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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임진왜란의 기록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조선, 왜, 명나라가 모두 참전했던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명나라는 전쟁에 소요된 많은 비용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으며, 일본도 많은 군사들이 동원되면서 경제적.군사적으로 많은 출혈이 있었다. 동북지방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아 큰 손실을 입지 않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을 재통일하고 에도시대를 열었다. 조선은 직접적인 전쟁의 당사자로 많은 국민들이 전쟁으로 사망하였으며, 사회적인 인프라나 제도 등이 무너지는 등 가장 극심한 손실을 입었다. 임진왜란 이후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으며 명의 참전에 따른 사대주의가 크게 부상하여 국가나 사회의 실질적인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고 국론이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삼국은 적극적인 대외교류를 지양하면서 쇄국적인 성향으로 흘렀으며, 이는 세계화되어 가던 당시의 국제질서에 반하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18~19세기 서양세력에 굴복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자료들, 임진록 등>
<7 회본태합기, 에도시대>

16세기 일본에서의 경험을 적은 포르투갈 신부 프로이스의 서간집
포르부갈 사람으로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 내에서 경험한 여러 일들을 기록한 글이다. 프로이스는 1563년부터 1597년까지 일본에서 살면서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전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프로이스가 일본에서 작성한 서간문들은 포르투갈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다시 로마와 유럽의 예수회 수도원으로 발송되었다. 이 책에는 임진왜란 등 프로이스가 직접 작성한 조선 관련 기록도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0

기록으로 남겨진 7년 전쟁
임진왜란은 16세기 동아시아 삼국 사이의 전쟁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는 역사 주제입니다. 전쟁은 우리를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과 관련한 일기·종군기·견문 담·체험기·보고서·문집·실기·소설 등 다양한 형식의 수많은 책들이 전해져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를 생생하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오희문의 <쇄미록>, 노인의 <금계일기> 등은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기록들입니다. 이 외에도 홍의 장군 곽재우의 <망우당집>, 명군의 파병을 성사시킨 이덕형의 <한음선생집>등의 문집과 실기가 있습니다. 특히 실기는 후손들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조상과 관련된 글을 모아 만든 것으로, 조상들의 공적을 드러내는 새로운 이야기들도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물들 덕분에 전쟁 영웅들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순신·권율 ·김시민·곽재우·논개 등은 각종 전설과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각 시대가 바라는 인간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중요한 전투로, 각각의 전투는 성격과 의미가 다르다. 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 아래 수성한 전투로,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군의 공세를 막아낸 대표적인 방어전이었다. 의병장 곽재우 등의 지원으로 관군과 의병이 연합해 싸운 상징적인 전투였다. 2차 진주성 전투는 1차 전투 패배에 대한 복수와 남부 지역 장악을 목적으로 일본군 대규모 병력(10만 이상)이 투입된 공격 이었다. 진주성은 함락됐지만 전쟁 전체의 흐름이 조선·명 연합군 쪽으로 넘어가던 시기라 전략적으로 큰 의미는 없는 소모전이었다.

<김시민 선무공신교서, 조선, 1604년, 보물, 복제품>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을 공신에 봉하는 문서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에게 내린 선무공신교2들이다. 김시민의 본관은 안동이고, 천안 출신이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로 임명되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37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 교서는 일제강점기 때 유출되었다가 2005년 경매시장 도록에 실려 그 존재가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 소식이 2006년 진주에 알려지자 ‘진주문화사랑모임’을 중심으로 국내 반입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MBC 프로그램’느낌표-위대한 문화유산’을 통해 국민모금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온 국민의 성원 속에 7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왔고 9월 22일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옮겨져서 지금에 이르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진주성도, 조선, 19세기>
<진주성 내성 주변>

진주성을 그린 그림
진경산수화풍으로 진주성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까지 18종의 <진주성도>가 알려져 있다. 이 진주성도는 수령 관아가 있는 곳과 성을 중심으로 옛날 시가지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회화식 지도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17세기 성여신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의 다양한 정보를 기록한 읍지, 진양지, 조선후기>
<진주성 출토품: 기와>
<진주성 출토품: 기와>

