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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특별전] 화력 조선

16세기 동아시아에도 해상교역이 확산되며 은, 도자기, 향신료, 신병기 등이 거래되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조총과 불랑기포는 조선에 위협이 되었지만, 조선은 이를 도입·개량하고 자체 무기도 개발했다. 그에 따라 전술과 군사체제가 발전하고, 국방 강화는 왕권 강화와 상공업·광업 활성화로 이어졌다. 국립진주박물관은 특별전 <화력조선Ⅱ>를 통해 조선후기 화약무기 발전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화력조선, 두번째 이야기>

16세기 ~ 17세기에는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대륙(특히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에서 막대한 양의 은을 채굴하여 유럽 및 아시아로 수출하였다. 그 은은 중국 명나라, 일본, 인도 등으로 흘러들어가며 국제 무역의 매개체 역할했다. 특히 명나라가 은으로만 세금을 납부하게 하면서 은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다. 이에 따라 유럽의 은이 동아시아로 대량 유입되었다.

<포토시, 은화, 스페인 제국, 1665년>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포토시(현 볼리비아)에서 제작한 8레알 은화이다. 주출된 내용으로 보아 166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은의 순도는 92%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대항해시대 주요 거래 품목>
<중국 청화백자>
<은화>

은의 바다
대항해시대 무역에 가장 널리 쓰인 화폐는 스페인 제국의 은화였다. 중남미의 식민지에서 만든 ‘스페인 은화’는 중동 이슬람권으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그야말로 당시 세계는 ‘은의 바다’였다. 중국은 은의 수요가 높았다. 명나라가 은을 화폐제도의 근간으로 삼은 이후, 18세기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절반 이상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스페인, 포르투갈, 일본은 중국에 은을 공급한 대가로 징더전 청화백자와 찻잎, 비단을 얻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당포전양승첩도, 조선, 1604년, 국립광주박물관, 복제품>

당포 앞바다에서 일본 무장 선박을 나포한 일을 기록한 그림
1604년(선조 37) 통영 당포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 무장 상선을 나포한 전투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에 있는 서양식 범선이 일본 무장 상선이다. 이러한 상선을 일본에서는 슈인선이라고 불렀다. 슈인선은 에도막부의 교역 허가증인 슈인장을 가진 상인들이 사용한 배로, 상인들은 슈인선을 타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장거리 교역을 했다. 그림에 그려진 슈인선은 단순한 무역선이 아니었다. 선원들을 심문한 결과, 이 배는 캄보디아(당시의 크메르 왕국)와 수교를 맺기 위한 목적으로 보내진 것이었고 복귀하는 도중 나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그림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해양교역을 보여주는 동시에, 임진왜란 직후 조선 수군의 방어 역량을 보여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1 동방여행기, 이탈리아, 1701년>

카를레티가 쓴 세계 일주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1573~1636)가 쓴 여행기이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노예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월봉해상록, 조선, 1846년,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정희득의 일기
1597년 피난 중에 일본에 끌려간 정희득이 1599년 조선에 귀국할 때까지 겪었던 일을 적은 일기이다. 일지와 함께 심정을 표현한 시가 실려있다.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과 쓰시마에서 조선인 포로를 만난 이야기가 실려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3 일본연례서간문집, 이탈리아, 20세기>

프로이스의 글을 모은 책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에서 경험한 여러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프로이스는 1563년부터 1597년까지 일본에 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모든 과징을 직접 보있다. 프로이스가 작성한 편지는 포르투갈로 보내졌고, 다시 예수희 수도원으로 발송되있다. 1596년 12월 3일의 기록에는 나가사키에 조선인 포로 1,3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동아시아의 노예무역
15세기 후반, 센고쿠시대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노예무역 규모는 폭발적으로 커졌다. 다이묘들은 납, 초석, 조총 등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노예를 팔았다. 이는 일본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왜구와 일본군에 붙잡힌 조선인과 중국인도 노예로 팔려나갔다. 대표적인 노예무역항이었던 나가사키에서는 노예로 팔 조선인이 넘쳐나 인신매매집단의 수익성이 떨어질 정도였다. 이러한 동아시아 노예무역은 17세기까지도 이어졌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6세기 중엽부터 일본, 중국, 조선 등지에서 조총 빠르게 확산되며 전쟁 방식, 병기 체계, 정치 권력 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이 다네가시마에 표류하며 일본에 조총이 전래되었으며,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도 일본군과의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체 생산하게 되었다. 조총과 함께 중국을 통해 전래된 불랑기포와 홍이포 등도 동아시아 정치, 군사, 사회 체제에 큰 변화를 촉진했다.

<1 오오즈츠, 일본, 에도시대 18세기>

일본 에도시대에 사용한 큰 조총
일본 에도시대에 사용한 조총이다. 일반적인 조총보다 크기와 위력이 커, 성을 공략하는 데도 사용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뎃포, 일본, 에도시대 18세기>

타네가섬에 온 조총
1543년 8월 25일 일본 타네가섬에 한 척의 배가 입항했다. 선원이 가지고 있던 아쿼버스를 타네가섬 도주의 아들인 타네가시마 도키타카가 구입하면서 일본에 아쿼버스가 도입되었다. 아쿼버스는 일본에서는 ‘종자도총’, ‘남만총’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주로 ‘텟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타네가섬에 들어온 ‘텟포’는 크기가 작아 위력이 약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점화(순발식) 되었으므로, 흔들림이 적고 힘이 적게 들어 정확하게 적을 맞출 수 있었다. 이제 텟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무기가 되었다. 나가시노전투(1575)와 탄금대 전투(1592) 등 결정적인 전투에서 큰 위력을 드러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총, 화승식(순발식)>
<조총, 화승식(완발식)>
<조총, 수석식>
<조총, 뇌관식>

유럽에서 아쿼버스라 부르는 전장식 화승총 . 머스킷보다 크기가 작고 위력이 낮음. 15세기경 유럽과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 등장. 철로 만들어 값이 싸고, 방아쇠가 있어 조준사격과 일제사격전술 가능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전장식 총기란?
총알을 총구로 장전하는 총을 전장식 총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전장식 총은 화승식 -> 치륜식 -> 수석식 -> 뇌관식으로 발전해 갔다. 조총은 화승식 총으로, 방아쇠를 당기면 불이 붙은 화승이 화약접시에 닿아 점화하는 원리다. 치륜식은 톱니바퀴를 이용해 오늘날의 라이터와 같은 점화방식을 취했다. 수석식은 부싯돌의 마찰로 불꽃을 일으켜 점화하는 방식이었고, 뇌관식은 폭발물질인 뇌홍을 담은 뇌관으로 점화하는 방식이다. 전장식 총기는 발전할수록 점화 시에 필요한 동작이 줄어들었고, 날씨의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연속 발사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극복할 수 없었다. 전장식총기는 19세기 중반 이후 연속 발사가 가능한 후미장전식 총기에 밀려 사라진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유럽의 대형대포를 모방한 화포, 홍이포, 복제품(원본 고려대학교박물관)>

유럽의 컬버린급 대포에 해당함. 컬버린은 16세기 후반 유럽에서 등장. 포신이 곧고 길어 기존 대형화기보다 사정거리가 길었음. 이동이 가능한 포가와 결합해 야전과 해전에서 운용(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불랑기포, 재현품>

