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은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충청.전라도 지역에 있었던 정치집단을 말하면 중국 역사서 <삼국지>에는 마한지역에 54개 소국이 있었으며 그 중 목지국이 맹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 지역에서는 청동기 유물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으며 그 수준 또한 높은 편이다. 전북 지역에서는 청동기와 함꼐 철기가 부장된 무덤이 많이 확인된다. 생활방식이나 의례, 예술활동 등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마한 지역 사람들은 점차 한성백제와 교류를 통해 성장하게 된다.



청동기의 제작
청동기는 구리에 주석과 납을 합금하여 만든 도구이다. 이러한 청동기는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제작할 수 있고 다시 녹여 재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주석과 납의 비율에 따라 단단함이 달라지기 때문에 제작을 할 때에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완주 갈동에서 출토된 거푸집은 2매가 한 쌍을 이루는데 거푸집이 접합되는 칼자루 쪽에는 녹인 쇳물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칼끝 쪽에는 거푸집끼리 짝을 맞추기 위한 눈금 표시가 있다 또한 청동기를 마연하는 데 사용한 숫돌도 확인되어 이 지역에서 직접 청동기를 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무덤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칼을 비롯한 무기류, 생활용품에 해당하는 각종 토기들이 부장품으로 묻혔다. 중국과의 교류가 많았던 지역답게 중국의 영향을 받은 토기 제작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의 발전과 철기의 등장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동검의 형태에 따라 전기의 요령식동검문화와 후기의 한국식동검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 기원전 3~2세기경의 한국식동검문화기에는 청동투겁창, 청동꺾창, 새기개, 청동방울이 새롭게 등장하고 거울도 거친무늬거울에서 잔무늬거울로 변화한다. 한편, 이 시기는 주조 기술의 발달로 초기 철제품이 등장하여 청동기와 함꼐 사용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서부 지역에서는 이 시기의 유적이 아주 많이 발견되는데, 그중 하나인 장수 남양리 유적을 볼 때 전북 지역이 한국식동검문화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북지역은 고대 한.중.일 무역로 주요 거점으로 오랜 세월 중국, 일본과 교류해 왔다. 삼국시대에도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갔지만 지방세력으로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오다 점차 백제에 흡수된다.




중국과의 교류
전북 지역에서는 한국식동검문화기에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청동기가 확인된다. 완주 상림리 유적에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즉 동주시대에 주로 제작, 사용된 동주식동검이 발견되었다. 이때 26자루의 동검을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은 것으로 보아 의례를 치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익산 평장리 유적에서 확인된 중국 청동거울 역시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청동기의 새로운 중심지, 전주 그리고 완주
전주 완주 시역에서는 청동기와 초기 철기가 부장된 무덤 100여 기가 확인되었으며 이는 중서부 지역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많은 수이다. 그중 완주 갈동 유적은 동검 거푸집과 인공 유리, 서북한 지역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쇠낫, 청동화살촉이 전북 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완주 덕동 유적에서는 이른 시기의 거친무늬거울이, 완주 신풍 유적에서는 쇳물을 부어 만든 주조방식보다 발전한 단기인 두드려 만든 단조 방식의 고리자루칼이 확인되어 비교적 오랜 시간 동이 이 일대가 청동기와 철기 제작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제사장과 무구
한국식동검문화기에 만들어진 무덤에서는 한국식동검과 잔무늬거울, 옥이 함께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주술적인 성격을 가졌던 거울, 방울 등의 청동의기와 신비로운 푸른빛을 띠는 옥은 청동기시대에 특별한 의미르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와 제사가 분리되지 않은 고대의 정치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가졌던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청동화살촉>





쇠화살촉, 마한,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만동, 완주군 용진읍 상운리><쇠낫, 마한, 완주군 용진읍 상운리,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만동>


마한의 형성과 지배자의 등장
철기문화가 본격화되고 각 지역 집단이 통합되면서 삼한이 발전하였다.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 일대에 자리했던 마한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54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었고 삼한 중에서 가장 강성하였다고 한다. 전북 지역에는 익산 건미국 등 10여 개의 마한 소국이 자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 지역의 마한은 새로운 철기를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두드려 만드는 단조의 방식으로 만들어져 더 단단하고 강해진 철제 농공구가 대량으로 생산,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높아지고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마한 무덤인 흙무지무덤에서는 철기를 만드는 도구와 고리자루큰칼, 쇠투겁창 등의 철제 무기, 쇠도끼, 쇠낫 등의 농공구가 다량으로 확인되어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마한 사회의 성장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새를 형상화한 유물은 청동기시대부터 발견된다. 새 모양 토기와 목기,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을 통해 새 관련 의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점뼈는 동물 뼈를 불에 달구어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던 도구이다. 주로 사슴과 멧돼지의 어깨뼈나 갈비뼈가 사용되었다. 점뼈는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 동북지역과 일본의 규슈지역에도 분포한다.