진주성에서 나온 기와
촉석루 앞 성벽의 시굴조사에서 발굴된 기와들이다. 이 시굴조사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진주시의 의뢰를 받아 2000년 11월 17일부터 2001년 2월 6일까지 시행하였다. 그 결과 금속류, 토기 및 도기류, 기와류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기와류에는 ‘보정賣正’, ‘홍치弘治’, ‘만력萬層’, ‘가경嘉慶’ 등 시대를 알 수 있는 여러 개의 연호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치계진주수성승첩장, 조선후기>

진주성의 승리를 임금에게 보고한 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초유사 김성일이 진주성 방어의 전말을 시간 순으로 적어 선조에게 보고한 글이다. 이 글은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김성일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최경회 간찰, 조선, 1592년, 복제품>

최경회가 의병과 관련된 일들을 적은 편지
최경회가 1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직후인 1592년 10월 20일에 쓴 편지이다. 일본군과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상도 의병장 김면과 전라좌도 의병장 임계영 등과 연합할 계획이 적혀있다. 또한 남의 가축을 약탈하여 죽이는 못된 짓을 일삼는 군인들을 처벌하고 다스릴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진주성도, 조선, 1846년>

진주성을 그린 그림
진주성과 주변의 산과 강, 마을 등을 단순화시킨 그림이다. 당시 성 안팎의 모습과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았다. 그림에 남문 누각이 2층, 신 ·구북문이 1층으로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에 ‘병오丙午’라고 기록되어 있다. 1780년대 후반까지 남문이 1층이었고 1894년에는 서문과 촉석문 외에 모두 2층으로 바뀐 것을 고려해 보면 이 그림의 병오는 1846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논개초상, 1955년, 진주성 의기사 기탁, 복제품>

김은호가 그린 논개초상
인물화가 김은호가 그린 논개의 초상이다. 김은호는 전통화를 배우다가 일본 유학기를 거쳐 일본 미인도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다수 제작했다. 특히 1939년에 그린 〈춘향상>은 당시 ‘열녀 춘향의 자태가 예술화’, ‘조선의 모나리자라고 할 만한 걸작’이라는 열띤 호평을 받았다. <논개상>은 이 <춘향상>을 모본으로 하여, 흡사하게 제작되었다. 이 두 미인도는 일본 미인도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정면을 응시하고 서있는 채용신의 <운낭자상>을 선례로 한다. <논개상>은 작가 김은호의 친일, 임진왜란 때 인물인 논개를 조선 말기~근대기의 짧은 저고리를 입은 모습으로 표현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각 시대에 따른 논개상을 보여주기 위해 김은호가 그린 논개 초상을 윤여환이 그린 것과 비교하여 전시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논개초상, 2007년, 진주성 의기사 기탁>

윤여환이 그린 논개초상
윤여환이 그린 논개의 초상으로 2007년에 표준 영정으로 지정받았다. 김은호의 <논개상>이 작가의 친일논란과 복식의 고증 논란으로 인해 다시 제작된 것이다. 이전의 <논개상>이 일제강점기 이후 열녀 초상의 교과서가 된 김은호의 <춘향상>을 토대로 그려졌던 것에 반해, 이 초상은 16세기 여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을 고증하여 제작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2차 진주성 전투: 승리의 환호, 그리고 의열의 상징
진주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로, 일본군이 곡창 지대인 호남으로 가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진주성에서는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차 전투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치러졌으며 조선 수성군守城軍 3,800명이 일본군 2만여 명을 맞아 승리하였습니다. 이는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체계적인 지휘 체제를 형성하였고 전라도의 최경회·임계영, 경상도의 곽재우·윤탁·최강 등 3~4천 명의 지원군이 후방에서 지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2차 전투는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은 1차 진주성전투의 참패를 만회하고자 10만의 대군과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공격하였습니다. 당시 조선군은 4~5천 명에 지나지 않았고 명군과 의병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진주성의 조선군을 지휘하던 김천일·최경회·황진 등은 죽음으로써 진주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지만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에서 왜군이 해전에서 승리를 하지 못했던 것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수군이 전략적으로 잘 대응했기도 했지만 함선의 규모나 화포, 운영능력에서 왜군에 비해서 조선수군이 우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의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신무기인 거북선, 함선에 장착된 다양한 화포들이 왜군에 비해 크게 우수했으며, 이런 연유로 조선수군이 붕괴된 이후 12척의 판옥선으로 100여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랑해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수군은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던 고려말.조선초 이후 적극적으로 전력을 개선해 왔으며, 임진왜란 직전 삼포왜란, 을묘왜란 등 여러차례 왜의 반란이 있었기때문에 적극적으로 왜구의 출몰에 대비해 왔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임진왜란에서 수군이 우세를 가져갈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군조련도, 조선, 19세기>