후미장전식 선회포로, 포르투갈에서는 베르초라고 불렀음. 명과 조선에서는 서양에서 온 화포라는 뜻으로 불랑기포라 부름. 14세기경 유럽에서 등장. 장전된 여러 자포를 모포에 갈아 끼워 운용. 크기가 작아 위력은 약했으나 조준이 자유롭고 사격이 빨라 성벽이나 배 위에 설치하여 사용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선회포, 동남아시아, 15~19세기, 육군박물관>

동남아시아에서 사용한 선회포
포이와 정철 덕분에, 상하좌우로 가동할 수 있는 화기이다. 15세기에 유럽에서 등장했으며, 배 위나 성 위에 설치하여 사용했다. 이 청동선회포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선회포는 렌타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동남아시아는 이슬람과 중국의 영향으로 이른 시기부터 화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에는 유럽 세력의 등장으로 유럽제 무기도 빠르게 유입되었다. 렌타카는 한 발의 탄환이나, 다량의 작은 탄환을 쏠 수 있었으며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쓰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약의 바다
대항해시대의 주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아쿼버스와 선회포, 컬버린 등 다양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무기들은 동아시아로 넘어오면서 각각 ‘조총’ ‘불랑기’, ‘홍이포’로 불리며 19세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유럽인의 무기와 화약, 그리고 제조법은 일종의 상품으로 교역의 대상이 되었다. 명나라는 마카오에 근거지를 둔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불랑기포와 홍이포를 받아들이고, 왜구로부터 조총을 입수했다. 일본은 1543년에 타네가 섬에 온 포르투갈인으로부터 텟포를 구매하고 제작법을 습득했다.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은 은광을 개발하고 전쟁포로 및 민간인을 팔아 유럽인과 왜구로 부터 화약병기를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대항해시대와 동아시아
대항해시대의 물결은 동아시아에도 넘실거렸다. 당시 국제시장의 화폐는 은이었다. 볼리비아 포토시Potosi, 멕시코 사카테카스Zacatecas, 일본 이와미 은광에서 캐낸 은은 국제시장에서 널리 쓰이는 화폐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 은의 절반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자기와 직물, 노예, 향신료, 무기 등 여러 교역품과 새로운 사상이 동·서양을 오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총과 불랑기포 등 유럽제 병기가 동아시아로 유입되었다. 200여 년 전, 동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전해졌던 화약병기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16 세 기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신병기들이 동아시아 여러나라의 주력 무기로 자리잡게 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총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1~2 총열과 점화장치
조총의 총열과 점화장치이다. 조총의 총열에는 다양한 정보가 새겨졌다. 1729년부터 시행된 <조총화약제조절목>에 따르면 제작 기관, 제작 장인, 감독관, 만든 시기를 새겨야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많은 조총에는 이러한 정보가 없는 것이 많다. 아마도 민간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용두, 방아쇠, 평 용수철 등은 황동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점화장치는 조총의 몸체를 파내어 끼우고 못으로 결합했다. (안내문, 진주 박물관, 2024년)

<2 점화장치,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4 탄환을 만드는 도구, 육군박물관><5 조총을 장전하기 위한 도구 화약통과 오구,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육군박물관>
<3 다양한 크기의 조총,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육군박물관>

다양한 크기의 조총이다. 조선시대 조총은 단조총, 장조총, 대조총, 천보총 등 크기와 관련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장 일반적인 조총의 크기는 길이 130~140cm 내외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은 조총의 도입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화포장을 독려하고 명군과 접촉하는 한편, 일본군 포로와 항왜를 동원하여 조총을 만들게 하고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조총의 운용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조총 사격술을 무과의 시험과목에 넣었으며, 중앙군인 훈련도감을 창설하여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으로 부대의 편제를 구성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조총은 조선의 주력병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수포,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6 나무 손잡이가 있는 소형화기
나무손잡이가 달려있는 소형 화기이다. 조총의 총열과 같은 제작기법으로 만들었다. 손잡이는 대부분 조총과 같은 형태의 것이 많지만, 직선형인 것도 있다. 한편 가늠자 부분이 고리처럼 생긴 것도 있으며, 현재 목가포라는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 포신에는 제작자와 포의 무게 등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포곤,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7 몽둥이와 비슷한 손잡이를 가진 수포
포신에 ‘민곤’이란 명문이 남아있는 수포이다. 포신에는 화약접시와 함께, 이를 여닫을 수 있게 하는 고리가 남아있다. 심지를 사용하지 않고 화약접시에 불을 붙이는 점화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큰 연환 1개나 작은 탄환 20개를 쓴다고 새겨져 있다. ‘융’자 명문이 포신 윗면에 새겨져 있어 연융대나 총융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계사년 겨울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제작 연대는 연융대나 총융청이 설치되어 있던 1653년, 1713년, 1833년 중 하나로 추정된다. <만기요람>에 기록된 포곤이 이 무기일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총의 도입 이후, 승자총통을 비롯한 소형 총통은 도태되었다. 하지만 수포는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었다. 수포는 조총과 동일한 총열 제작기법으로 만든 것이 많다. 기존 총통의 발사원리와 조총의 제작기법이 결합한 무기인 것이다. 수포의 구경은 대부분 2.5cm이상으로 다량의 작은 탄환이나 한 발의 큰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승자총통이나 일본의 오오즈츠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불랑기포는 조선 시대에 사용된 서양식 화포로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으며, 이후 조선군의 화포 체계에 영향을 주었다. 고정식이 아닌 회전대에 올려 사격 각도 조절 가능, 명중률 및 운용 편의성 우수했으며, 방어에 적합했기 때문에 공성용 대형화포였던 홍이포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구한말까지 주력화포로 사용되었다.

<8 가장 오래된 불랑기 모포, 조선, 1605년, 국립중앙박물관><9~10 불랑기자포, 조선, 1563년, 보물, 육군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9~10 가장 오래된 불랑기자포
임진왜란 발발 30년 전에 조선이 불랑기포를 국산화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서울시립박물관 소장품은 조선의 대표적인 화기 생산 기관인 군기시의 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두 불랑기 자포는 형태와 제원이 거의 같고, 장인의 이름을 제외하면 명문이 동일하다. 따라서 같은 장소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문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는 불랑기 자포를 지통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불랑기포를 제작했다. 군기시軍器寺 유적 출토품 및 서울 목동 발견 불랑기 자포에서 명종18년(1563)에 해당하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조선이 불랑기포를 본격적으로 제작 ·운용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평양성 전투(1593)에서 명군의 활약을 목격한 이후이다. 불랑기포는 재장전이 빠르고, 적을 조준하기 쉬웠다. 이러한 특성은 청(후금)의 기병을 상대하기에 적합했고, 17세기 이후부터 불랑기포는 조선의 주력화포로 자리잡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삼안총, 조선, 1613년, 보물, 국립경주박물관>

11 가장 오래된 삼안총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삼안총이다. 자루 부분에 1613년 12월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사용한 화약과 탄환 숫자는 판독이 어렵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2~14 다양한 형태의 삼안총>

