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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박물관] 선비들의 서예

우리나라 서예는 기원전 2세기무렵, 중국의 한자문화를 수용하며 한국 서예문화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의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 글씨 영향을 받았으며, 7세기 중반부터 당의 구양순 해서체 유행하였다. 8세기에는 저수량, 안진경 해서, 왕희지 행서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미불, 소식 등 중국 북송 서예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문장을 돋보이게 하거나 높이 기리기 위해 명필들의 글씨를 집자하였는데 주로 비석을 세우는데 많이 이용하였다. 전주박물관에서는 중국 명필의 글씨를 탁본하여 만든 다양한 법첩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한진석각묵영, 한.진 석각편 모서, 나진옥, 중화민국, 1915년>

중국 청대의 문자학자인 나진옥이 한나라와 진나라의 석각편을 구륵(윤곽선을 그림)으로 본뜬 것을 모은 책으로 총 15개의 석각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석각의 서체는 예서이며, 간혹 전서에서 예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서풍을 보이는 석각들도 보인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법첩(法帖)이란 옛 명필의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모범이 되는 글씨의 모사본이나 탑본(榻本) 등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10세기 중엽 중국 남당(南唐)에서 처음 법첩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유명하면서 오래된 것은 송나라때 왕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순화각첩(淳化閣帖)』이다. 이는 역대 제왕과 명신, 진나라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실제로는 왕희지의 글씨를 감상하고 익히는 서예 교본이었다. 법첩은 옛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품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수선비修禪碑, 중국, 위 220년>

수선비는 위 황초 원년(220년) 문제 조비의 황제 등극에 관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수선표라고도 한다. 한의 예서를 잘 계승한 삼국시대 위의 대표적인 예서로 평가되며, 당의 예서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 된 글씨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23년)

<석고문石鼓文, 중국, 전국시대>
<석고, 복제품, 춘추전국시대, 섬서역사박물관>

열 개의 북 모양 돌에 새겨진 글씨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석각 문자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의 중국통일 이전 문자인 대전大篆이다. 사냥에 대한 내용을 담았으며, 주周대 제자으로 알려 졌으나 현재는 전국시대 진秦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법첩, 명필과의 만남
선비의 사화는 가슴 속의 문기文氣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예술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선배들의 흔적을 연구하며 따라 쓰고 그렸던 선비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선비들은 옛 명필의 글씨를 동경하며 그들의 필적을 늘 곁에 두고 감상하며 글씨를 연마하였습니다. 서예가는 글씨를 보고 쓰는 방법인 임서臨書를 위해 명필의 필적을 모은 법첩을 필수적으로 공부했스빈다. 중국의 왕희지, 안진경, 미불, 조맹부, 동기창 등은 물론 조선의 석봉 한호를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의 글씨도 법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구양순이 쓴 황보탄비, 구양순, 중국, 당 정관 연간(627~649)>
<명필 구양순이 글씨를 쓴 황보탄비, 시안 비림박물>

구양순은 초당대의 서예가로 우세남, 저수량과 함께 당의 서예를 대표한다. 황보탄비는 수隨의 대신으로 정권 쟁탈 과정에서 죽은 황보탄을 위해 그의 아들 황보무일이 우지녕에게 글을, 구양순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세웠다. 구양순의 글씨는 글자형이 단정하고 짜임새가 긴밀한 결구, 엄격한 점획 그리고 날카로운 운필로 서예의 모범이 된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안진경이 쓴 쟁좌위고, 중국 당, 764년, 안진경>

안진경은 당 광덕 2년(764) 장안의 보살사에서 열린 국가적 법요 때 환관들의 횡포와 아첨하는 조정 대신들이 태도에 분노하여 당시 책임자인 곽영예에게 항의문을 보내게 되는데, 쟁좌위고는 이 항의문의 초고입니다. 단숨에 자유자재로 휘두른 필획에서 풍부한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중후함과 격조가 있습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안진경이 쓴 다보탑비, 안진경, 중국, 당 752년>
<다보탑감응비, 시안 비림박물관>

안진경은 당의 충신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원 태수로 부임하기 전인 752년 44세 때 장안 천복사에 건립된 다보탑비의 글씨를 썼다. 비액의 글씨는 당대 서예가 서호가 썼다. 안진경 특유의 굵은 필획이 보이기 이전 단계인 초기 비석 글씨로, 단정한 자형에 정밀하고 변화가 큰 필획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안진경이 쓴 쟁자위고, 중국 당, 764년>