수군의 훈련 모습을 그린 그림
임진왜란 뒤 통영에서 행해진 경상 · 전라 · 충청 3도의 수군합동조련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에 펼쳐진 진형은 조선 후기 군사훈련 교범인 <병학통>에 나오는 삼도주사첩진도와 일치한다. 삼남 수군의 편제는 5영체계로, 각 영 밑에 5사를 두고, 각 사 밑에 5초관을 두었다. 이것은 지역별로 편대와 도별로 선단을 구성하여 명령이 있을 때는 지정된 해역으로 집결함과 동시에 기동선단을 형성할 수 있도록 사전에 임무와 위치가 결정되었다.

<판옥선, 조선, 16세기, 복제 1/10 축소 모형>

조선 수군의 주력 배, 판옥선
조선시대 수군이 주로 사용하던 군함이다. 배 안의 갑판과 상장 갑판의 2층 구조로 되어 판옥선이라고 불렀다. 아래층에는 노를 젓는 병사들이, 위층에는 전투 병사들이 있어 서로 방해받지 않았다. 배의 아랫부분이 편평한 평저선이고 흘수선이 낮아 배를 빨리 돌리는데 유리하였다. 또 상갑판이 높아 활을 쏘기에 유리하였고, 일본군이 접근하여도 쉽게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런 구조는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귀선, 조선, 16세기, 복제 1/10 축소모형>

조선 수군의 돌격선, 거북선
기본 구조는 판옥선과 같으며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용머리, 꼬리, 좌우에서 모두 화포를 쏠 수 있었다. 판옥선의 상체를 개량하여 거북등처럼 생긴 덮개를 덮고 그 위에 송곳을 꽃아 적병이 뛰어 오르는 것을 막았다. 거북선은 사천해전에 처음 등장하였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어 완전무장한 형태로 적진 깊숙이 돌격하였다. 이런 거북선을 일본군은 장님배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안택선, 일본, 16세기, 복제 1/30 축소 모형>

일본 수군이 사용한 크기가 가장 큰 배, 아타케부네
일본 수군이 사용한 가장 크고 대표적인 배이다. 갑판 위에 집모양의 누각을 설치하여 안택선이라고 불렀다. 일정한 규격이 있지 않고 만든 지역의 제작 방식에 따라 크기와 구조에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판옥선과 비슷하거나 작았다. 속도를 내기 위해 비교적 가벼운 삼나무로 만들어 충격에 약했다. 선체가 약해 대포를 오직 뱃머리에 1대만 설치할 수 있었고, 상대방 배에 빠르게 접근하여 군사를 투입시키는 전술에 유리한 배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관선, 일본, 16세기, 복제 1/30축소 모형>

일본 수군의 주력 배, 세키부네
아타케부네보다 작은 크기로 전국시대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군선이다. 아타케부네의 구조를 기초로 만들었으며, 크기가 작고 길며 뾰족한 형태이다. 배 아래가 뾰족한 첨저선으로 속도에 중점을 두고 설계되어 크기에 비해 노를 많이 설치하였다. 빠른 속력으로 상대의 배에 접근해 조총과 검 등으로 제압하였다. 17세기 초에 구조와 제작 방식 등이 표준화되어 에도시대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이순신 장검 (국보)은 길이 2m에 달하는 큰 칼 2점으로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다. 이순신 장군이 1594년 한산도 수군 통제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두명의 도검 장인을 시켜 만든 장검이다. 실제 상용한 것이 아니고, 늘 벽머리에 걸아 두고 바라보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용도였다. 조선의 전통적인 도검양식을 따르면서도 당시 발달했던 일본 도검 요소가 적용되었다. 슴베에 제작내력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칼날 위쪽부분에 지은 시구는 <이충무공전서>(1795년) 내용과 일치한다.

