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진주박물관은 경남지역 선사시대와 가야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1984년에 개관하였다. 1998년에 가야유물을 전시.연구하는 김해박물관이 개관됨에 따라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상설전시실에는 임진왜란의 시작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일부는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있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기간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구성으로 역사박물관으로서 성격이 잘 반영되었다. 박물관은 대표하는 유물인 비격진천뢰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경과를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 당시 전쟁을 독려하는 선조의 교지, 전령을 비롯한 다양한 문서들, 개인간에 오갔던 편지, 당시 일본의 정세를 보여주는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비격진천뢰는 조선 선조 때 이장손이 발명한 인마살상용 무기로 임진왜란 때 사용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지름 21cm 둥근 공모양으로 내부에는 화약과 마름쇠 등을 장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화포인 완구에 넣어 발사하면 땅에 떨어진 후 폭발하여 작은 철편이 사방을 날아가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포탄
선조 때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어 임진왜란 때 사용한 무쇠로 만든 포탄이다. 안에 마름쇠 등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인 후 손으로 던지거나 굴리기도 하였으며, 완구에 넣고 발사하기도 하였다. 목곡木谷에 감긴 약선의 수에 따라 폭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 현대의 시한폭탄 역할을 하였다. 박진이 1592년선조 25 경주성을 수복할 때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무찔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하나의 전쟁, 세 가지 기억
1592년선조 25에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7년 동안의 전쟁을 삼국은 서로 다르게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임진년에 왜구들이 일으킨 난’이란 의미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북한에서는 ‘임진 조국 전쟁’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왜구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로 ‘항왜원조’, 또는 만력제 때 조선에서 벌인 전쟁이란 의미로 ‘만력 조선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발한 해의 일본 왕의 연호가 분로쿠·게이초이고, 여기에 전쟁이라는 일본어 ‘에키役’를 더한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시작된 임진왜란은 명군이 참전하면서 조선·명·일본 삼국의 국제 전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 삼국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은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에 있었던 일본의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거대한 병참기지로 건설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다이묘들이 이곳에 군대를 이끌고 집결했다. 한때 오사카성 다음으로 큰 성이었다고 하며 축성시기도 빠른 편이다. 중심에 혼마루가 있고 주변에 많은 다이묘들의 진영들이 있었다. 현재는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영주들의 진영과 왜군 지휘선인 아타케부네가 바다에 떠 있다.

성 아래 마을 사이로 지나가는 명나라 사신의 행렬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 조선 출병의 거점 히젠 나고야성 그림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 거점으로 삼았던 나고야성과 주변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나고야성 안에는 성주가 거처하는 고텡御殿, 일본 가면극인 노能의 무대 호舞 등 건물 약 70동, 다이묘들의 진과 가옥 약 70개소, 무사와 상인, 명 사절단약 40명, 포르투갈 사람 등 260여 명의 인물과 함께 안택선 3척과 물자를 실을 수 있는 범선 약 80척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작 연대와 세밀한 묘사 등을 고려하면 임진왜란 당시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과 강화교섭을 하고자 나고야성을 방문한 명나라 사절단을 통해 이 그림의 시점은 1593년 5월로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복제품)는 도요토미 사후(1600년)에 그려졌다. 인물 위쪽에 동복사 소코 이쿄오는 ‘모든 장수가 추앙하는 것이 태산과 같다.’라는 찬문이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1600년에 그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이다.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알려졌으나, 이 그림에서는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죽은 후 에도시대 초기까지 다이묘나 절 · 신사에서 그의 초상을 많이 제작하여 주로 예배용으로 많이 사용하였다.(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일본 에도 후기에 출판된 임진왜란을 미화한 책
일본의 에도 후기 학자 가와구치 조주川口長孺가 서술한 임진왜란 기록이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 측 자료인 <서애문집>과<징비록>을 비롯하여 중국의 <명사明史>, 일본의 <다이코기太閤記> 등 총 60여 종의 사료들을 폭넓게 인용하여 1586년~1598년의 역사적인 일들을 서술하였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의 전체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바탕에 깔고 임진왜란을 서술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도요토미의 진영을 중심으로 각 다이묘의 진영을 점으로 표시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요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 이름 있는 다이묘들이 정치적 관계에 따라 배치되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출정을 위한 일본 히젠 나고야성 주변의 다이묘 배치 그림
