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은 백제가 한강유역에 확고한 세력을 갖추었던 4세기 충북지역은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5세기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남한강 유역은 당대 최대의 격전장이 되었고, 백제는 점차 이지역에서 고구려, 신라에 밀려나게 되었다. 백제는 마한의 작은 세력이었지만, 토착세력이라기보다는 북방 고구려의 일파가 남하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강력한 철기제작기술과 기마병 운용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서남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지역을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 제작 기술
생활용품이기도 했던 토기는 잘 깨지기 때문에 많은 수요와 공급이 있었습니다. 또, 품질을 높이기 위해 단단하면서도 가법게 만들기 위한 기술이 계속 발전했습니다.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 높은 온도에서 구울 수 있도록 가마의 형태를 발전시키고, 좀 더 입게 만들기 위해서 내박자를 이용해 토기를 다듬었습니다. 진천 삼용리, 산수리 가마터에서는 당시 백제사람들의 토기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신봉동무덤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범마한계의 토기와 한성백제의 영향을 받은 백제토기가 주를 이룬다. 더하여 영산강 지역이나 가야.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기종이 섞여 있고, 드물게 신라 기종의 영향을 받은 것도 확인된다.










단양 하방리 유적은 단양 적성산성 남서향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 돌덧널무덤이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죽령을 넘어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된다.




진천 교성리무덤은 6세기 후반 진천지역이 신라에 편입된 직후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된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관테의 앞.뒤와 양 옆에 ‘出’자 모양의 세움장식 4개가 구리실로 고정되어 있다. 맞새김기법.찍어새긴 점선무늬. 달개장식 등 신라 금속제 관의 제작기법을 볼 수 있다. 6세기중반 ~7세기 초 신라가 단양지역을 장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따라 한강유역과 경상북도, 충청도 일원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 토기는 시간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정선된 태토.물레나 돌림판을 이용한 회전 성형.표면에 문양의 신문한 예가 드물고 띠모양의 손장비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와 영역을 다투던 청원 남성골 산성은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2번째 수도였던 공주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충청북도 지역은 삼국의 힘이 서로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죽령, 계립경, 추풍령 등의 주요 고갯길의 길목이나 남한강,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발달된 교통로의 주요 거점 지역에는 성곽의 축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때 축조된 성곽은 대개 하천이나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구릉성 산지에 입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주변 지역이 군사적으로 안정이 되면 산성은 행정적 지배를 위한 처소로도 활용되었다.

우리나라 판갑옷은 긴 철판을 세워서 연결한 종장판계 판갑옷임에 많은데, 이 갑옷은 철판을 가로로 연결하여 만든 횡장판계 판갑옷이다.



누암리 유적은 270여 기의 무덤이 7개 구역에 나뉘어 수십기씩 군집을 이룬채 분포하고 있다. 충북지방 최고 위계의 고분군으로 6~7세기를 중심연대로 하고 있다. 국원소경을 경영하였던 신라계 지배층의 대규모 집단무덤이다.




청원 미천리유적은 신라 돌덧널무덤 14기가 조사되었다. 5~6세기 무렵 신라가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금강유역권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충주 하구암리유적은 조간이산 서쪽 사면에서 돌방무덤 35기, 돌덧널무덤 31기 등 모두 66기의 신라무덤이 확인되었다. 인근의 누암리고분군과 더불어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국원소경(지금의 충주) 경영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된다.





철광석을 질 좋은 쇠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광석 속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쇠만을 뽑아낼 수 있는 고온의 화로인 제련로가 필요하다. 제련로에서 선철을 다시 용해로에 넣어서 쇳물로 녹인 다음에 거푸집에 넣어서 원하는 형태의 철기를 만드는데, 주로 농기구나 솥 등 대량 생산에 이용되었다. 철광석을 녹이기 위해서는 노 안에 오랜 시간 동안 강한 바람을 넣어 주는 것이 중요한데, 이때 바람을 넣는 풀무와 노를 연결하는 도구가 송풍관이다.