<이순신 장검, 복제품(원품 조선, 1594년, 보물, 현충사관리사무소)>

이순신 장군의 긴 칼
충청남도 아산 이순신 종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왔던 두 점의 칼로 현재는 현충사에 있다. 충무공 이순신을 상징하며 길이가 2m, 무게가 5kg에 달한다. 직접 사용한 흔적이 없어 실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칼자루 속 슴베에는 1594년(선조 27)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곡성현감에게 보낸 문서로 가장 잘 알려진 이 문서는 현존하는 이순신의 친필 문서 중 하나이다.

<전라좌수사 관문, 조선, 1592년, 복제품>

이순신이 곡성현감에게 보낸 문서
이순신이 1592년 11월 6일 곡성현감에게 협조를 당부하는 공문서이다. 당항포와 연이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 군사를 시상한다는 조정의 방침을 알리고 있다. 군공을 세운 정운, 신호행 . 향리 여여충 등에게 특별히 논상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이충무공 전서, 조선, 1795년>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충무공의 글을 모은 책
1795년정조 19에 왕명으로 이순신의 글과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여 유득공이 교정을 보고 윤행임이 편집 책임을 맡아 간행하였다. 정조는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순신과 송시열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충무공전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이순신이 쓴 시와 산문, 난중일기, 이순신에 대한 비문, 제문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또한 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 방어책을 건의한 것, 옥포해전 등 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 유황과 화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 조선인 포로와 일본인 포로의 정황을 보고한 것 등과 함께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후 왕에게 보고한 장계도 있다. 특히 이 전서에는 거북선 그림과 크기가 실려 있어 거북선 연구와 이순신 및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불패의 신화 이순신과 수군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훈련하고, 군사 시설을 보수하며, 거북선을 만들고 군비를 확충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사천 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 해전 등에서 연이어 승리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지켜내자 바다를 거쳐 전라도를 공략하고 한성까지 보급로를 연결하려던 일본 측의 전략은 좌절되었습니다. 이순신은 공을 인정받아 1593년선조 26 8월 충청·경상·전라를 아우르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모략과 음모 등으로 이순신은 파직되었습니다.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습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적선 133척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1598년 선조 31 11월 물러가는 일본군과의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총탄을 맞고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진왜란 이후의 논공행상은 조선 정부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공적을 평가하여 상을 내리는 제도로, 전후 사회를 안정시키고 공정한 질서를 세우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절차였다. 선조를 호위했던 호성공신이 업적에 비해 많은 보상을 받은데 비해 실전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의병들의 공로는 과소 평가되었다. 특히, 칠전량 패전으로 조선군에 큰 피해를 입혔던 원균도 상당히 높은 보상을 받았다. 이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여 정치 갈등과 사회적 불만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병자호란 때 의병 등의 활약이 부족했고 국왕을 호위하는 관리들이 남한산성에 과도하게 몰렸던 원인이기도 하다.

박진 위성공신교서, 조선, 1613년

임진왜란 때 세자를 호종한 박진에게 내린 정공신 문서
임진왜란 때 세자(후에 광해군)를 모시고 간 박진에게 내린 위성공신교서이다. 박진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전투에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성을 함락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경상좌도 및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인 1613년에는 위성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류근 호성공신교서, 조선, 1604년, 복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류근에게 내린 정공신 문서
의주까지 임금을 모시고 간 류근을 1604년에 호성공신 2등에 책록하는 교서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는 경성안무사로서 한양의 민심의 수습하고, 정유재란 때는 운향검찰사로 명에서 들어오는 군량미 수송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권응수 선무공신교서, 조선, 1604년, 보물>

임진왜란 때 무공을 떨친 권응수에게 내린 정 공신 문서
의병장 권응수를 1604년에 선무공신 2등에 책록하는 교서이다. 권응수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함락된 영천성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조선, 1617년, 복제(원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의 효자·충신·열녀의 행실을 글과 그림으로 설명한 책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의 효자 · 충신 · 열녀 1,000여 명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실은 책이다. 한문과 한글 해석을 함께 넣었다. 조선전기에 펴낸 중국인 행적 중심의 <삼강행실도>와는 달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조선 사람이 주인공이 되었고 계급과 성별의 차이 없이 행실이 뛰어난 많은 사람을 포함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약묵 위성원종공신녹권, 조선, 1614년>

