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왕권 중심의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지방 세력들을 차례로 통합해 나갔다. 이 시기 전북 지역 지방세력의 유적으로는 고창군 봉덕리 고분, 익산 입점리 유적 등이 있다. 한성백제기에 지방을 통치했던 흔적으로는 중앙정부에서 지방세력의 수장들에게 보내준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중국도자기 등 다양한 형태의 위세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금동장식 신발은 중앙에서 제작하여 지방 유력세력에게 선물로 준 위세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강이나 바닷가 교통 요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같은 성격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장식신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고분과 많은 수의 부장품은 현세의 삶이 내세로 고스란히 이어진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금동장식신발은 당시의 장례 풍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장품 가운데 하나이다.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금동장식신발은 전형적인 백제 금동장식신발로 옆면을 거북이 등껍질문양으로 나누고 그 안에 용과 새, 사람 얼굴 모양을 새겼다. 또한 바닥 면에는 용을 정교하게 투조하여 당시의 뛰어난 금속공예 수준을 보여준다.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금동장식신발은 나주 정촌 고분의 금동장식신발과 매우 유사하고 서산 부장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와 거의 동일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백제 지역에서 확인되는 금동장식신발에는 여러 공통점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백제의 중앙에서 신발을 만들어 각 지역에 보급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의 금동장식신발은 에다후나야마고분이나 카모이나리야마고분 등 6세기 대의 릴본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여 당시에 정치적으로 밀접했던 백제와 왜 사이에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3년)

벡제의 금동장식신발
금동장식신발은 고대사회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장례 풍습으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이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 등 고대 삼국과 관련된 무덤 유적에서도 꾸준히 출토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백제의 금동장식신발은 20여 점으로 백제의 전 영역에서 고르게 출토되었으며, 주로 강이나 바닷길의 요지에 분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유물이 수습된 고분은 주변지역에서 최상급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금동장식신발은 주로 백제 중앙에서 제박하여 지방 세력에게 일종의 선물로 내려준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백제의 지휘집단은 지방의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지방통치 전략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백제로의 전환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전북 지역의 정치 세력들은 5세기대에 백제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역의 세력들은 여전히 상당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고, 금동장식신발과 금동관모가 출토된 고창 봉덕리와 익산 입점리 고분군에서 보듯이 백제 중앙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면서 자율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538년 수도를 사비로 옮긴 이후 백제의 지배가 한층 강화되면서 지역 세력들은 점차 백제로 편입된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고창 봉덕리 고분에서는 금동장식신발(보물)을 비롯하여 중국제 청자, 작은 단지로 장식한 구멍 항아리, 청동잔과 잔받침, 큰칼, 금귀걸이 등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청자항아리 등 출토유물들은 한성 백제기 다른 지방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신라 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등잔모양 토기와 거의 비슷한 외형을 보여주고 있다. 등잔모양토기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잔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무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유물로 고대 사람들의 사후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창 봉덕리 유적에 대해
고창 봉덕리 무덤은 1998년 지방도로 확장 공사를 진행하던 중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4호 구덩식 돌방무덤에서 이번에 새롭게 보물로 지정된 금동장식신발을 비롯하여 중국제 청자, 작은 단지로 장식한 구멍항아리, 청동잔과 잔받침, 큰칼, 금귀걸이 등의 중 유물들이 도굴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당시 고창지역에 있었던 정치 세력의 위상과 함께 백제 중앙 세력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백제의 지방통치와 전북
한성시기 백제는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역 수장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기 위해 금동관모와 금동장식신발,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 등의 위세품을 주었다. 전북지역 고창 봉덕리와 익산 입점리 유적에서는 마한의 흙무니무덤 안에 백제 무덤인 돌방무덤이 만들어졌고, 한성백제양식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마한 세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백제로의 편입
전북지역에는 한성백제 말인 5세기 중엽 경부터 백제 무덤인 굴식돌방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백제가 지방지배를 확고히 하는 사비기에 들어서면 전북지역은 완전히 백제 지방으로 편입된다. 고창 예지리, 완주 둔산리 등에서는 사비기의 굴식돌방무덤이 확인되고, 전북의 여러 유적에서 백제 관리들만 사용할 수 있는 은으로 만든 관꾸미개와 도장 등이 확인된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남강의 상류지역인 남원과 섬진강 유역인 임실, 금강 유역인 장수, 진안에서는 많은 수의 대가야계 구덩식돌덧널무덤이 확인되었으며 무덤의 형태뿐 아니라 부장품의 종류가 대가야 중심 지역과 거의 동일하다. 대가야(고령, 합천 일대)에서는 얕은 접시에 작은 네모 투창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잘록한 목에 뚜껑받이턱이 있는 항아리, 몸통에 긴 띠를 세로로 장식한 원통형 그릇받침 등이 성행한다.