이 그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준비하기 위하여 히젠지금의 일본 사가현 나고야성에 다이묘들을 배치한 그림이다. 도요토미의 진영을 중심으로 각 다이묘의 진영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나고야성에는 도요토미가 머무르는 행영 본부 뿐만 아니라 조선 침략을 위해 모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을 비롯한 다이묘와 병사, 상인과 물자 등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일본에는 임진왜란 당시 다이묘들의 배치를 담은 그림 30여 점이 알려져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주력 무기, 조총과 일본도
조총과 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력 무기였다. 조총은 1543년 일본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센코쿠시대를 거치며 실전을 통해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유럽에서는 15세기 말 아쿼버스라는 화승총이 발명되었다. 이후 1525년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화승총과 창부대를 함께 편성한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일본도는 칼날을 포함한 전체 길이가 3척 내외약 90~100cm인 칼을 표준으로 하였다. 예리한 일본도는 당시 명과 조선에 비해 품질면에서 뛰어났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부산진순절도(보물)는 숙종대에 처음 그려진 그림을 영조 때 화가 변박이 다시 그린 것이다. 부산진성 성문과 성벽을 중심으로 전투장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군과 왜군의 전략 차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가 벌어진 부산진성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
조선 후기의 화가 변박이 1760년에 임진왜란의 첫 전투 장면을 모사한 것이다. 왼쪽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바다에서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 오른쪽에는 성벽 위에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을 중심으로 군사들이 일본군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4개 진영 가운데 제1의 해상관문이었다. 1592년 4월 14일 벌어진 이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순절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때 조선의 주력 무기, 활과 총통
임진왜란 때 조선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다. 1589년 7월 대마도주가 조선에 조총을 보냈으나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총 부대를 앞세우며 부산진에 도착한 일본군에 대항해 조선군은 활을 쏘고 총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총의 위력에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조선군은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을 노획한 후 분석하는 등 조총 제조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중에 조선군도 조총을 제작할 수 있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동래부순절도(보물)는 숙종대에 처음 그려진 그림을 영조 때 화가 변박이 다시 그린 것이다.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진 동래성이 함락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전투장면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남쪽 성문에서는 병사들이 왜군과 싸우고 있고, 중심에는 북쪽을 향해 앉아 있는 송상현의 순절 장면, 위쪽 북문 밖으로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가 벌어진 동래성이 함락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조선 후기의 화가 변박이 1760년 동래성 전투 장면을 모사한 것이다. 아래쪽에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있고, 가운데 성문 위에 동래 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일본군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이미 성이 함락되어 북동쪽으로 일본군이 들어온 상황을 묘사하였다. 1592년 4월 15일 벌어진 전투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은 전사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7년 전쟁의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뒤, 1591년 8월 자신을 태합太閤, 다이코으로 칭하였습니다. 이후 전국의 영주들에게 조선 침략을 선포하고 규슈 사가현에 출병 거점인 히젠 나고야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일본군은 1592년 3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으로 나고야성을 출발하여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등을 함락한 뒤, 파죽지세로 한성을 향해 진군하면서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히데요시의 공명심과 정복욕, 명과의 통상 무역재개, 영주들의 불만을 해외의 영토 확장으로 잠재우려는 의도, 영주들의 군사력 감소를 통한 체제의 안정 모색 등 다양한 견해가 거론됩니다. 이러한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권응수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수복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이 초상화는 선무공신 2등에 봉해질 때 그려진 것을 후대에 다시 그린 이모본이다.

의병장 권응수 초상
임진왜란 때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권응수의 초상이다. 이 초상화는 17세기 공신 초상화의 양식이지만 이 시기 호랑이 흉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옷 주름의 강한 음영 등으로 보아 후대의 이모본임을 알 수 있다. 권응수는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하는 등 커다란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권응수 유품 칼(보물)’과 ‘곽재우가 사용했던 칼(보물)’은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에게 빼앗은 칼이다. 당시에도 일본도의 우수함이 잘 알려져 있어 칼날은 그대로 쓰고 칼집은 조선의 양식에 맞추어 개조하였다.