조약묵 위성원종공신녹권
1614년에 조약묵에게 내린 공신 녹권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임진왜란 때 세자였던 자신을 호위하여 의주까지 갔던 사람 가운데 공이 컸던 80명은 정공신으로 봉하고, 그 외 2,463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봉하였다. 정공신에 비해 원종공신은 그 규모가 매우 커서 단순히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정치적인 역학 관계 등이 작용하여 거대 규모로 원종공신을 봉한 것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는 방편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허희만 선무원종공신녹권, 조선, 1605년>

허희만 선무원종공신녹권
1605년에 허희만에게 내리는 공신 녹권이다. 조선시대 공신은 정공신과 원종공신이 있었다.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로, 정공신에게는 교서를, 원종공신에게는 녹권을 내려주었다. 임진왜란 때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무공을 세운 공신 18명에게는 선무공신을, 그 외 9,060명에게는 선무원종공신을 내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태평회맹도, 조선, 1604년 이후, 보물, 복제품>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신하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모임의 그림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 중에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공헌한 선무공신, 임금을 호위하는데 애를 쓴 호성공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공신 등이 모여 회맹 의식을 하는 그림이다. 4폭의 병풍에는 회맹 의식의 모습과 참석한 공신 63명의 직함·성명·자·생년·본관이 적혀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임란공신후손포상건의서, 조선, 1813년>

임진왜란 공신의 후손 장성한에 대한 포상을 건의하는 문서
1813년 2월 순천의 조광국 등 87명이 연명하여 죽산부사를 지낸 장성한의 포상을 건의하는 글이다. 장성한은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의공 장윤의 증손이다. 공신의 후손이자 충 ·효가 돈독한 청백리로 칭송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포상 및 추숭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7년 전쟁의 기억과 추모, 논공행상
국왕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선정하였습니다. 1604년 선조 37 4월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신할 때 자신을 따르던 신하 86명에게 호성공신의 칭호를, 왜적을 물리치거나 명에 지원을 요청하는 데 공을 세운 18명에게는 선무공신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아울러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년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은 청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4월 정공신의 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임금의 피신을 도운 2,475명에게 호성원종공신을, 무공을 세운 9,060명에게 선무원종공신을 추가로 녹훈하였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임진왜란 때 자신을 따르던 신하 80명에게 1613년 3월 위성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이듬해 4월에 그보다 공이 적은 2,463명을 위성원종 공신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며 죽어간 사람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관우도, 조선 후기>

충의와 무용의 상징인 관우를 그린 그림
화면의 가운데에는 관우를, 그 오른쪽에는 주창, 왼쪽에는 관평을 그린 그림이다. 관우가 신으로 모셔지는 과정에서 관평과 주창은 관우를 좌우에서 호위하는 부신으로 관우와 함께 그려졌다. 관평은 관우의 아들로 알려졌다. 관우는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또한 고향인 산시성의 상인들은 그를 재물신으로 모셨다. 관우 승배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군에 의해 조선에 전해졌고 명 장수들의 요구로 조선 여러 곳에 관왕묘가 세워졌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관성제군성적도지, 조선, 1876년>

관우의 일생을 그림과 함께 해설한 책
관우의 일생을 미화, 윤색하여 해설한 것으로 관제 신앙의 경전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삼국지연의>가 조선에 들어오고, 특히 관우가 조선을 도와 임진왜란에서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지면서 관우는 조선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병을 다스리고 복을 내리는 민간 신앙의 신이 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퇴계선생문집, 조선후기>

일본 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퇴계선생문집
퇴계 이황이 평생 동안 저술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퇴계는 영남학파의 종장이며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그의 사상적 깊이와 방대함이 이 문집에 모두 담겨 있다. 그의 문집은 에도시대에 일본 활자로 다시 간행되어 일본 근세 유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박안기.임라산 교류시문, 조선, 1643년>

조선의 박안기와 일본의 하야시 라잔이 주고받은 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류를 살필 수 있는 글이다. 박안기는 천문학자로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일본에 칠정산을 전해주고 역법을 가르쳐 일본이 처음으로 역법을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일본 최고의 유학자인 하야시 라잔이 그를 초청할 정도로 일본에 알려졌다. 그와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을 하야시 라잔의 아들이 1643년 하나로 묶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이마리 자기, 에도시대, 17세기>

