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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히메현] 유즈키성, 일본 중세시대 평산성

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유즈키성湯築城이다. 중세 일본의 성터로, 전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평산성이다. 이곳은 센코쿠 시대까지 이 지역의 중심 거점이었다. 가마쿠라 유력 무사였던 고노씨가 이곳으로 거점을 옮긴 1355년에 축성하였다고 한다. 1585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코쿠지방을 정벌한 이후 폐성되었으며 고노씨는 몰락했다.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도고공원道後公園이라 부른다.  도고온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도고공원道後公園>
<도고 공원>

나즈막한 구릉에 토축을 쌓고 해자를 판 산성 형태였으며 이후 바깥쪽에 해자를 파면서 일본 평산성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큰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고 요새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전국시대 후기 이후 일본성과는 달리 그 이전에 쌓았던 일본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해자와 흙으로 쌓은 성벽 등이 남아 있다. 공원에서는 해자를 주로 볼 수 있다.

<안측 해자(内堀)와 성안으로 들어가는 다리>
<안측 해자内堀>
<안측 해자>
<폭이 좊은 부분>
<바깥쪽 해자>
<바깥해자 너머로 보이는 마을>

동쪽에 위치한 오테몬大手門 이다. 다리를 건너면 성 안쪽에 넓은 운동장이 있어 정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테몬大手門 터>

오테몬은 성의 정문을 의미합니다. 고노씨의 시대에 여기가 어떻게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에도 시대에 쓰여진 『요요군고리겐슈(予陽郡郷俚諺集)』에 〔동서에 문이 있고 성의동쪽이 정문이 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장소에서의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흙다리를 건넌 안 쪽에 성내에서도 가장 큰 공간(현재의 운동장)이 있기 때문에, 성의 구조로 보아도 이 장소가 정문이었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그라운드 발굴 조사에서는 초석건물, 도로, 내부 해자 등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마쓰야마시, 2019년)

유즈키성 해자는 이중 해자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운종장 남쪽에 깊이 1.5m 이상의 내해자가 발견되었으며, 운동장 서쪽에는 폭 1.2m의 얕은 도량만 존재한다. 이를 통해 해자의구조가 일정하지 않고 지형에 맞게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오테몬 남쪽 해자와 흙으로 쌓은 성벽>
<바깥에서 본 해자와 토축>
<바깥에서 본 해자와 토축>
<해자 바깥쪽 마을과 해자>

유즈키 성에는 이중의 해자가 있습니다. 마쓰야마 시립 시키 기념박물관은 바깥 해자 자리에 세워져 있으며 이 부근에서 바깥 해자와 안쪽 해자의 사이가 가장 좁게 되어 있습니다. 발굴 조사에서는 운동장 남쪽에서 안쪽 해자를 확인 하였지만, 운동장의 서쪽에서는 안쪽 해자는 발견되지 않고 폭 1.2m의 얕은 도랑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운동장의 남쪽에서 발견된 안쪽 해자는 폭은 알 수 없지만, 깊이는 1.5m이상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마쓰야마시, 2019년)

<기념비>

유즈키성 유적지는 무로마치 시대 이요국 수호였던 고노씨의 성터로 당시 이요국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노씨는 가자하야군 고노고(마쓰야마시 북부)를 본거지로 한 호족으로, 12세기말의 겐페이 전투에서 미나모토 씨 편에 서서 활약을 하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요국에서 가장 유력한 무사가 되었습니다. 고노 씨가 유즈키성으로 본 거점을 옮긴 것은 14세가 전반 고노 미치모리의 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도고는 예전부터 도고온천에 천황이방문하는 등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이요국 내에서는 경제적, 문화적 요지였습니다. 그 후, 고노씨의 역대 당주가 이요국 수호에 임명되게 되자, 이 곳은 정치적인 중심으로서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고노씨는 수군으로서도 알려져 있으며, 해적 무리로서 유명한 구루시마 무라카미씨도 그 휘하에 있었습니다. 유즈키 성은 처음에는 유사시에 구릉을 성으로서 이용할 뿐이었지만, 16세기 중반에 고노미치나오가 외측 해자를 파고 그 흙으로 토루를 쌓아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성이 되었습니다. 전국시대에 평지 언덕을 이중 해자와 토루로 둘러싼 성은 전국에서도 매우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1585년에 전국 통일을 목표로 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격을 받아, 고노씨는 항복을 하고 유즈키 성은 곧 폐성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에도시대에는 마쓰야마 번이 관리하고, 일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메이지시대에 접어 들어, 1888년에 ‘도고 공원’이란 이름으로 널리 일반에게 개방되게 되었습니다. 도고온천 본관 건설을 진행한 도고유노마치 이사니와 유키야 촌장에 의해 공원으로서 정비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1988년부터 12년간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25만점에 달하는 토기 등이 출토되어 전국시대의 유구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어, 역사 상 중요한 유적으로서 2002년에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유즈키 성의 규모는 외부 해자를 포함하여, 남북 약 350m, 동서 약 300m로, 넓이는 약 8.5ha입니다. 중심은 표고 차 31미터의 약간 높은 구릉으로, 혼단, 스기노단이라 불리는 평탄지가 있고 가장 높은 혼단에서는 마쓰야마성과 멀리 이요나다(伊予灘)를 볼 수 있습니다. 발굴 조사에 의해 성의 남동쪽은 상급 무사의 생활 공간, 남서쪽은 성주를 섬기는 무사가 생활하는 장소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즈키 성의 서쪽에는 조카마치(성 아래 도시)가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북으로는 이시테지(石手寺). 기안지(義安寺). 호곤지(宝厳寺), 유진쟈(湯神社)등 고노 씨와 관계가 깊은 절과 신사가 있었습니다. 전국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예수회의 선교사 루이스프로이스는 ‘도고노 이치’로 불리며 매우 번영하고 있었던 모습을 <일본사> 속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마쓰야마시, 2025년)

<출처>

  1. 湯築城, wikipedia, 2025년
  2. 안내문, 마쓰야마시,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