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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바래미마을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전통마을인 바래미마을이다.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조선후기 문신 김성구가 입향하면서 마을을 형성했다. 종택이라 할 수 있는 팔오헌 종택을 비롯하여 만회고택, 토향고택, 소강고택, 남호구택을 비롯하여 비슷한 규모의 큰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봉화읍에서 영주 방면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성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마을 고택들의 규모나 형태 등으로 볼 때 대부분 대지주 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 유공자 14명을 배출했다고 하며, 만회고택에서는 김창숙 선생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작성했었다고 한다.

<봉화 바래미마을>
<봉화 바래미마을>

팔오헌 종택은 마을 입향조인 김성구가 17세기에 처음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 이후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건물은 口자형 본채와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오헌 종택>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

팔오헌 종택
팔오헌종택은 조선 후기 문신 팔오헌 김성구가 17세기에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없어졌지만, 그 후손들이 다시 건립하여 지금까지 이어진다. 김성구는 본관은 의성, 자는 덕휴, 호는 팔오헌이다. 큰 공훈을 세워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위로 현재 송록서원에 모신다. 조선 현종 3년1662에 사마시를 거쳐, 현종 10년1669 식년문과에서 가장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무안현감을 시작으로 수원부사, 지평, 수찬, 여주목사, 부승지, 정언, 강원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민생을 잘 헤아렸기 때문에 목민관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되어 조선 숙종대에 청백리 청렴한 관리에 추천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손을 위한 터전을 이곳으로 정하고, 후학을 교육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자형 본채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과 삼문,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화장실이 있다. 전통한옥의 원형과 신문물이 결합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문, 봉화군청, 2025년)

<종택 옆으로 보이는 고택과 마을 서쪽>
<마을로 들어가는 길>

팔오헌종택이 있는 마을 서쪽에는 개암종택, 남호구택을 비롯하여 큰 규모의 저택들이 모여 있다. 이름은 없지만 규모나 형태로 볼 때 비슷한 규모의 고택들이 많다. 후손들이 상당히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안길>
<소강고택과 남호구택 앞 큰 길>

소강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랑채, 안채,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채 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마당도 넓은 저택이다. 지금은 숙박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강고택 대문채>
<안에서 본 모습>
<본채>
<중문이 있는 옆면>
<중문사이로 보이는 안마당>

남호구택은 19세기말에 지어진 큰 규모의 한옥이다.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고 있다. 큰사랑, 작은사랑 등 사랑채가 발달되어 있으며, 대문채에 문간방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손님방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호구택 대문채>
<남호구택>
<남호구택 옆 고택 대문채>
<고택 내부>

마을 중심에는 소강고택, 남호구택과 함께 해와고택, 해저 김건영 가옥 등이 모여 있으며 다른 주택들도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넓은 골목길을 따라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안 큰 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진영이 지은 집이다. 앞면 6칸·옆면 6칸 규모로 비교적 큰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 출입은 오른쪽에 있는 중문으로 하게 하였다.

<해저 김건영 가옥>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 해관 김진영이 지은 집이다. 앞면 6칸· 옆면 6칸 규모로 비교적 큰 □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 출입은 오른쪽에 있는 중문으로 하게하였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는데, 안방 2칸은 마당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공간을 나누어 좌우의 작은사랑과 큰사랑으로 분리시켰다. (안내문, 봉화군청, 2025년)

<마을 큰 길>
<안쪽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골목길 안쪽>

안쪽에 있는 큰 규모의 낡은 한옥인 해와고택은 청하군수를 지낸 김희택의 손자인 김중수가 지은 집이다. 건물은 이 지방의 양반집 배치방법인 ㅁ자형과는 달리 안채와 전면 사랑채 및 중문채가 2개의 ㄱ자형으로 나누어져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해와고택>
<동쪽으로 이어지는 마을 큰 길>
<옛 한옥을 수리한 것으로 보이는 주택>
<마을 골목길>
<마을로 들어오는 큰 길>
<마을 입구>
<마을 입구>
<마을 입구 표지석>

마을 동쪽에는 토향고택, 만회고택 등 큰 규모의 고택들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토향고택 부근 공터>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마을 골목길>

토향고택 안채는 조선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랑채는 19세기말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가 ‘ㅁ’자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19세기 양반 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토향고택 대문채>
<사랑채>
<바깥에서 본 모습>
<토향고택 앞 한옥>
<정자로 보이는 건물>
<정자가 있는 정원>
<동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고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큰 한옥>
<안쪽 골목길>
<만회고택 앞 큰 길>

 만회고택은 마을 안쪽에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해 자리하고 있다. 조선후기 문신 김건수가 살던 곳으로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그의 6대조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구입했다고 한다. 안채는 조선중기 양식을 하고 있으며 사랑채와 중문채는 화려한 누마루가 있는 조선후기 사대부 저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만회고택>
<사랑채>
<바깥에서 본 모습>
<고택 앞 정원>

<출처>

  1. 안내문, 봉화군청,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