조선 장인의 자취가 담긴 일본 장식백자
일본 규슈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이다.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들이 마을을 이루고 산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사기장들은 발전된 기술로 17세기 중반 색회자기를 개발하였다. 색회자기란 화려한 색으로 그림을 그려 구운 장식백자를 말한다. 이마리 자기는 1651년부터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문화 전파와 교류
7년의 전쟁 동안 일본군은 수십만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장인과 유학자, 그들이 빼앗아간 서적, 활자, 문화재 등은일본의 근세 문화가 시작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특히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장수들이 조선에서 잡아간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 정착하여 일본의 도예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규슈의 아리타가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활동한 이삼평은 일본 자기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리타의 도자기 사업은 발전을 거듭하여 1651년에는 일본의 아리타 자기가 유럽에 수출되고 18세기 영·정조 대에는 오히려 조선으로 역수입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으로 끌려간 학자 강항은 일본의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유하며 그에게 조선의 주자학을 전해 주었습니다. 한편, 명군이 참전하여 오랜 기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에는 명의 영향을 받은것들이 생겨났습니다. 1598년 4월 명군 경리 양호의 권유로 남대문 근처에 관우를 모시는 남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명군이 주둔했던 성주·안동·남원 등지에도 관왕묘가, 동대문 근처에는 동관왕묘가 세워졌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홍호연 초상, 에도 중기, 복제(원품 일본사가현현립나고야성박물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홍호연의 초상
서예에 능했던 흥호연을 상징하는 커다란 붓과 그의 만년의 모습을 린 초상화이다. 홍호연은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을 공격하던 일본군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포로가 되어 12세에 본 사가현으로 가게 되었다. 나오시게와 그의 아들 가츠시게의 측근이자 친구가 되었다. 독특한 글씨체로 사가현 지역에서 이름이 높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포로쇄환유고문, 조선, 1617년>

포로로 간 조선인들에게 조선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는 문서
예조에서 발급하여 임진왜란 이후 1617년 제2차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때 전달한 문서이다. 제1차 통신사 방문 때 귀국하였던 사람들의 처우와 특전 등에 대해 알리며 조선인 포로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제2차 통신사는 321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분충서난록, 조선후기>

사명대사의 글과 보고서, 그를 추모하는 글을 모은 책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유정이 쓴 글과 그를 추모하는 글, 그의 위패를 모신 밀양 표충사 관련 글 등을 모은 책이다. 특히 적진을 정탐한 보고서,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한 내용을 적은 글, 왜승에게 보낸 편지 등 사명대사가 직접 쓴 글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활약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모하당실기, 조선후기>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김충선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김충선의 공적을 드러내기 위해 후손들이 그와 관련된 글을 모은 책이다. 그는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하다가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서 조선으로 출정한 후 곧 귀화를 하게 된다. 일본에서 그는 화약제조 전문가로 조총을 만드는 기술자였다. 귀화 후 40년 넘게 전쟁터에서 많은 공적을 쌓아 선조는 그에게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천조장사전별도, 조선, 복제(원품 한국국학진흥원)>

귀국하는 명군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그림
정유재란이 끝난 뒤 귀국하는 명군을 환송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풍산 김씨 문중에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그린 <세전서화첩>에 실린 것이다. 그림의 왼쪽 아래 부분에 머리와 얼굴색이 다른 병사들이 수레를 타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조선왕조실록>에 “노란 눈동자, 검은 얼굴빛에 턱수염과 곱슬머리는 검은양털처럼 짧게 꼬부라져 있다”는 ‘해귀’를 묘사한 글과 유사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재조번방지, 조선후기>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으로 나라를 재건한 사실을 기록한 책
신경이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재건하게 해준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주로 임진왜란 7년간을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1577년부터 1607년까지 조선과 명 · 일본과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강화교섭 기간의 삼국간의 복잡한 사실 등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양지, 조선후기>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 신종을 모신 사당인 만동묘에 대한 기록
화양지는 층청북도 괴산의 화양동, 화양서원, 만동묘 그리고 송시열에 대한 기록 등을 함께 엮은 책이다. 만동묘는 명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세워졌다. 이 책은 송시열이 지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와 존명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인래빙기, 도쿠가와시대, 18세기 모사(원품 쿄토시역사자료관)>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에 대한 기록
와타나베 젠유에몬 모리아리라는 번사가 통신사 접대 준비와 방문 상황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는 통신사가 처음 상륙하는 곳인 요도번에서 통신사의 접대 업무를 맡았다. 이 그림은 와타나베가 그린 원본의 모사본이다. 기록에는 통신사 일행의 풍속, 의상, 기물, 조선 관련 정보 등이 있다. 이 때 파견된 조선 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10번째로,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쇼군에 취임한 뒤 1748년 축하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한인희마도, 에도시대, 18세기, 모사(원품 일본 교토시역사자료관)>
<1, 2번째>
<3번째 말 위에 서서 타는 마상립, 4번째 말의 옆으로 몸을 기울이는 좌우칠보,>
<5번째 말 위에 거꾸로 서는 마상도립, 6번째 말 위에서 옆으로 눕는 마상앙와, >
<7번재 등자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숨기는 등리장신, 8번째 상체를 후방으로 뒤집는 마상도타>

