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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호로고루(사적), 임진강 고랑포구 부근 고구려 요새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있는 고구려 요새인 호로고루(사적)이다. 임진강이 지천과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지형에 쌓은 강안평지성이다. 동쪽을 제외하고는 약 20~30m 정도의 현무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연의 요새이다. 성벽전체의 둘레는 400여m, 면적은 600여㎡로 종도이다. 남벽과 북벽은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삼아 상단부에 1~2m의 토축을 쌓고 목책을 설치했으며 성안으로 출입하는 동쪽에 토축과 석축이 섞여 있는 높이 10여m의 성벽을 쌓았다. 동벽에 성문을 두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북측 성벽에는 작은 암문을 두어 성벽 아래쪽 임진강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연천 호로고루(사적), 임진강 고랑포구 부근 고구려 요새>
<내부>

호로고루성은 출입통로에 해당되는 동쪽을 제외하고는 강안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으며, 동쪽에만 높이 10여m의 석축성을 쌓고 성문을 두었다. 성벽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성벽 위에 올라서면 주변에 장애물이 없어 상류 백제 육계토성과 칠중성이 있는 지역과 하류 고랑포 나루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벽은 장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벽>
<동벽 (남쪽)>
<출입문이 있던 남쪽 성벽>
<동벽 (남쪽), 2012년>
<동벽 (북쪽)>
<안쪽에서 본 모습>
<안쪽에서 본 모습(남쪽)>
<안쪽에서 본 모습(북쪽)>

동벽에서는 고구려군의 독특한 축성방법이 잘 드러나 있다. 기단부에는 판축기법을 이용한 흙으로 쌓은 토축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위쪽으로는 중간크기의 돌로 단단히 쌓은 고구려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성벽 바깥쪽에는 후에 신라가 수리하면서 편마암으로 쌓은 성벽도 있다.

<돌로 쌓은 석축>
<돌로 쌓은 석축>
<돌로 쌓은 석축>

연천 호로고루 동벽
호로고루 동벽은 평지로 이어져 적의 침입이 쉬운 성의 동쪽 부분을 방어하는 성벽이다. 성벽은 높이가 10m이고 아랫부분의 폭이 40m, 길이가 90m에 달할 정도여서 마을 주민들이 성이 아니고 재미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웅장하다. 동벽을 만드는데 들어간 흙과 돌의 양이 대략 15,996㎥에 달한다고 하니 엄청난 토목 공사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 동벽은 고구려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었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이어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자 신라가 짐령하여 사용하였다. 신라군이 점령할 당시 호로고루 동벽은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성벽의 곳곳이 무너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라군은 고구려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벽을 덧붙여 쌓는 방식으로 보수하였는데, 고구려성벽은 신라성벽에 가려져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포대가 설치되면서 성벽의 윗부분과 남쪽 부분이 크게 휘손되었고 고구려 유적으로 알려지기 이전 마을 주민이 뱀을 잡기 위해 중장비로 남쪽 치의 상부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고구려 성벽 일부가 외부로 노출되게 되었다. 소중한 문화유산이 후대의 인위적인 원인으로 훼손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호로고루 동벽은 한 곳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성벽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장소가 되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5년)

호로고루 동벽 남·북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방어시설인 치(雉)가 각각 하나씩 있다. 남쪽 치는 훼손으로 내부 구조가 드러나 성벽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안쪽에는 고구려 때 쌓은 본 성벽과 이를 보호하는 보축성벽, 그리고 바깥에 후대 신라가 편마암으로 쌓은 성벽이 확인된다. 남쪽 치는 네모나게 돌출된 성벽에 반원형 현무암 기초 성벽이 덧붙여진 형태로, 수리 과정에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현무암을 주로 사용했으나, 신라는 다루기 쉬운 편마암을 먼 곳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남쪽 치성>
<북쪽 치성>

호로고루 동벽 남쪽 치(雉)
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앞으로 내어 쌓은 구조를 말하는데, 호로고루 동벽에는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치가 있다. 남쪽 치는 성벽의 상부가 훼손되면서 내부의 모습이 겉으로 들어나 성벽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치의 제일 안쪽 가장 높은 성벽은 고구려의 체성벽으로 바깥쪽에 기대어 쌓은 보축성벽으로 보호되고 있다. 고구려 보축성벽에서 바깥쪽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편마암으로 쌓은 성벽이 보이는데 이는 후대의 신라가 쌓은 성벽이다. 이 성벽 앞으로 네모나게 바깥쪽으로 내어 쌓은 성벽이 있다. 이것이 동벽의 남쪽 치다. 치는 다시 현무암의 기초를 가진 반원형의 성벽으로 다시 둘러져 있는데, 치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성벽은 95%이상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으로 쌓은데 반해 신라 성벽은 주변에서 구하기 어려운 편마암이 사용되었다. 현무암은 돌이 질기고 깨기가 힘들어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 오랫동안 임진강 일대를 지배하며 현무암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한 고구려의 석공들에 비해 새롭게 임진강 지역을 차지한 신라의 석공들은 그 기술을 단기간에 익힐 수가 없어서 다루는데 익숙한 편마암을 멀리서 가져와 성벽을 쌓는 수고를 했다고 한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5년)