당 서예의 전범典範들
당 태종은 서예문화를 주도하고 왕희지를 숭앙했으며, 서예가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최고의 명필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였습니다.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등 댱대 초의 서예가들은 서예미의 표준을 세웠습니다. 중당의 안진경은 개성있는 글씨체를 구사하였는데, 잠두연미蠶頭燕尾, 즉 ‘누에 머리와 제비 꼬리’라는 뜻으로 글씨 시작 부분이 누에머리처럼 둥글고, 끝 부분이 제비꼬리 같은 뾰족한 모양의 서체였습니다. 특히 장욱과 희소는 개성 있고 자유로운 서예 표현의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당 서예가들의 글씨는 비석으로 많이 세워졌으며, 이것을 탑본, 모각한 비첩으로도 많이 제작되어 후대 서예가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미불이 쓴 강엄의 시, 미불, 중국, 북송 1080년>

북송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미불이 남조 양 강엄의 <종관군건평왕등여산향로봉>을 행서로 쓴 법첩이다. 가늘며 날카로운 행서의 필치와 속도감의 완급 표현 등 초기 미불 글씨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미불은 명 동기창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선비들에게도 중요한 글씨의 모범이 되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순화각첩淳化閣帖, 중국, 북송 992년>

북송 순화 연간에 역대 글씨를 정리한 법첩으로 송 태종 순화 3년(992)에 처음 만들어졌다. 황실 수장품을 진본 중심으로 모각을 한 뒤, 탑본하여 만들었다, 당시 법첩의 제작과 수장은 곧 권위의 상징이었다. 법첩 중 반수가 왕희자와 왕헌지의 글씨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 당시 이왕二王을 추앙한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조맹부가 쓴 증도가, 조맹부, 중국, 원 1316년,>

당 영가대사 현각이 지은 것으로, 육조 혜능을 배견하고 깨우친 선종의 깨달음을 표현한 글이다. 조맹부의 해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글씨로, 연우 병진 1316년 오흥 조맹부가 용광대사도 균헌선사를 위해 썼다는 발문이 있다. 조맹부는 고려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고려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동기창이 쓴 석가여래성도기, 동기창, 중국, 명 17세기>

당의 시인 왕발이 찬한 글을 동기창이 행서로 쓴 것을 모은 법첩이다. 청의 유광양이 모각한 것이다. 서예가이자 문인화가였던 동기창은 미불의 글씨로부터 필력을 얻고, 당의 저수량과 안진경, 왕희지와 왕선지로 거슬러 올라가 서예의 필의를 얻었으며, 조선 후기 서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당 이후의 전범들
송의 서예는 자유롭과 담백한 개성을 지니며 시문학과 결합되어 더욱 격조를 높였습니다. <순화각첩>과 같은 법첩이 간행되면서 서예의 고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더 깊어졌습니다. 원, 명에서서는 고전 서예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서예가들은 보다 문인의 품격이 높은 서예를 추구했습니다. 조맹부는 왕희지의 글씨로 회귀하는 복고를 추구했고, ‘복고’는 중국은 물론 이후 조선의 서예가들의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저수량이 임서한 난정서, 저수량, 중국, 당>

동진 목제 영화 9년(393) 음력 3월 3일 왕희지가 그의 아들 일곱 명과 명사 등 41명과 난정 모임을 가지며 서로 시를 지은 후 왕희지가 서문을 썼는데, 이것이 난정서蘭亭敍다. 당 서예가들의 임모본이 전하며, 이 탑본 글씨는 저수량이 임모한 난정서를 후대에 모각한 글씨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당태종이 쓴 진사명, 태종, 중국, 당 646년>

당 태종은 서예를 즐기고 글씨에 깊이 심취한 황제로 유명하다. 그는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난정서>를 소장했을 뿐 아니라, 본인의 무덤에 순장하도록 했다. 또한 당대의 서예가에게 <난정서>를 임모하게 하였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난정서> 탑본은 이때의 임모본을 바탕으로 후대에 모각한 것들이다. 진사명은 태종의 대표적인 글씨로 정관 22년(645)에 세웠다. 필치는 담담하면서도 무인의 활달한 기운이 있는데, 변화가 크지 않은 정제된 행서의 맛을 보여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대당삼장성교서, 왕희지 글씨 집자, 중국, 당 672년>
<동주삼장성교서비(同州三藏聖敎序碑) 머릿돌, 시안비림박물관>>