조선 통신사 일행이 말 위에서 무예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조선인래빙기>를 그린 와타나베가 조선 통신사가 일본의 쇼군 앞에서 행한 마상재를 그린 그림이다. 마상재는 1636년 통신사 파견 때 처음 실시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사였다. 7종의 곡예로, 말 위에 서서 타는 마상립, 말의 옆으로 몸을 기울이는 좌우칠보, 말 위에 거꾸로 서는 마상도립, 말 위에서 옆으로 눕는 마상앙와, 등자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숨기는 등리장신, 상체를 후방으로 뒤집는 마상도타, 말 두 마리 사이에 타는 쌍기마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동래부사접왜사도, 조선, 19세기>
<1 동래읍성><2 2폭~7폭: 동래읍성에서 초량객사로 가는 동래부사의 행렬><3 가마를 탄 동래부사>
<4 관기官妓 행렬><5 악공 행렬>
<6 초량객사에서 일본 사신들이 조선 국왕을 대신하는 전패에 절하는 의식><7 연향대청에서 일본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습><8 초량왜관 모습>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동래부사가 초량 왜관에 온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정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에 진경산수화풍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는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동래성을 떠나 초량의 왜관으로 향하는 모습, 초량객사에서 일본 사신이 절하는 장면, 연향대청에서 연회를 하는 광경 등이 시간 순으로 펼쳐져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후기 공식적인 대일 외교창구이자 무역거래소 역할을 했던 왜관은 처음에는 약1만평 규모의 두모포왜관이 설치되었는데 좁고 항구로서 기능이 부적합하여 현재의 용두산공원 일대에 초량왜관이 설치되었다. 왜관에는 쓰시마출이신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업무에 종사했으며, 또한 공식 외교사절들이 머물수 있는 숙박장소와 조선국왕에 예를 올리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객사가 설치되었다.

<초량왜관도, 조선, 1783년, 복제품>

부산 초량에 있었던 왜관의 전경을 그린 그림
동래부 소속의 화원인 변박이1783년에 그린 초량 왜관의 모습니다. 왜관은 조선시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만든 곳으로 두 나라의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였다. 초량왜관은 크게 무역이 이루어지던 동관과 일본 사신들이 머물던 서관으로 나뉜다. 이전 왜관이었던 두모포는 부지가 좁고 배를 정박하기 적합하지 않아 초량으로 옮기게 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양금신보,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전의 거문고 곡을 모아서 편찬한 악보
비파로 이름을 떨치던 악사 양덕수가 1610년에 편집하여 내놓은 거문고 악보의 필사본이다. 총30장 1책이다. 양덕수는 임진왜란 때 남원으로 피난을 갔다가 임실현감 김두남의 요청으로 이 악보를 펴내게 되었다. 양덕수의 성을 따서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양금신보>는 가곡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고 임란 이후 거문고의 전통을 후대에 전승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동의보감, 조선, 1814년>