삼안총은 세 개의 총열을 이어 붙인 것과 하나의 원통에 총구 3개를 뚫은 것이 있다. 심지구멍은 각 총열마다 있는 것도 있고, 하나의 총열에만 있는 것도 있다. 13번 삼총통은 나무 손잡이도 남아있다. 이처럼 손잡이가 짧은 것은 <무예도보통지>나 <평안감사항연도>에 기록된 것과 같이 살상용 무기로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삼안총三眼銃
삼혈총이라고도 불린다. 다중 총열로 구성한 ‘연발 화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이 사용하여 조선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삼안총은 조총의 국산화가 완료되고 제작기술이 축적되면서 살상병기로서 가치가 퇴색되어 신호용 무기로 변화한다. 삼안총은 기병도 운용했는데, 각종 행사에서 말을 타고 삼안총을 쏘는 묘기를 행하기도 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5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모양의 화포, 호준포,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호준포虎蹲砲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형태라 하여 호준포라 부른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개발했다고 전한다. 평양성 전투에서 멸로포나 불랑기포와 함께 크게 활약했다. 조선은 1593년 호준포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명과 청, 조선 모두 쓴 무기로 전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으나 삼안총과 같이 점차 신호용 무기로 변화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6 먼거리에서 두려움을 주는 화포, 소위원포, 조선후기, 국립고궁박물관>

위원포威遠砲
사람들을 두렵게 할 만큼 소리가 크고, 사거리가 길어서 위원포라 부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신무기의 도입과 국산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은 명과 일본의 신무기를 받아들이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무기로는 조총, 불랑기, 삼안총, 호준포가 있다. 조선은 7년간의 임진왜란 동안 이러한 무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맞춘 전술과 편제도 갖추었다. 신무기는 조선의 기존 총통과는 제작기법과 형태에서 차이가 뚜렷했다. 기존 무기체계와 차이가 큰 신무기를 단기간에 받아들이고 국산화한 점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조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기도감은 조선의 화약무기(화기) 생산, 수리, 관리, 운용을 총괄하던 군사 기술 기관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군사 체계를 재정비하면서 화기의 중요성이 커졌고, 이에 따라 광해군 때 화기도감이 설치되었다. 화포장, 화약장, 철포장 등 무기 기술자들이 배치되고, 화기(총통, 조총, 대포 등) 제작, 수리, 관리하였다. 이후 군기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화기도감의궤, 조선, 1615년, 복제(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 화기도감에서 화기를 만든 내용을 종합한 의궤
1614 ~1615년에 화기도감에서 화기를 만든 내용을 종합한 의궤이다.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도입된 불랑기포, 백자총통, 삼안총, 쾌창과 개량된 현자총통, 소승자총통의 규격과 제조한 숫자, 그리고 제작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중백자총통, 조선, 1605년, 국립중앙박물관>

2 중간 크기의 백자총통
약실에 ‘중백’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어 중백자총통임을 알 수 있다. 별도의 포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화기 도감의궤> 속 백자총통도 포이가 없고 고리 형태의 쐐기와 결합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3 소승자총통, 조선, 1587년, 국립중앙박물관>

3 조준사격이 가능한 소형총통
조준 사격이 가능한 소형 총통의 최종 발전형태를 보여준다. 조총과 같은 모양의 손잡이를 부착하기 위한 고리가 있다. <화기도감의궤>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조총이 국산화된 이후인 1615년까지도 생산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화기도감의궤>에는 소승자장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장가는 조총의 몸체를 말하는 것으로, 소승자총통이 조총과 같은 형태의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한편 이전에는 청동을 주조하여 만들던 것과 달리 <화기도감의궤>에 기록된 소승자총통은 철을 두드려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불랑기포, 조선, 1619년, 국립중앙박물관>

4 불랑기포
<화기도감의궤> 편찬 4년 후에 만든 불랑기포이다. 1605년에 제작된 불랑기포와 비교하여 크기가 작아졌을 뿐 형태는 매우 유사하다. 이후에 제작되는 불랑기포에 포이가 있는 것과 달리 포이가 없다. 이는 1605년 제작된 불랑기포나 <화기도감의궤> 속 불랑기포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화기도감의궤>의 그림으로 보아 고리 모양의 정철과 결합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기도감火器都監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신무기의 국산화와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광해군은 화기도감을 설치했다. 화기도감에 소속된 장인들에게는 화기 생산량이 할당되었고, 왕은 화기 생산량을 매달 보고받았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화기도감은 불랑기, 삼안총, 백자총통 등 신무기와 현자총통, 소승자총통 등 다양한 화기를 개량하여 제작하는 성과를 거뒀다. 1623년 화기도감은 폐지되어 그 임무가 군기시로 넘어갔지만 화기 제작의 기술은 이어졌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에 건너온 신무기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의 정치·사회·경제 전 분야에 걸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군사 부문에는 큰 변화가 요구되었다. 조선은 일본군과 명군의 신식화기와 새로운 전술을 원했다. 이에 조총의 국산화를 위해 항왜(투항한 일본군)를 동원하고, 명나라의 <기효신서>를 따라 삼수병 체제를 구축했다. 조선은 단기간에 신무기의 국산화와 운용에 성공했다. 임진왜란 종전 21년 만인 1619년에는 사르후 전투에 조총과 화포로 무장한 대규모 부대를 파병하기에 이른다. 신무기와 개량된 화포는 조선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 조선은 이러한 화기로 청(후금)에 대항하고, 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이라는 미지의 적에 맞서 싸웠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기효신서>는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저술한 군사 훈련·전술 지침서이다. 당시 중국 동남해안에서 왜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전근대 동아시아 병법의 정수를 집대성하고 실전 경험을 체계화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군대 훈련법, 병종 배치, 전투 전술, 병영 조직, 무기 운용, 군율 등 총망라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제 개혁과 군사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왜구를 물리치는 방법을 쓴 책, 기효신서, 조선후기>
<2 <기효신서>의 핵심내용을 간추린 책, 기효신서절요, 조선후기>

<기효신서>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린 책이다. 정탁의 문집인 <약포선생문집>에 따르면, “<기효신서>는 군사적 효용성은 높았지만, 중국 병서였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웠다. 또한 중복된 내용이 많아 연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류성룡과 한교가 책을 정리하여 펴내고, 이시발이 다시 정리하여 간행했다.” 고 한다. 국난에 맞서 새로운 전술을 확립하기 위한 조선의 노력을 보여주는 병서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3 <기효신서>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친 책, 병학지남, 조선, 1748년, 국립중앙박물관>

후금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전거와 기병, 보병의 유기적인 전술을 강조하고 있다.