가야의 토기
가야 토기는 지역에 따라 함안을 중심으로 한 아라가야양식, 진주.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양식,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 남원과 장수, 진안 등 전북지역 가야 고분에서 확인되는 토기 대부분은 5세기 대의 대가야 양식으로 긴목항아리와 그릇받침, 뚜껑달린굽다리접시 등이 대표적이다. 5세기 전반에는 소가야 양식 토기와 대가야 양식 토기가, 6세기 대에는 백제, 신라 토기가 함께 확인되어 내륙 교통의 요지인 전북 동부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가야와 백제, 신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가야의 말갖춤과 무기
가야 고분에서는 재갈, 발걸이, 말띠드리개, 기꽂이 등 철제 말갖춤과 고리자루큰칼, 화살촉, 쇠투겁창 등 철제 무기가 출토되어 철의 왕국 가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남원 월산리와 두락리에서 출토된 고리자루칼 등은 백제 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대가야와 백제가 제작 기술을 교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임실 금성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뱀모양칼은 일본에서 주로 확인되어 일본과 대가야지역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닭머리 모양의 장식이 붙은 항아리를 천계호라고 한다. 닭머리 부분에는 구멍이 뚫려있지 않기 때문에 액체를 따르는 실용적 기능은 없다. 무덤에 묻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것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은 고대 제사장 등의 권위를 나타내는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주술적의미나 장식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그림이나 글자를 새겨 놓고 있으며, 조형미가 우수하며, 보존상태가 좋은 유물들이 많은 편이다.





가야 무덤의 부장품
가야 사람들은 죽은 이를 위하여 무덤에 아주 많은 양의 부장품을 함께 묻었다. 중심이 되는 무덤에는 위세품과 장신구뿐만 아니라 죽은 이와 가깝거나 죽은 이를 따르던 사람들을 함께 묻기도 하였다. 남원 월산리 유적의 청자계수호와 철제자루솥, 남원 두락리 유적에서 출토된 흑옥과 은팔찌 등은 백제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백제와 전북 동부 지역 가야 사이의 교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외에도 가야무덤에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하여 무기나 농.공구를 축소한 철기를 함께 묻기도 하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전북 동부 산간 지역의 가야
전북 동부 지역에 가야가 처음 등장한 것은 5세기 초반의 소가야 세력이며, 가야는 남강 상류 지역을 통하여 한성백제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이후 5세기 후반에 백제가 일시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 대가야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남강의 상류지역인 남원과 섬진강 유역인 임실, 금강 유역인 장수, 진안에서는 많은 수의 대가야계 구덩식돌덧널무덤이 확인되었으며 무덤의 형태뿐 아니라 부장품의 종류가 대가야 중심 지역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남원 원산리와 두락리 고분 일대에는 가야의 집단인 기문己汶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6세기 이후에 국력을 회복한 백제가 전북 동부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이 일대는 백제와 가야, 신라의 세력 다툼의 주요 무대인 동시에 완충 지대의 역할을 하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백제와 신라의 전투, 그리고 백제의 부흥 운동
백제 무왕 때부터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치열해졌다. 이러한 전투는 운봉고원의 주요 교통로에서 벌어졌는데 남원 아막성과 임실 각산성 등이 대표적이다. 의자왕 20년(660)에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함락시켰고 백제 유민들은 왕자 부여풍을 중심으로 줄기찬 부흥운동을 펼친다. 이들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근거로 활동하였고 부안 우금산성은 백제 부흥 운동군의 마지막 저항지인 주류성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통일신라 속의 전주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에 당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을 군현제로 정비하였으며 전북 지역에는 완산주와 남원소경이 설치되었다. 이후에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고치면서 완산주는 전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통일신라의 지방이 된 전북 지역에는 돌덧널무덤이 성터 등 그 당시에 만들어진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으나 익산 왕궁리,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과 같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유적들은 계속해서 이용되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후백제의 건국
통일신라 말에는 왕위 쟁탈전이 극심해지고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변경의 군진이나 지방의 상업 중심지에서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서.남해지역을 지키는 방수군으로 파견되었던 견훤도 그 중 하나인데, 진성여왕 때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군사를 일으키고 892년에 무진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의 기틀을 마련한다. 견훤은 백제 부흥 운동을 내세우며 전남지역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이와 관련한 여러 성터가 남아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전북 지역은 오랜 세월 왕조의 수도가 번창한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10세기 초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이 지역에도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문화적 공동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남원 실상사에 있는 편운화상부도에는 “정개 10년 경오년(910)에 (부도룰) 세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정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후백제 왕 견훤 때의 연호로 보인다.