허준이 펴낸 의학서
1814년 내의원에서 교정한 동의보감 원고를 전라감영에서 간행한 본이다. 허준 등이 선조의 명을 받아 1610년에 편찬한 의학 서적으로, 그 이전까지 편찬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기록한 한의학의 백과전서이다. 임진왜란 때 피폐해진 사회를 복구하고자 ‘예방 의학’과 ‘공공 의료’의 관점에서 이 책의 편찬을 명령한 조선 정부의 이상이 담겨 있다. 편찬 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일본에 파견된 대규모 사절단이라 할 수 있는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는 250여년간의 기간 동안 12회에 걸쳐서 파견된 사절이라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는 대체로 일본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는데 에도막부의 새로운 쇼군이 취임할 때 축하사절로서 쇼군의 권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일본 내부에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는 약 500여명의 인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접대하고 호위하기 위해서 일본내에서 많은 인원과 배들이 동원되었으며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 또한 막대하였다고 한다. 이런 경비들은 지방 다이묘들이 조달하여 집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다이묘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에도막부의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통신사 일행이 지나가던 지역이었던 큐슈지방 부근 사람들이 막부에 반감이 많았고 이들이 막부를 뒤엎은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기때문에 이후 일제감정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반한감정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곳 지역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입강호성도, 조선 17세기, 복제품>

의장대는 각종 깃발이나 권위의 상징물을 들고 예포나 신호포를 발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清道(청도,행군 때 맨 앞에서 길을 깨끗이 하거나, 앞 길을 인도할 때 사용한 깃발), 纛(둑, 임금이 타고 가던 가마 또는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던 대장기. 소의 꼬리 또는 꿩의 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 形名(형명,행렬의 앉고 서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등의 동작을 지휘 명령하던 깃발), 月刀(월도),長鎗(장창),三枝鎗(삼지창) 등을 볼 수 있다.

<의장대>

악대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로 구성, 마상재는 기마술이 능하고, 말 위에서 각종 재주를 펼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유형인데 일종의 문화교류를 위한 공연단으로 사행에 참여했다. 악대는 錚(쟁: 징), 喇叭(나팔), 螺角(나각), 太平嘯(태평소), 銅鼓(동고: 북), 鼓(고), 馬上才(마상재), 杖鼓(장고), 瑟(슬), 琴(해금), 笛(적), 典樂(전악)을 볼 수 있다.

<악대>
<악대>

행렬 중심에는 핵심인물 삼사(三使) 조선 통신사를 이끄는 우두머리 정사 1명, 부사 1명, 종사관 1명를 볼 수 있다. 正使(정사)는 사신의 우두머리, 副使(부사) 정사를 보좌하는 관리, 從事官(종사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는 관리, 國書(국서) 조선의 국왕이 일본 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글, 印信(인신)과 주요 무장 행렬을 볼 수 있다.

<삼사 호위행렬>
<호위 행렬>
<국서와 인신(도장) 행렬>
<정사, 자제군관, 역관, 소통사>
<부사, 자제군관, 역관, 소통사>
<종사관, 자제군관, 역관, 소통사>

수행단으로는 子弟軍官(자제군관, 사신의 아들이나 제자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간 것), 別破陣(별파군, 주로 화포를 다루던 무관 잡직), 製述官(제술관, 외교 문서를 전담하여 작성하는 글 재주가 좋은 관리), 寫字官(사자관, 문서의 글씨를 단정하게 쓰는 관리), 畵員(화원), 首譯(수역), 譯官(역관), 書記(서기), 良醫(양의), 醫員(의원) 등이 있었다.

<수행단>
<수행단>

조선 통신사가 에도성에 들어가는 행렬 그림
1636년 통신사 일행이 일본의 에도성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이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07년 ‘회답 겸 쇄환사’가 파견되면서 재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4번째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정사 임광, 부사 김세렴 등 총 인원 475명이었다. 일본의 태평함을 축하하고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맨 앞에 ‘한국사신입황성행진도’란 제목과 뒷 부분에 있는 배관기는 일제 강점기 때 쓴 것이다. 배관기에는 사이토 마고토, 김윤식, 이완용 등이 이 그림을 보고 느낌을 적은 시와 글이 있다. 이들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것을 합리화하고자 300여 년 전의 통신사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우호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동아시아와 조선 사회의 재편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은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여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고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결국 명은 밖으로는 만주족인 후금이 급성장하고 안으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1644년 망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열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전쟁 후 일본은 조선인의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1604년 조선은 사명대사 유정을 파견하여 일본의 사정을 살폈으며, 1607년 회답 겸 쇄환사를 견하였습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수장의 권위와 정통성을 과시하려는 도쿠가와 막부의 해에도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도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어책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한편, 명·청 교체기에 명은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를 내세워 금과의 전쟁에 파병을 요청하는 등 조선을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여 년 만에 조선은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치러야 했습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진주박물관, 2013년/2024년
  2.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