<4 한교가 북방의 기병을 대적하는 방책을 적은 책, <연병지남>, 조선, 1612년, 국립중앙박물관>
<5 명나라의 모원의가 저술한 군사 백과사전, 무비지, 조선후기, 서울역사박물관>

명나라 때 모원의가 저술한 병서이다. 춘추전국시대 이후의 병법과 전략·전술, 무구 등을 정리한 일종의 군사 백과사전이다. 1737년 청나라 사행 때 구하여 조선에 전해졌으며, 군사 부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6 이서가 저술한 화기 교범, 화포식언해, 조선, 1635년, 복제(원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635년에 이서가 저술한 병서로 1600년대의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에 대해 폭넓게 설명하고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7 한효순이 저술한 화기 교범, 신기비결, 조선, 1603년, 복제(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효순이 1603년 선조의 명으로 당시 조선이 보유한 각종 화약무기의 장전 방법과 사격법을 기록한 군사 교범이다. 조총의 제작과 사용법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8 김지남이 새로운 화약제조법을 기록한 책, 신전자초방, 조선, 1698년, 복제 (원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역관 김지남이 북경에서 습득한 새로운 화약 제조 방법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새로운 전술의 도입과 발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명나라 남병의 전술에 주목했다. 당시 남병은 명장 척계광이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한 절강병법에 따라 싸웠는데 그 핵심이 <기효신서>에 정리되어 있었다. <기효신서> 속 전술의 핵심은 포수(조총수)와 사수(궁수)가 적을 타격하고 근접 전투원인 살수(등패수, 낭선수, 장창수 등)가 원앙진(원앙의 모습과 흡사한 진법)을 펼쳐 적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이 세 병종을 합쳐 삼수병이라 부른다. 조선은 삼수병 체제를 구축하고 중앙군인 훈련도감과 지방군인 속오군에 이를 적용했다. <기효신서>의 내용을 조선의 사정에 맞게 고친 <병학지남>은 <기효신서>와 함께 조선 후기 병서의 기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발호하자 기병에 대비한 전술도 필요해졌다. 한효순은 화기의 제작과 운용 방법을 정리한 <신기비결>을 편찬했다. 또한 한교는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과 척계광의 <연병실기>를 참조하여 <연병지남>을 펴냈다. <연병지남>에는 전거의 적극적인 활용과 포수, 살수, 기병의 유기적인 운용으로 적을 상대하는 방법이 실려있다. 하지만 조선은 야전보다는 수성에 무게를 두어 화기의 생산과 포수의 양성에 힘을 쏟았다. 결국 <연병지남>의 전술은 실전에서 활용되지 못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후금과의 전쟁
강력한 기병 전력을 보유한 후금(청)과의 전쟁에서 조선의 전략적 선택지는 2개였다. 수성하면서 강력한 화기로 적을 막아내는 것과 <연병실기>와 <연병지남> 등 병서에 따라 전거와 기병을 활용하여 일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기병대를 육성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산악지형이 많아 전거 운용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기병에 대한 방어 역량이 부족했던 조선군은 사르후 전투(1619)와 병자호란(1636) 때 야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조선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조선의 중앙군에 막혀 남한산성을 넘지 못했다. 지방군인 근왕도 광교산 전투와 김화전투(평안도 근왕군)에서 화기의 힘으로 청의 정예군에게 승리를 거뒀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팔기병의 돌격은 얼마나 강했을까?
청나라 팔기병의 돌격은 얼마나 위력적이었을까? 19세기의 미군 기병교범에 따르면 적과 충돌하기 직전 기병의 돌격 속도는 시속 18km 내외였다. 아마도 중무장한 중근세 기병은 이보다 느렸을 것이다. 느려 보이는 속도이지만 조총의 유효사거리를 100m로 본다면 첫 발사 후 20초 안에 적 기병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중무장 기병대는 밀집하여 돌격하므로 충격력이 컸다. 한 기당 수 백kg에 달하는 중무장 기병의 파도가 들이치는 것이다. 사르후 전투 당시, 이를 막아줄 요새도, 지형도, 기병도 없었던 조선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은 왜 후금(청)에게 패배했을까
1619년 조·명 연합군은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로 진격했다. 네 갈래로 나누어 진격한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 각개격파 당했다. 조선군이 속한 동로군은 부차 벌판에서 궤멸당하고 말았다. 1636년, 압록강을 건너온 청나라군의 별동대에 놀란 조정은 어가를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돌렸다. 남한산성은 포위되었고, 목적지가 고정됨
에 따라 진격로가 제한된 근왕군은 차례로 격파당했다. 조선은 강한 화력을 갖추었고 그에 맞는 전술도 발전시켰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해야 했고 국내정치가 어지러워, 보급과 훈련은 언제나 부족했다. 조선의 화력이 후금(청)보다 강하다고 한들, 일선 병사들에게 보급된 화약과 탄환은 모자랐다. 징집된 속오군은 팔기 기병 앞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많은 병사와 강력한 무기를 갖춘 것이 강한 군대가 아니라, 보급이 원활하고 잘 훈련된 군대가 강한 군대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은 후금(청)에 미치지 못했다. 후금(청)은 실전으로 단련된 강군이었다. 명과의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대규모 회전(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임)을 벌이는 데도 능숙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천자총통><2 현자총통>

1~6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다양한 대형화기 조선후기, 재현품
17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대형화기이다. 천자총통과 현자총통은 16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보다 크기가 더 커지고 약실과 포열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현자총통의 내부에는 석환이 남아있다. 별황자총통은 기존 황자총통과 달리 포이와 정철이 부착된 선회포로 변모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4 위원포(대.중)><5 호준포><6 별황자총통><8 초대형 조총 총렬, 조선후기, 국립경주박물관>

8 초대형 조총 총렬, 조선후기, 국립경주박물관
일반적인 조총 총열의 길이인 80~100cm를 크게 웃도는 초대형 조총 총열이다. 길이는 127cm에 달하며 구경도 2.4cm로, 일반적인 크기인 1.3~1.5cm의 2배에 달한다. 병부까지 현존했다고 가정하면 길이가 최소 1.6m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게는 10kg에 달하여,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럽이나 중국의 사례와 같이 총 거치대나 사람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사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9 수철연의환><10 연환><11철환><12 석환><13 장군전>