마한의 신앙과 의례 예술
농경사회였던 마한에서는 해마다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가 이루어졌다. 제사가 이루어진 ‘소도’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물을 축소하여 만든 각종 소형토기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뼈 등이 확인되어 마한 지역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한 사람들은 특히 ‘새’를 숭배하여 흙이나 나무 등으로 다양한 새를 만들고 신에게 공헌물로 바치거나 솟대를 만들었다. 한편, 무덤에는 장송의례와 관련된 특수한 토기나 의도적으로 훼손한 토기를 묻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죽은 이를 떠나보내기 위한 의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마한 토기의 등장과 백제와의 만남
마한 토기는 이전에 비해 더 단단하고 다양해진다. 전북 지역에서는 겹아라기토기나 두귀달린 항아리와 같은 특징적인 토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마한이 성장하던 시기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 역시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발전해 나가기 시작한다. 전북 지역에도 곧은입항아리와 굽다리접시, 병 등과 같은 백제 토기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마한무덤인 흙무지무덤에서 마한토기와 함께 출토되어 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백제와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전북 지역 마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마한, 그 시작
전북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철기가 등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전 시기의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식동검 문화가 더욱 발전하는데, 전북 지역은 그 어느지역보다도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부장된 무덤이 많이 확인된다. 청동기와 철기를 만드는 뛰어난 기술력은 이 지역에서 여러 소국들이 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한이 형성된다. 이후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한은 더욱 발전한다. 생활 방식이나 도구, 의례, 예술 활동 등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마한은 자체적으로 발전하는 한편 한성백제와의 교류를 통하여 지역 집단으로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이는 이후 고대국가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된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신께 바치는 말
말은 예로부터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영혼을 인도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은 말 모형을 만들어 무덤에 묻거나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제물로 만든 말 모형이 확인되었다. 또한 흙으로 빚은 인형도 확인되는데 이는 인신 공양을 대신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말 모형과 인형은 모두 머리와 다리, 몸통이 떨어진 상태로 확인되며, 이는 제사가 끝난 후 액운을 막기 위해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바다를 통한 교류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는 중국 도자기인 흑유 항아리와 청자 항아리, 그리고 일본계 토기가 확인되었다. 일본계 토기로는 뚜껑접시와 접시달린병, 굽다리접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일본 고훈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스에키 토기이다. 이들 역시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를 통해 당시에 백제가 바닷길을 통해 중국,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토기에 담긴 공헌물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는 쇠투겁장과 쇠칼, 비늘갑옷과 같은 철제무기와 말안장,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등의 말갖춤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주로 큰 항아리 안에서 확인되어 토기 안에 넣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면 팔각형의 쇠투겁창이나 말안장 등은 대가야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는 철기를 공헌물로 사용한 대가야 사람들의 제사도 함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돌로 만든 모조품
돌로 만든 모조품은 갑옷, 곱은옥, 방울, 손칼, 거울 등을 축소하여 만든 것으로 몸체의 중앙이나 끝에 구멍이 1~2개 뚫려 있다. 이는 제사를 제사를 지낼 때 신령스러운 나무에 매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조품은 일본 고훈시대의 제사 유적이나 고분, 주거지 등에서 많이 확인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오키노시마 유적을 거쳐 나라까지 가는 중요한 바닷길에서도 발견되어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해양 제사를 지낼 때에 왜가 함께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초기의 해양제사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해양 제사가 시작된 것은 3~4세기경이다. 이때는 바닥이 둥근 짧은목항아리가 제사 용기로 사용되는데 이 안에 음식물과 같은 공헌물을 넣고 노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짧은목항아리는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마한의 집터나 무덤에서 확인되는 것과 차이가 거의 없어 실제로 쓰던 토기를 제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해양 제사의 쇠퇴
6~7세기에 이르면 해양 제사는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전 시기의 다양한 토기 대신 병이나 장군 같은 일부 형태의 백제 토기만 확인되고 제사를 위하여 만든 특별한 도구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백제 단독의 제사가 이루어지고, 백제의 멸망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부안 죽막동 유적은 위험한 바닷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안전한 항로를 위한 기원의 터가 되어 주고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해양 제사의 중심기
5~6세기에는 해양 제사가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며 백제 토기와 함께 중국, 일본, 대가야, 왜의 다양한 제사 용품이 확인되어 국제적인 성격이 제사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제사 용기로 사용하기에 좋은 넓은입항아리와 그릇받침, 큰항아리가 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러 개의 돌기를 붙인 넓은입항아리, 삼각형 또는 물결무늬를 새긴 그릇받침은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만 확인되는 독특한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제사에 사용되었던 토기들이 모두 깨어진 상태로 출토된다는 점인데, 이는 제사가 끝난 후 신에세 바쳤던 제물이 그대로 신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심, 부안 죽막동
부안 죽막동 유적은 삼국시대 최대의 해양제사터로 바다로 돌출된 변산반도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제사가 주로 이루어진 시기는 삼국시대이고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의 해양 제사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죽막동 유적에서 제사를 처음 지낸 것은 3~4세기경으로 제사의 주체는 마한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시기인 5~6세기에는 해양 제사가 가장 성행하였는데 마한과 백제를 중심으로 대가야와 왜까지 참여한 국제적인 제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6세기 중.후반~7세기 전반에는 백제 단독의 제사가 이루어졌는데 백제 멸망 이후 제사 장소로서의 생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죽막동 유적에서는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등도 확인되어 이후에도 항해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출처>
-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 안내문, 광주박물관,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