권응수 장군이 일본군에게 빼앗은 칼
권응수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에게서 빼앗은 칼이다. 칼의 손잡이에는 일본도임을 알려주는 일본의 연호 ‘대영원년大永元年, 1521년’이 새겨져 있다.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도의 우수함을 잘 알고 있어 칼날은 그대로 사용하고 칼집은 조선의 양식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곽재우가 사용했던 칼
곽재우가 일본군이 썼던 칼을 노획한 후 개조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승인 남명 조식의 가르침대로 의로운 삶을 몸소 실천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곧 의병을 일으켰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사용했던 것으로 투구와 갑옷 일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갑옷은 돼지가죽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든 미늘을 엮어 만든 비늘갑옷이며 투구는 챙이 있는 원뿔 모양이다.

류성룡의 갑옷과 투구
류성룡이 전쟁 당시에 입었던 갑옷과 투구를 복원하였다. 갑옷 일부가 전해져 그 형태와 재질을 짐작할 수 있다. 돼지가죽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든 미늘을 사슴가죽 끈으로 엮어서 제작한 비늘 갑옷이다. 투구는 챙이 있는 원뿔 모양으로 쇠비늘을 엮어 만든 볼가리개와 뒷가리개가 연결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징비록은 조선중기 문신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정확히 언제 저술한 책인지 알 수 없으나 은퇴후 고향에서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쟁 상황 등을 회고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조 때(1647년) 필사본이 간행되었으며 숙종 때는 일본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류성룡이 저술한 임진왜란 기록
류성룡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懲毖”는 의도에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7년간의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군무와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류성룡은 이 책에서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모두 침략한 동아시아 전쟁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징비록은 근세 일본인들에게 임진왜란을 알려 주는 주요한 사료로 인식되어 많이 인용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선조가 도체찰사 류성룡에게 내린 명령서
1592년 12월 14일 선조가 평양 부근에서 도체찰사로 임무를 수행하던 류성룡에게 내린 명령이다. 선조는 류성룡에게 대장으로서 왕명을 받아 지방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처리하고 자세하게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하였다. 유지는 승정원의 담당 승지가 왕명을 전달하는 문서이다. 도체찰사는 조선시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의정이 겸임하였던 임시직으로 해당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의병의 창기를 촉구하기 위해 지은 초유문 초록으로 ‘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왔고, 붓에 먹을 찍을 겨를도 없이 써 내려갔다.’고 했다. 260구 1558자에 달하는 긴 격문이다.

김성일이 지역민들에게 일본군의 침략에 맞설 것을 당부하는 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된 김성일이 지역민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직접 쓴 초고본이다. 이 글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경상도 지역을 장악한 뒤인 1592년 5월 7일에 작성되었다. 초유사는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패배와 도주로 두려워하던 경상우도 지역민들에게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임시 관직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이원익 초상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승정대부에 가자되었다. 58세인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나 청백리에 뽑힐 정도로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초상의 이원익은 모란과 공작 그림의 흉배를 부착한 흑색 운문단 단령을 입고 있다.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교의에 앉은 ‘좌안칠분면전신교의좌상’이며 종이 바탕에 그려진 초본 형식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원익 초상은 이 초상화 외에도 소수서원, 문중에서 운영하는 충현박물관에도 각 1점씩 더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의 반격: 의병의 봉기와 수군의 활약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1592년선조 25 5월 3일 한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6월에는 평양성을 함락하며, 7월에는 함경도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전쟁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조선의 군사 제도와 방위 체제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에 군사의 징발은 병농일치제의 원리에 따랐지만, 군역을 군포로 대신 하는 군역의 포납화가 진행되면서 유사시 농민들을 동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방은 제승방략 체제로 편제되어 요충지에 군사를 모아 놓고 중앙의 장수가 내려와서 통솔하였는데, 방어선이 한 번 무너지면 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에서 곽재우·정인홍·김면, 전라도에서 고경명·김천일, 충청도에서 조헌, 황해도에서 이정암, 함경도에서 정문부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휴정·유정은 승병을 이끌었습니다. 의병 창의는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조선군의 사기를 고취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승리를 거두며 바다를 장악하여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였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평양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조선・명 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환점이 된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이 1593년 1월에 평양성을 기습하였다. 며칠간의 포위전으로 일본군은 식량과 병력부족으로 야간에 퇴각하였다. 이 전투 이후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개입, 조선군의 반격, 일본군의 퇴각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조 · 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군은 왼쪽 끝에 5명이 그려져 있다. 평양성 안에는 성을 점령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고를 받는 모습과 일본군들이 명군을 향해 조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두르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명군은 이여송, 양원, 장세작 등의 장수를 앞세우고 말을 타며 활기차게 나아가고 있다. 또한 화포부대를 이끌었다고 알려진 낙상지는 한 손에 화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일본군을 매달고 가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명 제독 마귀의 초상