9~13 화기의 발사체, 조선후기
화기의 발사체이다. 조선은 다양한 발사체를 운용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등장한 수철연의환은 내부는 철로 만들고, 외부를 경도가 낮은 납으로 둘러싸 화포의 손상을 방지하고 사정거리를 늘렸다. 장군전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전시된 장군전의 머리 부분은 남한산성에서 출토된 것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3 불랑기포><7 신기립의 이름이 남아 있는 불랑기포, 조선, 1666~1678년,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7 신기립의 이름이 남아 있는 불랑기포, 조선, 1666~1678년, 국립중앙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통제영의 감조군관 신기립이 1666년부터 1678년까지 제작한 불랑기포이다. 김애립, 박홍일, 김덕신 등의 장인이 함께했다. 선조와 광해군 대 제작된 불랑기포와 달리 포이가 있고, 정철이 부착되어 있다. 규격화의 양상이 뚜렷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7세기 조선의 화기명장名匠들
효종~숙종 대에 제작된 불랑기 모포와 자포, 현자총통 등에는 신기립이라는 이름이 확인된다. 신기립은 화기제 작을 감독한 감독관으로, <비변사등록>에서는 통영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신기립은 본래 일반병사였으나 화기 제작 능력을 인정받아 통제영, 경상좌수영, 전라 좌·우수영, 수어청 등 주요 군영에 차출되어 화기를 만들었다. 그 공로로 무관직에 올라 1665년에 목포만호, 1669년에 방답첨사를 역임하고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오로지 능력만으로 당상관에 오른 것은 신기립의 화기 제작역량을 보여준다. 신기립은 벼슬길에 오른 이후에도, 충청도, 황해도, 강화도, 남한산성 등의 화기 주조 감독으로 활약했다. 한편 강준, 신청도 신기립처럼 여러 화기에 이름을 남긴 화기전문군관으로 활약했다. 신기립의 화기제조에는 김애립이라는 뛰어난 장인도 함께했다. 신기립의 이름이 남아있는 여러 화기에 함께 이름을 남긴 김애립은 진주 출신의 인물로, 범종이나 발우 등의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재능을 화기에 접목하여 여러 공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김애립은 공을 인정받아 정3품 통정대부의 공명첩을 받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기의 개량
17세기에도 화기의 개량과 제작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조 26년(1648)에는 지포라는 남만의 화포를 국산화했다. 지포는 청동제 화포에 기름먹인 종이를 덧대어 청동의 소모량과 화포의 무게를 줄인 화기로, 포이가 있어 높낮이 조절이 가능했다. 북벌을 표방한 효종 대에는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을 개량했다. 조총을 새롭게 개량하고, 남만인으로부터 얻은 조총을 모방하여 제작하기도 했다. 숙종 대에는 불랑기포의 비중을 높이고, 조란탄(새알 모양의 작은 탄환)을 다량 발사할 수 있도록 운용하는(1681) 한편, 천보총을 개발했다. 영조 7년(1731)에는 훈련도감에서 홍이포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러한 화기의 개량과 제작에는 조선에 표착한 서양인의 역할도 컸다.벨테브레이와 그 동료들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화기의 제작에 힘썼고, 귀화하여 벼슬을 받기도 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을 지키는 주력무기
조선은 신무기에 걸맞은 전술을 갖추고자 노력했다. 특히 명나라의 <기효신서>는 조선 후기 전술의 기본 토대가 되었고,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고친 <연병지남>, <병학지남> 등의 병서를 간행했다. 임진왜란 종전 20여 년 만에 조선군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그에 맞춘 전술로 훈련한 군대로 바뀌었다. 조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불랑기포와 천·지·현·황자 총통의 개량을 이어나가는 한편, 지포와 홍이포 등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고 국산화했다. 조선의 포수는 중국이 탐내는 정예병이었다. 정유재란과 사르후 전투, 정묘·병자호란,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 때도 조선의 포수는 뛰어난 사격술로 활약했다. 조총과 불랑기포 등의 신무기가 조선을 지키는 주력무기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나선정벌은 1654년과 1658년, 조선이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에 참전한 두 차례의 원정군 파병 사건을 말한다. 조선과 러시아가 처음으로 무력으로 조우한 사건이기도 하다. 조총병 중심으로 참전했으며, 정규전보다는 기동전, 매복 중심의 실전이었다. 소수의 숙련된 병력으로 러시아군에 효과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 브라운베스 플린트락 머스킷, 영국, 1722~1838년, 전쟁기념관>

1722년부터 1838년까지 영국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수석식 소총이다. 영국 전열보병(머스킷 총을 들고 횡대로 서서 전투를 벌이는 보병)을 이르는 말인 레드코트를 상징하는 총으로서, 이 총을 든 영국 병사들이 여러 식민지를 침탈하고, 미국 독립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여러 전쟁에 참전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조선시대 부싯돌과부시쇠, 조선후기><3 유럽 부싯돌, 프랑스>

흑룡강의 200 포수들
1650년대, 청은 남쪽과 북쪽 양쪽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남쪽에는 대만을 근거지로 한 복명復明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북쪽에는 모피를 찾아 온 루스 차르국(현 러시아)의 카자크 원정대가 흑룡강 일대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었다. 청은 복명세력과의 전쟁으로 카자크를 제압할 전력이 부족했기에 조선 조정에 포수 파견을 강요했다. 1654년, 제1차 토벌에서 조청 연합군은 카자크를 물리쳤으나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제2차 토벌을 위해 조선은 1658년 신유申瀏(1619~1680)가 이끄는 200명의 포수를 파병했다. 조선 포수들은 루스 차르국에 맞서 활약했다. 조청연합군의 승리로 카자크는 물러났지만, 루스 차르국의 전술과 수석식 총, 서양식 범선의 함포사격은 조선군에게 충격을 주었다. 신유는 각고의 노력으로 총 한 자루를 얻어 귀국했지만 수석식 총은 곧 잊혀졌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 후기의 군영은 중앙 및 지방 군사력을 담당한 상비군 체제의 핵심 조직이다.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전문 군인 중심의 군영 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중앙에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5군영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속오군이 있었다. 5군영은 조총과 화포 중심의 부대였으며 무기를 제조하는 군기시와의 협조관계가 중요했다. 반면에 지방 속오군은 민병형태의 조직으로 실질 전투력은 낮아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훈련도감 병사의 군장, 재현품,>
<1 통제영에서 제작한 상평통보, 조선 후기>
<2 군영에서 제작한 상평통보, 조선후기>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총융청 등 조선의 중앙 군영에서 제작한 상평통보이다. 각 군영의 ‘호가 잘 남아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폐를 발행한 군영
조선의 화폐 발행에는 호조 뿐 아니라 각 지방관청과 군영도 참여했다. 화폐의 발행은 그 자체로 이익이 되었다. 액면가에서 발행비용을 뺀 만큼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제작 원가를 절감해야 했다. 이에 적합한 곳이 바로 중앙과 지방의 군영이었다. 각 군영에는 무구를 만들기 위한 시설과 인력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화폐(상평통보)의 원재료인 구리만 충분하다면 발행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3~7 군영에서 제작한 조총>
<3~7 군영에서 제작한 조총>

조선 후기 군영에서 제작된 조총이다. 각 조총을 만든 기관을 뜻 하는 ‘호’가 새겨져 있다. 조총을 만든 대부분의 기관은 상평통보도 제작했다. 따라서 조총과 상평통보에 같은 ‘호’가 있는 경우가 많다. 7번 조총의 경우 금위영과 장용영의 ‘호’가 같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아마도 금위영에서 운용하던 조총을 장용영에서 인수하여 수리 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8 ‘무武’자 명문이 전서체로 쓰여있는 조총, 조선후기>

총열의 윗면에 ‘무’자가 전서체로 감입되어 있다. ‘무’자 명문이 있는 조총은 명문이 있는 조총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제작 주체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군기시의 다른 이름이 ‘무고武軍’인 점, 조총을 많이 만들었던 기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군기시가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9 정조 때 편찬한 조선의 법전, 대전통편, 조선, 1785년>

정조 때 편찬한 법전이다. 무기의 제조와 관련된 내용도 남아있으며, ‘무기를 만들면 제작 관청과 진이 그 ‘호’를전서체로 낙인하라’고 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Made in ‘군영’, 조총에 남은 군영의 호
총통에 장인의 이름이 새겨졌듯, 조총에는 각 군영의 이름이 남아있다. 1785년 편찬된 법전인 <대전통편>에는 군기를 제조하면 그 주진의 호를 낙인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조총의 총열 위에는 여러 군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訓(훈련도감)’, ‘禁(금위영)’, ‘壯(장용영)’, ‘總(총융청)’, ‘營(어영청)’, ‘武(군기시 추정)’ 등 다양한 군영의 호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호는 각 군영에서 생산한 상평통보에도 남겨진 것이 많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삼군영三軍營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조선은 훈련도감(1593)을 비롯한 중앙군을 창설했다. 중앙군은 5개 군영으로 구성됐다. 한양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영이 자리 잡았고, 남한산성에 수어청, 북한산성에 총융청이 자리 잡았다. 한양에 주둔한 삼군영은 수도를 방위하고, 순찰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한편으로는 이인좌의 난(1728)과 홍경래의 난(1811~1812) 등 굵직한 반란을 진압하고, 두 차례의 호란과 신미양요 등 외환에 대응했다. 또한 각종 왕실 행사에 참여하여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기도 했다. 삼군영은 조선 후기 왕권의 상징이자 방패였다. 삼군영의 상시 병력은 1만 명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의 식솔까지 합치면 최대 5만여 명의 군인 가족이 한양에 거주했다. 한양 인구의 15%에 달하는 숫자였다. 1746년 반포된 <수성절목>에 따르면 군영의 병사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유사시에는 도성 방어를 위해 각 군영에 소속되어 지정된 위치를 지켜야 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변혁의 불꽃, 그리고 한계
조총은 조선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조총을 사용하는 중앙군이 수도에 자리하면서 한양의 인구가 크게 늘었고, 그들의 생업활동이 상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각 군영과 지방에 조총의 제작이 할당되었고, 이는 수공업 발전과 시장의 활성화, 광산 개발로 이어졌다. 정조는 각 군영의 전술을 통합한 <병학지남>을 발간하고, <무경 칠서>를 재간행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성과는 세도정치와 국력의 쇠퇴로 빛을 잃게 되었다. 세도정치에 마침표를 찍은 흥선대원군(집권시기 1864~1873)은 집권 초기부터 다양한 화약무기를 제작했지만 이미 서양과의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조선은 신식무기를 수입하고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것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 대형 박격포, 대완구, 조선, 1845년, 보물>

