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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경상우도, 조선 사림 세력의 산실

지리산 동쪽 남강 주변에 위치한 산청, 함양, 진주 일대는 낙동강 상류 안동 지역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들의 세거지로 선호되었으며, 양반문화가 발달된 곳이다. 영남사림을 이끌었던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정여창, 김일손 등을 배출하였으며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사림을 이끌었던 남명 조식이 그 학풍을 이어왔다. 실천적인 이지역의 학풍은 곽재우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많은 의병장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남명 조식은 벼슬에 진출하지 않고 산청지역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실천적인 이지역 특유의 유교학풍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사천 선진리 신라비는 사천 향도들이 세운 통일신라시대 비석이다. 경남 사천시 선진리성에서 발견되었는데 1/4 정도만 남아 있다.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가 제정하여 사용했던 무주신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사천 선진리 신라비, 통일신라>

사천 향도들이 세운 통일신라시대 비석
신라 제36대 혜공왕 대에는 귀족 간의 격렬한 대립으로 정치가 어지러웠다. 정치적인 혼란을 불교에 의지하여 극복하고자 승려와 지방관으로 구성된 향도가 이 비석을 제작하였다. 경상남도 사천시 선진리성에서 발견되었으며, 원래 크기의 1/4 정도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신라 비문 가운데 중국 당의 측천무후가 제정하여 일정 기간에만 사용했던 글자인 무주신자武周新字가 새겨진 유일한 비석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상도 삼가현 출신으로 명종과 선조 때 여러차례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주로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제자들로는 곽재우, 정인홍, 정구 등이 있으며 광해군 때 집권세력인 북인 정파를 형성했다.

<1 조식 신도비 탁본>

송시열이 조식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의 탁본
송시열이 조식의 일생을 기록한 신도비의 탁본이다. 제목은 이조판서 김성근이, 본문은 이조참판 김학수가 쓴 것으로 보아 비가 건립된 것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로 보인다. 조식의 신도비는 송시열 외에도 정인흥·조경·허목이 지은 신도비가 만들어졌다. 한 사람의 신도비를 조선시대 대학자 4명이 지은 예는 유례가 없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사회에서 조식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 비에서 송시열은 조식이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명예나 이익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아울러 이황과 같은 위상으로 평가하여 앞 시대의 큰 스승으로서 조식을 기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남명선생문집, 조선 후기><3 동계선생문집, 조선후기>

조식의 글을 모은 책
조식의 문집은 1604년 그의 수제자인 정인흥의 주도로 간행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1622년 정인흥이 중심이 되어 덕천서원에서 고쳐서 간행하였다.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흥이 인조반정으로 역적이 되자 이후 간행된 <남명집>에는 정인흥의 글이 삭제되어 발간되었다. 이처럼 <남명집>은 그의 학맥을 이은 북인의 정치적 성쇠에 따라 편찬에 굴곡을 겪은 책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정온의 글을 모은 책
1660년 정기수가 간행한 정온의 문집이다. 문집속에는 16~17세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기록한 작품이 많고, <남명학기류편> 발문에서 정인흥의 문인인 그가 남명학파의 학맥을 잇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양은 물론 거창 지역의 비중 있는 인물들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 상소문 등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거창 지역에서 정온의 활약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산청 덕천서원>
<4 진주향안, 조선, 1634년>

진주지역 유력 가문의 명부
임진왜란 직후 진주지역 유력 가문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향안이다. 여러 판본 가운데 진주지역 10개조의 규약인 향규를 유일하게 포함하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이 책에 등재된 인물 중에는 진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중에 포로로 잡혀가 동남아 등지에서 거금을 모았다는 조완벽이 기록되어 있다. 1617년에 처음 작성된 이후, 1712년까지 주기적으로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면서 향안이 새롭게 작성되었으며 그때마다 별도의 책자로 만들어져 보관되었다. 이 진주향안 역시 이러한 과정에 1634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5 선전관청계회도, 조선, 1783년>

선전관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
1783년에 선전관청의 관원들이 친목 도모를 위한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여 그린 것이다. 진주 출신 선전관인 한응검을 비롯하여 임율 ·조심태 · 오의상 등 모임에 참가한 22명의 관원들이 배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6 무관흉배, 조선 중기>

무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인 장식
조선 중기 무관인 박진영이 실제로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흉배이다. 사자의 머리와 등, 다리에 초록색 갈기와 붉은색 화염문이 묘사되었고, 주변으로 모란문과 구름문, 초화문 등이 자수로 묘사되었다. <경국대전>, <속대전>에 의하면 무관은 호표 또는 웅비 문양의 흉배를 착용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호표 흉배가 그려진 초상화와 출토 복식이 발견되었지만, 조선 중기에는 해치 또는 사자 흉배를 그린 초상화와 출토 복식이 전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흉배 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여럿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7 파초무늬 필통, 조선, 19세기><8 권응수가 사용했던 벼루, 조선 중기, 보물><9 백자연적, 조선>

조선시대 사림은 고려말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에 의해 조선시대 초기 영남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지리산 함양 일대에서 김일손, 정여창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고, 그들의 사상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에게 이어졌다.