왕희지 행서를 집자한 집자비다. 장안 흥복사 승려 회인이 당 태종의 명으로 왕희지의 행서를 20여 년간 정리하고 집자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 비석은 현장에게 태종이 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와 태자 이치의 <대당삼장성교서기>, 그리고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글자라도 여러 글씨를 집자하여 다양한 흘림체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정학교 필 예서 묵정천차嘿定千差, 장학교, 20세기 초>
<정대유 필 예서 일악서옥一嶽書屋, 정대유, 20세기 초>
<무량수각, 김정희, 조선 19세기, 수덕사 근역성보관>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중에 김정희 집안의 원찰인 예산 화암사 중창에 맞춰 보낸 글씨이다. 글씨의 이상향으로 여기는 전한시대 거울에 있는 글자를 기본으로 한 예서의 골격에 전서와 해서의 필치를 더하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삼연재 연보, 이헌복, 20세기 전반, 수경실>

김정희는 문방사우에 남다른 식견을 가졌으며 좋은 문방사우 구하기를 즐겨했다. 이 연보는 김정희가 소장했던 벼루의 모습을 알려준다. 그림은 이한복이 그렸으며, 오세창 등 당대 문사들의 감상평이 남아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벼루, 조선>
<이광사 서첩, 이광사, 조선 18세기 후반>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서예가인 이광사의 글씨를 모은 총 44면의 서첩으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보여준다. 송나라 시인 진사도가 지은<9일에 진소유에게 부치다>라는 시를 필사한 것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권상하가 쓴 귀거래사, 권상하, 조선 17세기 말 ~ 18세기 초>

권상하는 숙종대의 유학자로 송시열의 수제자이다. 도연명이 귀거래사 글귀와 맞도록, 힘찬 필세로 썼으면서도 단아한 격조를 중시하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벽락비, 당 670년, 필자미상>

벽락비는 산시성 용흥사에 있는 비석으로 원명은 <이훈등위망부모조대도존상>이다. 당 고종 총장 3년에 이훈, 이의, 이찬, 이심 등이 세상을 떠난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것이다. 비석 글씨는 전서로, 당의 비석중에서도 고격을 갖춘 중요한 글씨로 평가된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김구가 쓴 두보시, 김구, 조선 16세기>

김구는 조선 중기 문인 서예가로 호는 자암이다. 조선 초기 서예는 중국 원대의 조맹부의 글씨체의 영향을 받은 송설체가 주류였는데, 김구는 송설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서예의 원형에 접근하여 조선적인 글씨를 쓰고자 노력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이인상이 쓴 원령첩, 이인상, 조선 18세기, 보물>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능호관 이인상이 전서로 쓴 글씨를 모아 엮은 서첩이다. 표지에는 ‘원령필’이라 적혀 있는데, ‘원령’은 이인상의 자이다. 이인상이 썼던 다양한 전서 들이 실려 있다. 이인상은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서를 폭 넓게 익혔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김종서의 글씨>
<이적의 글씨(14~15세기)>
<최항의 글씨(1409~1474년)>
<박팽년의 글씨(1417~1456년)>

조선 선비의 서예
조선 전기의 서예는 중국 원대의 시문서화가 조맹부의 글씨를 기본으로 한 송설체가 주류였지만, 점차 조선적인 서예를 찾고자 했던 노력은 한호의 석봉체로 귀결됩니다. 서예의 고전을 탐구했던 조선 후기 선비 서예가들은 다시 왕휘지 글씨를 연구했습니다. 이서는 왕희지의 해서, 송설체, 미불의 글씨체를 융합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서맥은 윤순, 이광사로 이어졌습니다. 이서에서 이광사에게로 이어진 서예의 맥은 조선 후기 조선 고유의 서풍인 동국진체를 이루었습니다. 김정희가 창안한 추사체는 한.중 서예에서 이상적인 요소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줍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낭선군이 쓴 서첩, 이우, 조선 1678년>

낭선군 이우는 선조의 손자이자 인흥군 이영의 아들이다. 낭선군은 명필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의 금석문과 역대 대가들의 필적을 수집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서첩은 왕희지의 글씨를 가늘고 유려하게 다듬은 아름다운 해서로 썼다. 황정견이 소식에게 써 준 <황산곡증소동파>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황정견은 이 시에서 소식을 푸른 소나무에 비유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한글소설 ‘심청전’, 작가모름, 19세기말 ~ 20세기초, 목판본>
<영조어필, 영조, 조선 18세기>