1845년 8월에 제작된 대원구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대완구이다. 비격진천화나 석환을 장전하여 쏘업다. 홍경래 난 때 진압군이 사용했다. 명문에는 대완구 뿐 어나라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돌로 만든 탄환, 석환, 조선후기>
<의병장 현인복이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며 쓴 일기, 진중일기, 조선, 1812년>

홍경래의 난 당시 진압군으로 참전한 의병장 현인복이 쓴 일기이다. 1811년 12월 18일부터, 난의 진압 이후인 1812년 6월 20일까지 약 6개월간의 기록이다. 당시 관군과 의병의 상황, 홍경래 군의 상황, 정주성 공방전 당시의 모습, 평안도 지역 백성들의 참상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 실제 참전자가 남긴 생생한 기록으로, 홍경래의 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1차 사료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홍경래진도, 조선, 19세기 전반, 복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홍경래의 난을 진압할 때의 모습을 그린 그림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상황을 그린 기록화이다. <순무영군진도> 또는 <정주성공격도>라고도 불린다. 홍경래 군이 정주성에서 농성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진압군의 여러 진영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중앙에서 파견된 선전관이 군병들에게 음식을베풀고 그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정주성 전투
조선의 서북방은 건국 이래로 홀대받던 지역이었다. 양반들은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백성들도 청 사신의 접대와 연행사(청으로 가는 사신단)의 경비를 감당해야 했다. 게다가 조선 전역에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이때 몰락 양반 출신 홍경래가 1811년 12월 서북방에 대한 차별과 철폐와 권신權臣의 척결을 내세우며 난을 일으켰다. 반란세력은 서북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의주와 안주 등 거점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진압군인 순무영을 정면에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순무영의 주력은 훈련도감의 정예 포수와 화포 전담부대인 별파진이었다. 최후의 결전인 정주성 전투(1812)에서 순무영은 천자총통, 대완구, 불랑기포 등 대형화기로 성을 공격하면서, 반란군의 습격을 화기로 격퇴했다. 이어서 1,700근의 화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며 난을 종식했다. 순무영은 졸전을 벌였고, 진압 방식이 가혹했다. 또한 화포 공격만으로 정주성을 함락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홍경래의 난은 당시 조선군이 화기를 중심으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력조선의 선봉, 별파진別破陣
별파진은 대형화기를 다루던 특수요원이다. 별파진은 부대를 이루지 않고 각기 군영과 아문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화기 전문가이자 운용요원이었으며, 화기 사용법을 가르치는 교관이기도 했다. 별파진은 17세기에 접어들어 화기를 활용하여 도성과 보장처(강화도, 남한산성 등)를 수성하는 방위전략이 강조되면서 중요해졌다. 수어청, 금위영, 어영청에 속한 별파진만 3,000여 명에 이르렀다. 화포를 활용한 별파진의 수성 능력은 홍경래의 난 당시, 정주성 전투에서 드러났다. 목책 뒤에 진을 짠 순무영을 향해 기습한 홍경래의 반란군은 대완구와 조총 사격에 막혀 퇴각했다. 비록 화포 공격만으로 성을 넘지는 못했지만, 이는 포격에 잘 견디도록 축성된 정주성의 견고함에 더해, 화기전력이 공성보다는 수성에 주력했던 것이 그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병학지남, 조선, 1787년, 국립중앙박물관>

1 정조의 명으로 고치고 정리한 <병학지남>
정조의 명으로 기존 <병학지남>의 내용을 고치고 정리하여 장용영에서 펴낸 <병학지남>이다. 이후 발간되는 <병학지남>의 정본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병학통, 조선, 1787년, 국립중앙박물관>

2 정조의 명으로 펴낸 조선의 종합 군사 훈련 교범
1776년(정조 원년) 정조의 명령을 받아 형조판서 장지항이 편찬한 종합 군사 훈련 교범이다. 조선의 중앙군인 오군영에서 150여 년간 개발해 온 야전 훈련 진법들을 총망라했다. 이후 교정과 교열을 거쳐 1785년(정조 9)에 간행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만기요람, 조선, 1808년, 국립중앙박물관>

3 순조 때 재정과 군사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책
1808년 서영보와 심상규 등이 순조의 명으로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군정편>에는 중앙군인 오군영이 보유한 무구의 종류와 숫자를 상세히 기록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4 마상총, 조선, 1785~1802년><6 신축년년에 고쳐 갖추어 강화도 무기고에 보과난 조총, 조선 1781년><7 신축년에 고쳐 갖추어 강화도 무기고에 보관한 환도, 조선 1781년>

4 기병이 사용한 조총,
기병이 사용한 조총인 마상총이다. 총열에 장용위나 당용영을 뜻하는 ‘장’자가 새겨져 있어 장용위가 설치된 1785년부터 장용영이 폐지된 180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마상총을 쓰는 기병을 양성했다.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훈련도감은 205자루의 마상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5 장용영에서 제작한 불랑기포, 불랑기포, 조선, 1789년>

정조의 국방정책
<병학지남>은 조선 후기 조선군의 기본 전술서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각 군영별로 세부적인 훈련 방식은 상이했다. 정조는 이를 통합한 『병학통』(1776)을 간행하고 화기전술과 기병전술을 보충한 <병학지남>을 재간행했다. 군사체계 개편도 추진되었다. <무경칠서>를 새롭게 간행하고, 장용영을 설치(1788)하는 한편, 조선 전기의 오위체제를 장영용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어서 중국과 일본의 축성기술을 우리 실정에 맞게 도입하여 수원 화성을 축조했다 정조 사후 9년 뒤인 1808년 편찬된 <만기요람>의 ‘군정편’에는 중앙군이 보유한 화기의 목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중앙군은 9만 정이 넘는 조총과, 수백문의 대형화포, 500만 발이 넘는 탄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조의 노력은 17세기 이후의 전술을 다듬어 종합했다는 점, 군사체계를 일신하고자 한 점, 왕권을 강화한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에 이어진 세도 정치로 성과는 빛을 잃었다. 기존 무기체계를 다듬고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박종경이 쓴 화기 교범, 용원필비, 조선, 1813년, 국립중앙박물관>
<2 서명응이 쓴 백과사전, 고사신서, 조선, 1771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전기의 학자 어숙권이 1554년 쓴 <고사촬요>를 서명응이 대폭 개정·보완한 것이다. 천문, 지리, 점술, 군사, 요리 등 사대부가 알아야 하는 다양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제9권 <무비문>에는 여러 화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3 신경준이 쓴 글을 엮은 책, 여암전사, 현대>