편운화상승탑
남원 실상사에 있는 편운화상 승탑에는 “정개 경오년(910)에 세원다”라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개正開는 후백제의 견훤의 연호이며 편운화상은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을 연 홍척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편운화상 승탑도 후백제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후백제의 왕도, 전주
900년에 전주로 도읍을 옮긴 견훤은 후백제라는 국호와 정개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백제 부흥 운동을 건국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 이 외에도 중국 오월, 일본, 거란 등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한편 신라, 고려와는 영도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930년 고려와 있었던 안동전투를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936년에 멸망하게 된다. 전주에는 현재 후백제의 많은 유적이 남아 있으며, 그중 도성으로 추정되는 동고산성에서는 전주성 명 기와, 쌍봉황무늬암막새, 초기 청자편 등이 출토되어 후백제의 왕도였던 전주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백제의 부흥, 그리고 후백제
백제 시기부터 전북 지역은 정치 권력의 중심이 아닌 지방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남부와 중부 지역을 이어주는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백제와 통일신라, 후삼국, 고려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 낸 역사적 사거느이 현장이 되어 왔다. 통일신라의 지방이었던 전북 지역은 이후에 백제 부흥을 내걸고 후삼국 통일의 열망을 꿈꾸었던 후백제의 중심 지역이 된다. 특히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안내문, 도쿄국립박물관, 2023년)

청동허리띠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청동 가락지, 익산시 오산면 장신리, 완주군 이서면 금평리>


청자 생산과 전북
고려시대에는 서남해안의 전라도를 중심으로 많은 청자가마터가 있었다. 진안 도통리의 청자 가마는 벽돌을 쌓아 만든 초기의 형태이다. 그 이후 부안 유천리 가마터에서 대량 생산된 양질의 청자는 고려시대 도자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고군산도의 비안도와 십이동파도 해역에서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과 함께 부안청자들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서해 바닷길에서 전북지역이 주요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전라 천년의 시작 고려
고려는 지방의 호족 세력을 연합하여 세운 국가이다. 건국 초부터 개방정책을 펼쳐 수도 개경에서 대외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회와 문화에서는 개방성과 다양성이 돋보였다. 또한 불교가 전국으로 퍼져나가 성행하였다. 대규모의 불교 행사가 치러졌으며, 정교하고 섬세한 예술품들이 제작되었다. 절라도라는 지명은 현종 9년(1018)에 강남도와 해양도가 합쳐지면서 탄생하였다. 전주에는 목牧이 설치되어 전라도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또한 전북지역은 전남 강진과 더불어 고려시대 청자 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진안 도통리, 부안 유천리, 고창 용계리 등지에 청자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백자 잔과 받침, 정읍시 고사부리성>
분청사기 생산과 전북
조선시대 도자기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된다. 고려 말에 등장한 분청사기는 표면에 백도를 분장한 자기로, 조선 초기 세종 연간에 규격화된 인화문이 공통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전북지역에서는 고창 용산리에서 분청사기 가마가 최초로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분청사기뿐만 아니라 백자, 흑유 도자 등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이외에도 무주, 완주 지역에서 도자 제가기 생산되었고 김제, 전주, 정읍, 무주, 고창 등지에서 소비되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성리학의 나라, 조선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관학파가 중심이 되어 실용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유교 서적이 간행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였다. 전란 후 조선은 사회질서 회복을 위해 예학을 중시하였다. 이로 인해 각종 으례서가 집필되었다. 장자에게 상속이 이루어지고, 제사를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전국 8도의 감영 중 최대 규모였다. 감영에서 출판에 필요한 책판을 보관하기 위해 전주 향교 내에 장판각을 지었으며, <주자대전>, <성리대전> 등의 책판이 남아 있다. 전북지역의 고창 용산리, 무주 삼가리, 정읍 고사부리성과 같은 유적에서는 조선 초기에 생산된 도자 제기가 다수 출토되어 조선시대 제사 문화으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출처>
-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