성벽은 높이가 10m이고 아랫부분의 폭이 40m, 길이가 90m에 달할 정도이며 임진강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성벽 위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벽 위(남쪽)>
<동벽 위(북쪽)

서쪽으로는 임진강 수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랑포 나루터가 있다. 임진강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대지가 있는 지역으로 임진강 주변에는 물이 흐르면서 형성된 높이 20~30m의 절벽들이 절경을 이룬다. 호로고루 주변의 성벽 또한 비슷한 형태의 절벽이다.

<동벽 위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하류 방향 고랑포 나루터>

호로고루 부근 임진강은 여울목이 형성되어 걸어서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는 첫번째 지점이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이다.

<호로구루 아래 임진강>

동쪽편으로는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감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악산 아래로는 백제가 임진강 방어를 위해 쌓은 육계토성과 신라가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 일전을 벌렸던 칠중성이 있다.

<상류 방향>

호로고루는 임진강과 지천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강안대지에 쌓은 강안평지성이다. 내부는 그리 넓지 않은편으로 군사들이 주둔한 숙영지의 성격이 강한 곳이다. 성벽이 있는 동벽을 제외하고는 높이 15m 정도의 절벽으로 되어 있어 그위에 목책만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벽 중간에 암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벽에서 보이는 호로고루 내부>
<집수시설 터>

집수시설
이 유구는 고구려시대 집수시설로 2011년도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이 집수시설의 동쪽 끝에는 우물이 접해있다. 집수시설의 크기는 동서길이 786cm, 남북길이 720cm, 깊이 3m 정도다. 집수시설은 바닥에 통나무를 다듬은 각재를 네면에 깔고, 그 위에 현무암을 다듬은 석재를 쌓아서 벽체를 조성하였다. 또한 특이하게 바닥에는 여러 겹의 통나무들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부엽층이 1m 정도 덮여 있었다. 집수시설에서는 고구려 토기편. 경질기와편, 적갈색기와편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집수 시설은 용도를 변경하여 계속 사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5년)

<유적터(?)>
<남쪽 절벽 위>
<호로고루 북쪽을 흐르는 개천>
<북쪽 개천 수문 위로 연결되는 길>
<북쪽 절벽과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개천>
<반대방향 절벽과 개천>
<호로고루 내부 서쪽 끝>
<끝에서 보이는 임진강>
<호로고루 내부>
<동벽, 2009년 모습>
<2009년 동벽 바깥에 있었던 돌무더기>
<2009년 동벽 내부>
<연천 호로고루(사적)>

연천 호로고루, 사적
임진강은 구간에 따라 정파강, 구연강, 조강 등 수십 여 개의 이름이 있는데 호로고루가 있는 부근은 과천, 호로하, 표강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호로고루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보면 임진강 하류에서 고랑포까지는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수심이 깊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하지만, 호로고루 부근은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 있어 육로를 통해 평양지역에서 한성으로 가는 최단거리상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국경방어 사령부가 있었고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주변의 행정과 군사를 주관하는 장단군의 읍치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이라 하여 개성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호로고루에서는 두시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첫번째 시기는 고구려 남진 초기의 유구이다. 호로고루에 목책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시설이 구축되었으며, 아직 동벽과 기와 건물은 조성되지 않았다. 두번째 시기는 6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 멸망시기까지의 유구이다.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한 고구려는 임진강을 따라 새로운 방어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덕진산성부터,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임진강을 따라가며 많은 성들이 새로 신축되거나 재정비 되었다. 이때 호로고루에서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성 내부를 평탄하게 조성하였으며, 높이 10m에 달하는 동벽을 구추가는 한편, 성내부에는 여러동의 기와건물과 지하식 벽체 건물을 신축하였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나 유물의 질이나 양적인 면을 고려할 때 호로고루는 주변의 고구려성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위계가 높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호로고루는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약 120여년 동안 임진강 유역을 방어하는 고구려의 국경방어 사령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연천군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연천군청, 2025년
  2. ‘사적 연천 호로고루’,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