신경준이 쓴 글을 후손이 엮은 책이다. 신경준이 지은 시와 그가 연구한 기계, 역사, 지리에 대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권18 <거제책>에 신경준이 고안한 화거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개념도가 그려져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일와봉총,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4 벌집의 이름을 가진 화포
청동으로 제작한 대형화기이다. 포이가 달려있고 투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랑기포와 같은 선회포로 추정된다. 포신에 ‘일와봉’이라는 이름이 남겨져 있어 일와봉총임을 알 수 있다. <고사신서>에 따르면 정철(단조)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2척 3촌(45.32cm), 구경은 2촌(4.12cm)이며 좌우에는 췌철(포이)이 있다고 한다. <정조실록>에는 100발의 탄환을 쏘았다고 하며, <고사신서>에는 연환 하나를 쏘았다고 되어 있다. 본래 중국의 병서인 <무비지>에 수록되어 있던 것으로,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711년(숙종 37) 1좌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 18세기에는 조선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오연자총,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5 5 연발이 가능한 화기
5발까지 탄환을 연속하여 쏠 수 있는 화기이다. <융원필비>에 목화수거라는 이름의 수레에 결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목화수거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부속품이었던 날개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십연자총,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6 10연발이 가능한 화기
10발까지 탄환을 연속하여 쏠 수 있는 화기이다. <융원필비>에서 화거에 여러 점이 결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십연자총과 오연자총처럼 복수의 총열을 가진 화약무기는 기관총과 같이 연속발사로 화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되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화거>

전통화기와 화거의 발전
화기의 개발과 개량은 지속되었다. 훈련대장 박종경은 기존의 화기들을 개량하고 신무기를 제조하면서 <융원필비>를 저술했다. 이 책에는 28종에 달하는 다양한 화기와 그에 맞춘 전술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화기의 제원과 사용법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다양한 화거와 전거도 제작되었다. 숙종 5년(1679) 군기시에서 화거 50대를 제작하고, 같은 해 9월에는 노량에서 화거 수십 대를 동원한 훈련을 진행했다. 영조 대에는 평안 병사 이사성이 고안한 철거, 경상 좌병사 전운상이 고안한 독륜전거 등 새로운 화거와 전거가 등장했다. <융원필비>에는 호랑이를 닮은 화거인 목화수거와 십연자총을 6개 설치한 화거가 등장한다. <만기요람>의 <군정편>에는 187대의 화거와 51대의 전거가 목록에 있어, 당시 화거와 전거가 대규모로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경준과 서명응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화거와 전거를 고안하기도 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전통·혁신·한계
18세기에도 조선은 군사력 정비를 늦추지 않았다. 정조는 병서를 정리하고 통합하는 동시에 왕권 강화를 위해 장용영을 신설했다. 또한 오위체제의 부활 등 국방 체제의 개편을 시도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 세도정치가 이어지며 조선의 화력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만기요람>을 펴내어 18세기의 성과를 잇고자 했고, <융원필비>와 같은 새로운 병서를 편찬하며 군사력 유지의 의지를 보였지만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60여 년을 이어간 세도정치 끝에 집권한 대원군은 군사력 증강을 도모했지만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종의 친정(1873) 이후부터는 외국제 무기를 수입하고, 무기제조시설인 기기창을 설립(1887)하여 군대의 근대 화를 시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해남읍성에서 출토된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해남읍성에서 여러 무기와 함께 출토된 레밍턴 롤링블럭소총이다. 총열과 방아쇠 등 금속 부분만 남아있다. 방아쇠 위에 달린 해머를 젖히고 총알을 장전하는 간단한 구조이다.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은 미국의 레밍턴사에서 1864년 개발하여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생산했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총기로, 40여 개국에서 사용했다. 조선은 이 총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동학농민운동 진압(1894)과 경복궁전투(1894) 때 사용했다. 이 총은 조선이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을 사용했음을 실증하는 자료로 가치가 크다. 또한 출토지가 해남읍성인 점, 총열을 일부로 휘어서 묻은 것으로 보이는 점, 환도와 철창, 철제 선회포 등과 함께 묻혀 있던 점으로 보아 동학농민운동이나 후기 의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무기재고표, 대한제국,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 대한제국의 지방군이 보유한 무기의 목록을 정리한 보고서
대한제국 때 서울과 함경도를 제외한 지역에 보관되어 있던 화기 목록을 정리한 책이다. 구식 병기의 수량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신식화기의 수입과 한계
개항(1876) 이후 조선은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의 신식화기를 수입
했다. 조선은 구입한 신식화기로 무장한 별기군(1881), 친군영(1882)을 창설하고 신식무기를 자체 생산하기 위해 기기창(1887)을 설치했다. 그러나 군수품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어려웠다. 조선은 여러 나라에서 무기를 수입했고, 대한제국도 사정이 같았다. 제국을 표방하고 예산의 40%(1901년 기준)에 육박하는 군비를 지출했지만 군수물자의 국산화는 어려웠고, 수입은 계속되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기 구입은 여러 강대국과의 외교적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레밍턴 롤링 블럭 소총을 구입했고, 아관파천(1896) 이후에는 러시아의 베르단 소총을 구입했다. 영국이나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은 프랑스의 그라 소총을 구입하기도 했다. 조선과 대한제국도 일원화된 제식병기를 갖추고 최신무기로 무장한 강군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30년 이라는 짧은 시기 동안 국권을 지키고자 기울인 군사적 노력은 1907년 군대해산으로 끝을 맺는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청나라의 정공진이 쓴 화포 기술서, 중국 청, 1843년>

청나라의 정공진丁洪展(1800-1875)이 쓴 화포 기술서이다. 정공진은 외국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선박 건조와 화포의 제작·운용에 대한 식견을 쌓았다. 아편전쟁(1840) 때 청나라가 영국에 압도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화포와 관련된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담은 <연포도설집요>를 간행했다. 홍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에 이 책을 운현궁으로 보내 연구하도록 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청나라의 이원이 쓴 세계지리서, 중국 청, 1842년>

청나라 위원이 쓴 세계 지리서이다. 1842년에 50권본으로서 간행되었다가 1847년에 60권본, 1852년에 100권본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는 힌편 종교와 역법, 군함·대포·망원경의 제조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각종 화기에 대한 제작·시용법이 그림과 함께 상세히 남아 있는데 아편전쟁 직후라는 시대 상황에 따라 국방 서적의 성격을 보여준다. <해국도지>는 <훈국신조기계도설>의 저술과 근대식 화기의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선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이 서양의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철을 두드려 만든 선회포, 조선, 19세기>

철을 단조하여 만든 선회포이다. 전반적인 형태는 포이와 정철이 달려있어 불랑기포와 유사하다. 해남읍성에서 9점이 출토되었다. 함께 출토된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작열탄을 쏘는 근대식 박격포, 구포, 조선, 1879년 이후>

