남녀가 혼인을 할 때 따라야 하는 의례이다. 상례는 죽은 사람을 장시 지내는 의례이고, 제례는 조상을 모시고 가정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조상 숭배 의례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천자문은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가 무제의 명을 받아 편찬한 것이다. 1구 4자의 총 250구, 1,000자로 된 고시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자를 배우는 입문서로 널리 활용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이이가 지은 유학 입문서이다. 뜻을 세우고 몸을 감가며 부모를 모시고 남을 대하는 방법 등을 기록하였다. 초등 유학 교재로서 필요한 내용을 두루 담았다. <천자문>, <동몽선습>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널리 읽힌 초등 교재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중국 송나라 때 주희와 여조겸이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이다. ‘근사’는 논어의 내용 중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유학자는 <소학>, <성리대전>과 함께 이 책을 중시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주자가 지은 소학에 이이가 주석을 달아 편찬한 책이다. 이이는 소학을 배우는 자들이 주석이 다양한 데서 겪는 혼란을 막기 위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또는 상세하게 설명을 달아서 정리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대학>은 유교의 목적과 정무의 근본을 서술한 경전이다. <대학장구대전>은 주희가 편찬하고 주를 단 것에 여러 학자들의 소주를 붙인 책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주희가 자신의 학설에 기초하고 이정 및 그의 제자들의 학설을 받아들여 논어에 대한 장구를 나누어 집주한 책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서전>은 중국 송나라 주희의 제자 채침이 서경의 풀이를 달아 편찬한 책이다. 서경은 유교이 기본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사서삼경의 하나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시대 교육
조선시대 교육은 국가 인며인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교육 체제는 유학을 보급하고 연구하도록 구성되었다. 교육 내용은 유학 경전 중심이었고, 역사와 문학이 뒤를 이었다. 학교는 중앙에 성균관과 사학을 두었고, 지방 각 행정 단위에 향교를 두었다. 이 밖에 국가는 개인 교육기관인 서원과 서당 등을 세우도록 장려했다. 유생은 유학을 공부하며 유교의 도덕을 실천하는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7~8세 때에는 가숙이나 마을의 서당에서 초보적인 학습을 하고, 14~15세가 되면 사학이나 향교에 들어가 소학과 사서오경 등을 익혔다. 유생들은 교육기관에서 유학을 공부한 뒤 소과와 대과를 거쳐서 관직으로 나아갔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제사를 지낼 때 신주나 지방을 모시는 의자로, 보통 병풍과 제사상의 중간에 위치한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술이 일전한 한도에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이다. 계영배는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이다. 잔의 70% 이상 술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는 선비의 정신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흑혜는 유생과 사대부 남자들이 평소에 신었던 검은색 마른 신이다. 미투리는 유생과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에 신었다.
영남지역은 김종직을 비롯하여 사림들의 출신지로 다른 지역보다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영남지역 출신 선비로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인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조식 등의 학파를 형성하면서 많은 후학들이 조선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순흥에 성리학을 소개한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이 처음 세워진 이래로 영남지역에서는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모신 서원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 등이 있다.

1549년 소수서원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건이로 사액을 받았다. 현판 왼편에 ‘1550년 4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써서 이름을 지어 내렸다’고 적었고, 오른편에는 명종의 글씨임을 기록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주세붕이 풍기군수 시절에 세운 백운동서원 관련 기록을 수집해 엮은 역사서이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대구.경북의 서원
서원은 유생을 길러 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립 교육기관이다. 최초의 서원은 1543년에 주세붕이 숙수사의 옛터에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1550년에 이황의 건의로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었다. 그 이후 서원은 숙종 대에 이르러 전국에 500곳이 넘을 만큼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겨 1871년에는 철폐평으로 47곳만 남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2019년에 한국의 서원 9곳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했다. 대구.경북에 있는 서원 중에는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도동서원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대구.경북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사림의 활동이 활발했다. 사림은 김종직의 학맥을 이은 김일손, 이언적, 이황 등 대구.경북의 선비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16세기에 사화가 있었을 때 훈신과 척신세력에 대항하며 세력을 키웠다. 사림이 주요 활동 무대는 서원이었다.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이라는 두 기능을 담당한 사설교육기관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한 이후에는 서원의 기능과 역할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서원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향촌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 운영 기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편지로 보는 조선시대 가족
가족은 혼인.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같이 생활하는 공동체로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 단위이다. 조선시대 가족제도는 유교 질서를 강조하는 국가 이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7세기 초 현풍 소례 마을에 살았던 곽주와 그의 가족이 쓴 편지글은 조선시대 가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곽주 가족이 남긴 편지글은 모두 168점이며, 곽주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와 시집간 딸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많다. 아내에게 손님 맞을 음식 준비를 당부하는 이야기, 장모에게 외가에 간 아이들의 한글 교육을 부탁하는 이야기, 성인이 되는 아들의 관례를 치르는 이야기 등 당시 가족의 다양한 일상생활이 잘 드러나 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1811년 5월 14일 경상도 경산에 거주하는 아버지가 자식 2남 6녀에게 재산을 물려주며 작성한 문서이다. 제사를 지내는 봉사조를 정한 후 아들 두원, 도직과 사위 김현정, 강학조, 이사겸, 정치민, 박인원, 노이중에게 토지와 노비 및 돈을 나누어 주었다. 문서의 끝부분에는 선조의 묘소 위치, 지번 등과 재주인 아버지의 수경이 있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출처>
- 안내문, 대구박물관, 2013년/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