정유재란 때 명에서 파견한 장수 마귀(1541~1612년_의 초상이다. 호피가 깔린 의자 위에 금관조복을 입고 훌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금관조복은 왕이 제사 지낼 때 백관이 입는 관복이다. 보통의 금관조복과는 달리 깃 주위나 단을 연속된 국화무늬로 채웠고 붉은 옷은 어깨에 걸쳐 있다. 붉은 선으로 우락부락하게 얼굴을 그렸고, 위로 향한 눈썹, 2개씩 있는 눈동자, 붉은 입술 등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청·흥·녹색 등 원색을 사용하고 관과 의자에는 금을 칠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명장의 모습을 무신도로 그려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상도 그러한 용도로 보인다. 마귀는 상곡 마씨麻氏의 시조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마귀의 증손 마순상의 검
중국 명에서 만들어진 마귀의 증손 마순상의 칼로 알려져 있다. 마순상은 1627년 명나라 등주의 군량을 감독하다가 배로 군량미를 조달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에 정착하여 살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명 병부상서 석성의 초상
유지에 그려진 초본으로 탕건을 쓴 모습이다. 화면 왼쪽에 병부상서 석성의 61세 모습이라고 쓰여 있다. 초본이지만 눈썹과 수염, 눈, 코, 입 주변의 주름을 자세히 그리고, 검버섯까지 표현하는 등 얼굴을 세밀하게 그렸다. 눈두덩이, 광대뼈, 입 주변은 어둡게, 돌출된 이마와 코는 밝게 처리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이에 비해 의복은 옷 주름 위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채색 또한 하지 않았다. 석성(1537~1599년)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조선 파병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옥사하였다. 그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주 석씨石氏의 시조가 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때 명과의 외교 문서를 엮은 책
임진왜란부터 광해꾼 즉위년1608까지 명과의 외교 문서를 모아 1619년광해군 11에 편찬한 책이다.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요청한 내용, 명이 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내용, 일본의 정세를 정탐하여 명에 알리는 문서, 매년 보낸 정기 사행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위란 때 한중일 삼국간의 외교적 정황을 살펴볼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명 장군 이녕이 조선의 권응수 장군에게 보낸 문서 1598년 9월 3일 명군 참장 이녕추후이 1597년 12월 울산 왜성을 공격할 당시 길을 인도한 일에 대해 권응수 장군에게 사실 여부를 밝혀서 보고하라는 문서이다. 조승훈이 울산 왜성 공격을 실패하고 돌아온 후 이녕에게 군영이 길을 잘못 인도하였다는 문서를 상주하였다. 그 후 이녕은 무고를 밝히고자 권응수에게 길을 인도했던 향도들을 빠짐없이 조사하라고 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때 명 장수들과 주고받은 글을 모은 첩
의병장 임환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 장수들과 주고받은 글을 모은 첩이다. 첩 안에는 이여송 등의 시를 비롯하여 명 장수들의 편지와 글 등이 있다. 의병장 임환은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의 종사관이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에서 의병장으로서 순천 왜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을 다시 침략하라는 도요토미의 정유재란 개전 명령서
1597년 2월 도요토미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면서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하달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일본군을 부대별로 배치하고, 조선에 쌓아놓은 왜성에 각 다이묘를 배치하라는 명령이 들어 있다. 또한 전라도를 남김없이 철저히 공략하라고 하였고 군사 행동이 끝난 후에는 거점성을 지을 장소를 논의할 것을 당부하며 기필코 명까지 공략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일본군이 절취한 조선인 코의 수량 보고서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 금구와 김제 지역에서 절취한 조선인의 코 3,369개에 대한 일본군의 증빙 보고서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 때 조선인을 죽이고 그 증거물로 코를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장수는 코가 상하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동아시아 대전으로의 확대, 그리고 강화 협상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자 조선은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명은 조선이 무너지면 요동은 물론 명 전체가 위험에 빠질까 염려하여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1593년 1월 총병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하였습니다. 하지만 명군은 개성을 함락한 뒤에 전진을 서두르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일격을 당하자 일본과의 강화 협상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조선·명·일본 모두 병력 손실과 군량 부족 등의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선조가 강력하게 반대하였지만 명은 일본과의 강화 협상을 진행하였습니다. 명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명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고, 조선의 4도를 일본에 넘겨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였습니다. 