영조는 왕실의 선대 왕 글씨에 대한 존승 전통에 따라 선왕의 글씨를 본받았다. 조선 왕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애호했던 중국 동진의 왕희 글씨와 원대의 종맹부의 글씽ㅆ다. 영조의 글씨는 단정하고 담백하며, 필획에서는 속도감이 적은 차분한 서체를 보여준다. 이 서첩의 표제로 보아 1753년 이후, 영조 재위 후기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의친왕 이강이 쓴 초서 병풍, 의친왕 이강, 광복 이후>

조선 왕실의 서예
서예는 조선왕실에서 인격을 수양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왕의 글씨는 그 업적과 함께 소중히 여겨졌는데, 선대 임금의 필적을 보존하는 것은 곧 그를 계승하고 본받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왕의 글씨는 <열성어필>의 간행이나 어필 석각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 보존되었습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조선 전기의 명필로, 조선 서예에 송설체가 자리 잡는데 역할을 했습니다. 선조의 강한 필획과 빠른 필치로 쓴 글씨는 후대 왕들에게 충실히 계승되었습니다. 정조는 당당한 인상의 글씨를 썼는데, 이 역시 선대 영조의 글씨를 이어받아 자신의 글씨로 연하한 것이었습니다. 조선 왕실 서예는 선대왕의 글씨를 높이고 계승하는 복고적인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한글소설 ‘유충열전’, 작가모름, 1914년, 목판본>
<한글소설 ‘초한전’, 작가모름, 1909년, 목판본>
<한글소설 ‘조웅전’, 작가모름, 1892년, 목판본>

완판방각본 서적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 서적은 18세기에 이르면 민간에 판매하기 위해 목판에 새겨 찍어내는 방각본의 주류가 되었다. ‘완판完版’에서 ‘완完’은 전주 지역의 옛 이름 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주에서는 50여 종류의 한글 고대소설과 250 종류의 서적이 발간되어 전국으로 판매되었고, 이러 ㄴ인쇄, 풀판물은 다가서포 등 10여 곳의 서점에서 판매되었다. 전주에서 질이 좋은 한지를 생산해 내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완판본 판소리계 소설은 한양에서 출판된 경판본에 비해 길이가 길고 전라도 지역의 방언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며 <춘향전>, <심청전>, <토끼전>이 이었다. 판소리계 소설과 함께 <삼국지>, <조웅전>, <소대성전>, <용문전>, <유충렬전>,<초한전>과 같은 영웅, 군담 소설류가 또 다른 주류를 이루었다. 완판본 영웅, 군담소설은 경판본에 비해 길이가 길었고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많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인장과 인보첩, 조선 1867년, 국립중앙박물관>
<벼루, 조선>
<필통, 조선><연적, 조선>
<벼루함, 조선>
<안경, 안경집, 조선>
<서안, 조선>
<필통, 조선><묵호, 조선>
<담배함, 조선><향꽂이, 조선><팔걸이, 조선>
<초화문 편병, 조선>

선비의 사랑방
선비들이 글 읽고 글씨 썼던 사랑방 한 켠을 떠올려 봅니다. 아담한 서안과 그 주위에는 선비들이 자주 쓰고 아꼈던 문방구들이 있습니다. 종이, 붓, 벼루, 먹 등 문방사우 또는 문방사보와 함께 필통, 붓꽂이, 연적이나 선비들이 좋아했던 도자기는 사랑방에 빠지지 않았던 일상용품이자 애장품이었습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선비의 서예
옛 선비들의 마음과 삶을 담고 있는 서예는 글씨로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우리는 감동을 주는 명품으로, 편지나 일기와 같은 일상의 흔적으로 서예의 아름다움을 만납니다. 조선 선비들은 글씨를 쓸 때는 엣 명필의 글씨나 그것들을 모아 만든 법첩을 곁에 두고 좋은 글씨를 쓰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선비의 서예는 옛 모범을 익히고, 그 바탕 위에서 창작하는 에술로 천년이 넘는 시간을 초월한 ‘법고창신’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중국 동진의 왕희자를 위시한 서예가들의 법첩과 김구, 한호, 이광사, 종조 등 조선시대 선비와 왕의 글씨는 복고와 창조라는 조선 서에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특히 석정 이정직은 고전을 공부하며 예술세계를 이루어갔던 선비 서화가의 본보기로 그의 글씨와 사군자는 선비들이 붓을 들며 가졌던 마음가짐과 정성을 그대로 전합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출처>

  1.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2. 안내문, 시안 비림박물관,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