<10 청계서원지, 1921년><11 남계서원지, 조선, 1875년>

청계서원에 관한 기록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청계서원에 관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1495년 건립된 청계정사에서 김일손이 한 때 수학하였고, 1915년 이 곳을 유림들이 복원하여 청계서원이라 불렀다. 이 책에는 서원의 내력과 김일손과 정여창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남계서원에 관한 기록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남계서원에 관한 기록을 모아 1875년에 편찬하였다. 남계서원은 정여창을 기리기 위해 1552년에 세워졌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2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간, 2023년)

<함양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12 신계서원 제기, 조선>

신계서원에서 제사에 사용한 그릇
1839년에 고려 후기의 공신 박익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그릇으로, 최근까지 매년 3월 신계서원에서 사용하였다. 제작 당시에는 모두 32점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술잔 6개, 술통 2개, 사각형 밥그릇 4개, 원형 밥그릇 2개, 촛대 2개, 향을 담는 그릇인 향합 1개 등 17점이 남아 있다.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으로 만들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3 기락편방, 조선후기>
<13 기락편방 목판, 조선후기>

조식의 제자 정구와 곽재우 등의 행적을 기록한 책과 그 목판
박상절이 18세기에 편집하여 엮은 책과 이를 찍기 위한 목판이다. 그는 1607년 정구 ·곽재우 · 장현광 등 35명이 함안의 용화산 아래에서 뱃놀이를 한 일과 1607년 김세렴 등 12명이 현풍의 풍영대에 모여서 시를 짓고 바위에 이름을 새겼던 일을 추모하고자 이 책을 간행하였다.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두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행적을 잘 기록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5 묘산도.지도 목판, 조선후기>

묘산도와 지도 목판
족보나 읍지 등의 책을 만들 때 앞부분에 들어가는 지도를 찍었던 판목이다. 세 점의 묘산도는 산소가 있는 장소를 그린 것이고, 두 점의 지도 목판은 경주 서악을 그린 것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6 활자, 활자 보관상자, 조선후기>

다양한 활자와 그것을 구분하여 보관하는 상자
활자를 배열하여 보관하는 상자이다. 보관 상자 21칸의 크기는 대체로 같으나 높이는 활자의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큰 활자는 상자를 여러 칸으로 구분지어칸살형 부수별로 분류하여 넣고, 가름 칸의 테두리는 해당 활자의 부수나 글자를 먹으로 쓰거나 종이에 써서 붙여 사용을 쉽게 하였다. 작은 활자가 보관된 상자는 네모 모양의 정간 형태로 층을 짓고 칸을 ‘X’자로 네 등분하여 활자를 한자의 부수별 혹은 기능별 연호·간지·슷자·관직명,·관용숙어로 배열하여 담아두고 활자집게로 집어내어 판짜기를 할 때 사용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7 통영소반, 조선, 19세기>

통영에서 만든 음식을 먹을 때 쓰는 작은 상
통영소반은 통제영 12공방 가운데 소목방에서 그 기능이 전승되었다. 황해도의 해주소반, 전라도의 나주소반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소반의 하나일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특히 통영소반은 나뭇결의 문양이 아름답고, 단순한 구조와 견고함이 우수하였다. 또한 제작이 편리하고 실용적이어서 현재까지도 통영반의 형태가 밥상의 전형으로 인식되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8 나전칠기이층농, 조선, 19세기 말 ~ 20세기 초>

나전장식과 옻칠을 한 이층 농
농은 옷이나 버선, 천 등을 보관하는 가구이다. 맨 아래 받침 다리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나 습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농은 마름모 모양을 연속해서 배치한 무늬 안에 십자형으로 자개를 박아 넣어 장식한 것이다. 기하학무늬를 촘촘히 박아 넣어 매우 정교하다. 자개는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해서 주로 안방가구나 여성용품에 장식으로 이용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 시대 사림 세력의 산실, 경상우도
조선은 성리학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대부 관료들에 의해 건국 되었습니다. 특히 15세기 후반 도덕성을 강조하고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여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몇 차례의 사화를 겪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림파는 큰 피해를 보았으나 서원과 향약을 통한 지역적인 기반 덕분에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서원에서는 성리학 이념 교육과 연구가 활발하였고, 지역마다 향약이 만들어져 성리학적 윤리가 확산되면서 사림은 향촌 질서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원은 지방의 사족들이 선현을 제사 지내고 성리학을 공부하며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림 세력의 산실인 경상도 지역에 서원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경상우도서부 경남에는 조선시대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남명 조식이 있었습니다. 조선 중기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조식은 학문적 수양과 실천에 투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남명학파’를 이루었습니다. 조식이 강조한 실천적인 학문은 정인홍·최영경·곽재우 등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은 임진왜란 때 서부 경남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923년 창립 당시 형평사를 조직한 취지를 담은 글, 1923년, 복제>
<2 강상호가 사용한 벼루.벼루집>
<3 형평사에서 발행한 잡지 <정진> 창간호, 1929년, 복제>
<4 보부상 신분증, 조선, 1884년><5 진주상무사에서 사용한 인장, 1880~1937년>

진주 상무사는 19세기 초반 진주 지역의 보부상단에 기원을 두고 있는 상인 조직이다. 진주상공회의소의 뿌리가 되는 이 조직은 근대 상인으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근대 민중 운동의 선도지, 진주
19세기 조선사회는 주요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정치기강이 해이해지고, 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지방에서도 관리들의 농간으로, 농민들의 경제적 고통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1862년 2월 18일 진주에서 유계춘 등이 부패한 관리에 대항하여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농민항쟁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896년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경상남도 관찰부의 소재지가 되면서, 진주는 행정의 중심지이자 사회문화적 변화를 이끄는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 1909년 <경남일보>의 창간입니다. 이 신문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최초의 지방신문으로 경남 사람들의 정치·경제·문화적 교양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사회·경제적 갈등이 심화되었던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1923년 4월 강상호 등이 백정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형평사를 설립하면서 형평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전국의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하여 백정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외에도 소년운동, 농민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진주박물관, 201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