강화 협상이 지지부진하며 결말이 나지 않자, 1593년 6월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심유경은 명에 가짜 항복사절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명 조정은 이것을 그대로 믿고서 히데요시의 일본 국왕책봉을 승인하였습니다. 1595년 1월 책봉 사절단이 일본으로 출발하고 1596년 9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에게 명 황제의 임명장 등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 외에 원하는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격노하였습니다. 결국 4년여를 끌어 오던 강화 협상은 결렬되고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 후반부인 정유재란 때 벌어진 가장 격렬하고 비극적인 전투로 손꼽힌다. 1598년 1월, 조선과 명 연합군이 울산 왜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사건으로, 일본군이 극한의 식량난과 포위 속에서 버틴 처절한 전투로 기록된다.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극한 상황까지 몰렸다. 왜군은 증원군이 도착하여 방어에 성공하기는 했으나 심리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왜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1597년 12월 하순부터 1598년 1월 초까지 울산왜성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끈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군과 합류해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후퇴하고 울산왜성을 축조하였다. 명의 경리 양호는 명군 4만여 명을 이끌고 도원수 권율이 이끈 조선군 1만 명과 합세해 조령을 넘어 1597년 12월 23일 울산 왜성 포위공격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조·명연합군이 이기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이 지원을 받게 되고 큰비가 내리면서 점차 불리해졌고 이듬해 1월 4일 경주로 철수하였다. 명군은 사실상 패배한 전투를 이긴 것처럼 황제에게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양호를 해임하고 만세덕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울산 왜성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가토 기요마사가 보급과 지역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쌓았다. 그 해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거의 궤멸직전까지 몰렸으며 이때 왜군은 오줌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와와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을 이끌고 침략했던 왜장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중 한명이다. 성곽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뛰어났던 인물로 일본 3대 성곽으로 손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였으며, 조선의 읍성을 참조하여 구마모토에서도 읍성을 쌓기도 했다.

1597년 일본의 재침략(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습니다. 조선은 다시 명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원균이 그해 7월 거제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참패하면서 남해안 일대는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남원성·황석산성·전주성 등도 함락되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일본군이 장악하였습니다. 이때 다시 참전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명군의 반격으로 직산 전투 등에서 승리하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하여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이로써 북상이 좌절된 일본군은 경상도 울산에서부터 전라도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에 성을 쌓고 장기 주둔을 꾀하였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울산 왜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조·명 연합군은 육군을 전라도, 경상 좌도와 우도의 세 갈래로 나누고 해군의 수로를 더한 사로병진책을 계획하였습니다. 마침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음을 맞으면서 일본군이 퇴각을 준비하는 시기에 명군은 사로병진책에 따라 다시 울산 왜성을 공격하고, 동시에 사천 왜성과 순천 왜성을 공략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순천왜성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조·명 연합 수군이 노량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7년을 끌어온 긴 전쟁은 끝나고,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6세기 대항해 시대와 동아시아
15세기 말 유럽의 해양 세력들은 대양을 가로질러 신대륙과 아시아에 이르는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하였습니다. 바스쿠 다가마, 콜럼버스, 마젤란 등 탐험가들을 앞세운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는 한편, 인도를 거쳐 중국·일본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은 중국·일본과 무역을 하며 그곳에 불랑기포와 조총을 건네주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는 사림이 성장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사림의 주도로 서원과 향약이 만들어져 지방 사회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토지 집중과 수취 체제의 모순, 상업의 발달로 계급이 분화되고 농촌 사회가 동요하였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임꺽정의 난과 정여립의 모반 사건 등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중국 명나라는 북쪽의 몽골, 남쪽의 왜구로 말미암은 외환과 지방 세력 반란 등의 국내 문제가 겹쳐 재정 부족이 심각하였습니다. 만력제가 즉위한 뒤 장거정이 국방을 강화하고 개혁 정치를 펼쳐 국운이 다소 회복되었으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봉건 영주들이 할거하던 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서로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일본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진주박물관, 201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