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舍利는 산스크리트어 “śarīra”에서 유래된 말로, 유골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나 고승들 죽은 후 화장하고 남은 결정체로 신성한 존재의 증거로 간주한다. 석가모니가 죽었을 때 사리를 8등분 하여 여덟곳에 모셔졌다. 인도에서 사리는 스투파에 모셔졌는데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전해진 석가모니 진신사리는 다양한 형태의 탑에 모셔졌다. 금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피프라와 사리’는 고대 인도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불교 유물 중 하나로, 석가모니 부처의 실제 사리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코끼리 한 마리가 머리 위에 상자를 얹고 싱긋 웃으며 신나게 걸어갑니다. 앞에 앉은 사람이 상자를 소중하게 들고 있습니다. 코끼리는 힌두교 신 ‘인드라’가 타고 다니던 동물이었고, 왕과 귀족처럼 높은 신분의 사람만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럼 앞에 앉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요? 이 유물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는 스투파를 장식하던 조각입니다. 아마 인도 남쪽으로 사리가 내려올 때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사람들이 아름답게 장식한 코끼리를 타고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습니다. 왜 아무런 짐도 없을까요? 어떤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었을 때, 인도 곳곳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 가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리를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들은 사리가 부족해서 남은 재만 가져 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의 사리는 무척 귀해서 화장하고 남은 재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알려주는 일화입니다. 사리가 소중하기 때문에 사리를 담았던 단지, 사리와 함께 담았던 보석도 석가모니의 사리만큼 귀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이야기의 숲
옛 인도인들은 생명이 태어나서 죽는 삶이 한 번만이 아니라 믿었습니다. 북인도 히말라야산맥 아래에서 태어난 석가모니도 깨달음을 얻은 이번 생 이전에 셀 수 없이 많은 인생을 되풀이하며 공덕을 쌓았습니다. 갠지스강 주변을 무대로 한 그의 수많은 인생 이야기는 석가모니의 사리와 함께 남쪽으로 전해집니다. 남인도에 도착한 이야기는 이곳 사람들의 활기차고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져 마치 즐거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다시 태어납니다. 다양한 이야기 속 장면들이 수많은 스투파르 장식하면서 남인도에는 이야기의 숲이 펼쳐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사리함은 사리를 담는용기로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의례적, 예술적 상징성을 갖고 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대체로 여러겹의 함 속에 봉안된다. 외함은 석재나 금속으로 만든 큰 용기이며, 중간함은 금, 은, 구리 등 귀금속으로 된 항아리이다. 내부 사리기는 투명한 수정이나 유리가 선호되었다. 사리함 외벽이나 뚜껑에는 사리의 조성내력을 새기거나 적고 있다. 피프라와 사라함은 여러 겹의 용기에 보존되어 있었다. 바깥쪽은 부드러운 석제로 만들어진 사리함이며 안쪽에 수정으로 만든 작은 항아리가 있었다.


무른 돌인 동석을 돌려 깎아 만든 사리 단지입니다. 코끼리, 말, 사슴, 날개 달린 사자를 차례대로 새긴 단지 안에, 글자가 새겨진 작은 단지 네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 있던 단지에 새겨진 시록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애쓴 기원전 3세기 승려의 유골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가모니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나 고승들의 사리도 중요하게 여겼던 전통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수정 사리기는 사리를 담는 용기 중에서도 가장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지는 형태로, 불교에서 부처의 순결함과 진리의 투명성을 상징한다. 주로 고대 불교 유적에서 출토되며, 피프라와 사리기가 대표적이다.

사리를 직접 담았던 사리 단지는 사리만큼이나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귀한 재로로 만들고, 장식도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만듭니다. 사리를 담은 단지를 또 다른 단지 안에 넣고, 또 넣어 스투파 안에 모셨습니다. 사리 단지는 금이나 은, 상아 등 사리를 모신 각 지역에서 귀하게 여기는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고 사리를 직접 담는 병은 빛을 그대로 통과하는 수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피프라와는 인도 북부 네팔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1989년 지역 토지 관리인 윌리업 페페가 발굴하였다. 하라함 표면에는 고대 브라흐미 문자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명문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그이 사촌이 봉헌하였다고 적혀 있다. 석가모니의 이름 들어간 가장 이른 시기의 사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실제 석가모니 진시사리일 가능성이 매우 높게 보고 있다. 내부에는 사리와 함께 금박 조각, 보석, 작은 구슬 등이 같이 들어 있었다. 아소카왕 이전 사리 공양이 정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샤카족의 깨달은 자’라는 뜻의 ‘샤카무니’, 즉 석가모니라 불립니다. 석가모니는 갠지스강 남쪽 쿠시나가라에서 윤회의 굴레를 벗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왕이나 성자의 장례를 치르듯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를 스투파에 묻었습니다. 스투파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 등 북인도 여덟 곳의 성지에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약 150년 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 아소카왕이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하고자 갠지스강 유역의 스투파에서 사리를 꺼내 나눈 뒤, 8만 4천개의 스투파에 다시 모셨습니다. 전시된 사리는 네팔과 국경을 맞댄 북인도 피프라와 스투파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발견도니 사리 단지 안에서는 유골과 함께 금이나 진주, 꽃 모양으로 만든 보석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는 아소카왕이 나중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꺼내어 다시 나눌 때 넣은 보석으로, 사리와 똑같이 귀중하게 여겨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발견된 석함과 사리호는 캘거타 인도박물관으로 보내졌고 모양이 섞여 있던 보석 중 모양이 겹치는 거 331개는 발견자 페페가 소장하게 되었다. 사리와 함께 모셔진 보석 등은 불교에서는 사리 만큼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피프라와 사리 발견 이야기
피프라와 사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98년 1월입니다. 피프라와의 영지 관리인이었던 윌리엄 페페는 당시 고대 불교 유적 발굴이 유행하여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의 위치가 밝혀진 사실에 고무되어 자신의 영지 내이 둔덕을 발굴해 보기로 합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둔덕 한가운데에서 마우리아 시대 브라흐미 문자로 ‘부처의 유골’이라 적힌 사리호가 들어 있는 석함을 발견합니다. 이어진 발굴로 이곳이 석가모니가 성장한 카필라바스투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석함과 사리호는 콜카타의 인도박물관으로 보내졌고, 사리와 함께 섞여 있던 보석 중 모양이 겹치는 것 331개는 사리를 발견한 페페가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피프라와 스투파는 훗날 액자에 적힌 데로 ‘페페 스투파’라 불리기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사리,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기원전 400년 무렵 석가모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석가모니 시신을 화장하여 얻은 사리를 여덟 개의 스투파에 나누어 모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150년 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랐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갠지스강 유역의 스투파에서 사리를 꺼내 인도 곳곳에 8만 4천 개의 스투파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르침이 인도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