삼국의 제철 기술
철은 당시 최고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생산품이었습니다. 광석의 채굴에서부터 철제품이 완성되기까지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질 좋은 철의 생산을 위해서는 원료가 잘 녹을 수 있도록 높은 온도가 요구되었고, 제철로 내부에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넣어주었습니다. 철 제품을 만드는 방법은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형태를 잡는 주조트효와 불에 달군 철을 두드려 형태를 잡는 단조의 방법이 있습니다. 진천 석장리 유적에서는 당시 높은 품질의 철을 얻기 위한 다양한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충청북도의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충청북도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었을까요? 정답은 “시기마다 달랐다”입니다. 충청북도 지역은 4세기 무렵 백제 세력권이 되었고, 이는 백제가 한반도 중서부의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되었습니다. 5세기에 고구려는 영역을 확장하여 백제의 영토를 점령하였고, 6세기에 소백산맥을 넘어온 신라와 청주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점차 신라에 밀렸습니다. 이렇게 충청북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영토를 두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전략상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충청북도에는 산성을 비롯하여 철제 무기류들이 자주 발견됩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신라는 한강일대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남한강 일대에 많은 산성을 쌓고 충주에는 국원소경, 청주에는 서원소경을 설치하여 지배계층을 이주시킨다. 충북지역에는 당시 이주한 지배계층의 무덤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중 충주 누암리에는 270여기에 이르는 신라 지배층의 고분군이 남아 있다. 이때 신라는 가야에서 투항한 세력들을 충북지역에서 이주시켰는데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장군이 대표적인 이 지역 가야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충주 탄금대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이야기 또한 당시 가야계 세력의 이주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충주 가금면 탑평리 일대는 신라가 중원지역에 진출한 후 557년에 설치한 국원소경의 치소 중 하나로 꼽힌다. 아직까지 행정치소나 도시구획에 의한 시가지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국원소경이 조영될 무렵의 생활유적과 생산시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청주 용담동유적은 서원경이 설치되었던 청주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의 대규모 무덤유적이다. 용담동고분군은 일반적인 통일신라무덤과는 달리 좁은 지역에서 많은 무덤이 조사된 점이 특징이다.



기와가 출토된 쌍청리 일대가 ‘양오가불촌’이었거나 기와를 제작한 촌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쌍청리와 인접하여 서원경이 존재한다.

기와의 사용이 중앙세력에 의해 공공의 목적을 지닌 관청이나 사찰에 주로 공급되었기에 ‘관官’명이 자주 쓰였다.

신라의 행정거점
충주에 설치된 국원소경은 신라 5소경 중 가장 중심적인 지방 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558년 경주에 거주하던 6부의 귀족과 부호가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673년에는 국원성國原城이 설치되었습니다. 또, 689년 청주에 서원경성商原효城을 쌓았는데 그 위치는 상당산성, 와우산 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주변에서는 ‘사량부沙梁部”, ‘탁부啄部’ 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당시 서원경이 경주 왕경처럼 6부가 존재하는 행정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역(양)’오가불촌주易(湯)五加족村보’ 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마을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충청북도의 남북국시대
충청북도는 남북국시대에 들어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신라가 제일 먼저 시행한 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했습니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지방의 주요 지역에는 5소경을 두어 중앙 귀족을 비롯해 옛 고구려나 백제의 귀족을 옮겨 살게 했습니다. 충청도의 충청이 어디서 온 이름인지 아시나요? 바로 충주와 청주입니다. 통일신라 사람들도 이 도시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고 충주에 국원소경을, 청주에 서원 소경을 설치했습니다. 이들은 신라 5소경 중 중심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충청북도는 당시에도 지리와 역사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 가치는 계속 되었습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금속 이전과 이후의 삶
세상은 금속을 만들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금속을 만들기 전은 석기시대로, 사람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습니다. 계절에 따라 먹거리를 찾아 이동했고, 혈연을 바탕으로 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농경으로 한 곳에 정착하였고, 큰 강을 낀 비옥한 땅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재자가 나타나고 권력이 등장합니다. 권력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청동기 등을 만들고 소유합니다. 전문적인 장인들이 금속을 만들고, 반짝이는 광택과 청명한 소리를 가진 금속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속은 점차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도구를 대체하게 됩니다. 금속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합니다. 도구의 발전으로 생산력은 높아지고, 무기가 발전하여 큰 전쟁이 벌어집니다. 높은 기술력과 금속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강력해집니다. 석기시대의 가족 중심 사회는 마을 단위의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통합되어 갑니다. 그리고 철기를 사용하는 마한, 변한, 진한과 같은 정치체로 발전하여, 종국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등을 거쳐 통일신라로 통합됩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 안내문, 청주박물관,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