일종의 박격포이다. 조선은 1879년 일본 상인으로부터 구포 2문을 구입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구포기계여장방법>에는 구포의 장전과 발사 등에 대한 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구포의 발사체는 폭발하는 작열탄이다. 포탄에 구멍을 뚫고 폭발물을 담았다. 포탄의 아랫면은 동그란 판을 부착하여 안정적인 발사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중완구와 닮았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조선시대의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조선 19세기,>

화포장 이장손이 임진왜란때 개발한 포탄이다. 심지의 길이를 조절하여 폭발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내부에는 빙철(날카로운 쇳조각)을 넣어 살상력을 높였다. 이 비격진천뢰는 고창 무장읍성의 군기고(추정)에서 출토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 조총을 개조한 뇌관식 소총, 조선후기, 육군박물관><2 기병이 쓴 뇌관식 소총>

1 조총을 개조한 뇌관식 소총, 조선후기, 육군박물관
조선시대 조총과 외형이 거의 같다. 점화장치만 뇌관식으로 개조한 총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2 기병이 쓴 뇌관식 소총,
뇌관식 소총이다. 총열과 개머리판이 짧은 것으로 보아 기병용 소총인 카빈 소총으로 보인다. 형태적으로는 스프링필드 소총이나 엔필드 소총 등 1850년대 이후 제작된 총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총기에 각인이 남아있지 않고, 강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여러 총기의 특징을 모방하여 만든 사제총이거나 기존 수석식 총을 개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갑인년에 제작한 화포, 갑인명포, 조선, 1854년><두 개의 포신을 결합한 화포, 쌍포, 조선, 1854년><을축년에 제작한 화포, 을축명포, 조선, 1865년>

갑인년에 제작한 화포, 갑인명포, 조선, 1854년
전반적인 형태와 재질, 제작 연도가 쌍포와 같은 화포이다. 본래 쌍포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에서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두 개의 포신을 결합한 화포, 쌍포, 조선, 1854년
두 개의 포신을 결합한 화포이다. 포신을 결합하기 위한 결합장치를 포이처럼 활용하여 양륜거(수레)에 실었다. 포신은 넓적한 칼국수 모양의 동판을 두들겨서 만들었는데, 청동이 아니라 순동으로 만든 점이 독특하다. 기존의 화포와 달리 심지가 아니라 화약접시를 이용해 점화한 것으로 보인다. <훈국신조군기도설>에는 쌍포 양륜거라고 불리며 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을축년에 제작한 화포, 을축명포, 조선, 1865년
형태와 재질이 갑인명포와 유사한 화포이다.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에서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운현궁에서 제작한 소포, 소포, 조선, 1874년>

운현궁에서 1874년(고종 11) 제작한 소포이다. 1980년 김포 덕포진에서 출토되었다. 이때 같은 시기에 제작된 중포와 포가의 부속구가 함께 출토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은 후, 흥선대원군은 근대적인 화포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이 소포는 18~19세기에 사용된 유럽제 대포와 유사한 모습이며, 근대적인 형태의 포가와 결합되어 있다 . 기존 조선시대 화포와 달리, 별도의 운송수단 없이도 운송이 가능했으며 화포의 발사각도도 조정할 수 있었다. 이 소포는 새로운 무기체계를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대원군의 화기개발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를 겪고 신무기 개발에 힘을 쏟았다. 훈련대장 신헌이 저술한 <훈국신조군기도설>과<훈국신조기계도설>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신헌은 서양 기술을 담은 중국 서적 <해국도지>를 참고하여 각종 화포의 포가를 만들었다. 또한 거푸집을 철로 만든 철모를 제작했다. 철모는 기존의 토모와 달리 재활용이 가능했고 주조 시 발생하는 기포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서양식 대포를 모방한 소포, 중포, 대포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 대포들은 신식 포가가 결합된 근대식 화포의 면모를 보여준다. 뇌관식 소총의 도입과 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선의 화기 발전은 17세기 이후의 전통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서양과 일본은 후미장전식 화기가 제식무기로 사용되고 있었고 근대적 군사교리와 보급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결국 신미양요(1871)와 운요호 사건(1875)으로 조선의 군사적 한계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총알을 막기위해 삼베를 겹쳐 만든 갑옷, 면제배갑, 조선, 19세기>

삼베를 30겹 겹쳐 만든 갑옷이다. 신미양요(1871) 때 조선군이 사용했으며 당시 전사한 조선군이 입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방탄을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탄성이 큰 섬유조직을 겹쳐서 탄환을 막아내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조선군이 사용한 원형의 탄환이 아닌 유선형의 탄환을 쏘는 서구 열강의 총기를 막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갑옷의 안쪽에는 공군옥이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또한 둥근 못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두정갑옷과 함께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갑옷 앞뒤에는 오악진형도와 복숭아 문양 등 도교와 관련된 문양이 찍혀있다. 면재배갑을 비롯한 조선 후기 갑옷에는 도교나 불교와 관련된 문양이 찍힌 것이 많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3년)

<사전총통기 화차, 조선 15세기, 복원품>

화살 200개를 동시에 쏠 수 있는 화차
신기전기 화차와 같이 <국조오례의 서례>의 기록을 근거로 문종대의 화차를 복원하여 만들었다. 사전총통기 화차는 사전총통 50개를 1대의 화차에 설치한 것이다. 사전총통은 세전의 경우는 4개, 차세전의 경우는 6개를 쏠 수 있기 때문에, 이 화차로 200개의 세전이나 300개의 차세전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었다. 사전총통은 청동으로 만들었고 세전과 차세전은 대나무 깃대 앞에 쇠촉을 붙이고 뒷부분은 새털로 만든 날개를 붙여 제작하였다. 세전과 차세전은 길이가 6촌3분19.3cm으로 같지만, 둘레가 각각 8분2.45mm과 7분5리2.3cm로 차이가 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신기전기 화차, 조선, 15세기 복원품>

신기전 100개를 동시에 쏠 수 있는 화차
<국조오례의 서례>에 기록된 화차를 근거로 복원하였다. 1451년 문종이 임영대군에게 화차를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이 때 만든 신기전기 화차에 신기전 1백 개를 장착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화차가 개량되었지만 문종 때 만든 화차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신기전은 앞부분에 폭발장치인 발화통을 붙인 화살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 무기로 15세기 조선의 최고 첨단 과학 기술을 보여준다. 신기전기 화차는 신기전 100개를 한 번에 발사해 250m를 날아가게 할 수 있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16세기 동아시아에도 대항해시대 국제 해상교역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은과 도자기, 향신료, 노예가 대양을 오갔고, 조총과 불랑기포 같은 유럽의 신병기가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신병기는 조선을 위협하기도 했지만 이내
국토를 지키는 데 큰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신병기를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무기를 개량하고 자체적으로 무기를 개발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 맞춘 전술과 군사체제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국방이 튼튼해지고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 직업군인이 많아지고 무기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공업과 광업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은 2019년 <비격진천뢰>전을 시작으로 조선무기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화력조선Ⅱ]>를 공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신병기를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소개합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개량하여 국토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노력과 한계를 조명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300년간 조선의 화력은 어떻게 타올랐고 어째서 사그라들었을까요. 조선 화약 무기 발전의 정점과 종장을 지금 방포합니다.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진주박물관, 2013년/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