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에서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던 사람들은 선비 또는 사대부라 불렸던 사족(士族)들이다. 이들은 유학의 이념과 도덕을 바탕으로 사회를 교화하는 것을 지배계층의 주된 임무로 여겼다. 그들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방안으로 유교경전, 역사 등을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상호 교류하였다.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모시는 서원, 개인적으로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당, 그리고 경치가 뛰어난 곳에 세웠던 크고 작은 정자(亭子)가 대표적인 활동했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비들은 자택에 사랑방을 두고 학문을 익히면서 주변사람들이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선비들의 사랑방은 집안의 생활공간인 안채(본채)와 분리되어 있었으며, 집안의 어른인 가장이 주로 거처하였다. 조선은 유교사회를 표방하였기때문에 근검과 절제를 미덕으로 여겼으며, 사랑방은 외관상으로는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사랑방이 외부 사람들이나 명사들과의 교류 장소인 까닭에 외관상 근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상당히 수준 높은 책자나 물품 등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방에는 선비들이 소중히 다루었던 종이, 붓, 먹, 벼루의 문방사우와 이들을 보관하기 위한 여러 용구들이 있었고, 또한 책자나 서화를 배치하여 간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 2층 전시실에 재현해 놓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사랑방.
앞면 3칸 규모로 온돌방과 마루방, 툇마루가 있는 전형적이 사랑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방 내부에 재현해 놓은 가구들
사랑방 가구배치도.
사랑방 선비의 예술 세계
조선시대 선비들은 학문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학자들이었다. 더불어 그들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시.서.화로 표현해내는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선비들은 그림이나 글씨를 즐겨하였으나 그것이 손재주나 기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문기가 흘러 넘쳐야 비로소 좋은 그림과 글씨가 완성된다고 여겼다. 선비들에게 글씨는 인품의 반영이자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그림 역시 사물의 형태보다 그 내용과 정신을 중시한다는 사의가 반영된 문인화를 전통으로 삼았다. 그리고 시.서.화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능한 사람을 삼절이라고 일컬어 칭송하였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시를 짓고 글씨를 써거 남기고 그림을 그려 서로 돌아가며 감상하는 모임 또한 선비들의 예술 활동의 중요한 전통이었으며, 이러한 모임은 그들의 문화 예술 공간이었던 사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사군자(四君子), 임희지, 1803년, 비단에 먹.
사군자는 선비들의 문인화에 많이 등장하는 주제인데, 이 그림은 붓으로 간략하게 그렸음에도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임희지는 한어 역관으로 활약한 문인화가로 조희룡의 <호산외기>에 의하면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한다. 문인화가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즉, 사군자를 소재로 한 그림을 즐겨 그렸다. 매화는 이른 봄 추위에도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은은한 향기를 멀리 퍼뜨리고 국화는 늦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고 대나무는 겨울에도 푸름을 유지하는 자연적 특성을 선비의 곧은 정신에 비유하여 그들의 시나 회화의 소재로 애호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세한도(歲寒圖), 권도인, 19세기, 종이에 먹.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그렸던 그림이 유명한데 이 그림은 문인화가인 권도인이 그린 그림이다. 그림 한편에는 권돈인이 쓴 글과 추사 김정희가 추천의 의미로 쓴 글이 있다.
권돈인은 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서화가로 김정희와는 평생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세한도>는 추위가 온 뒤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는 <논어>의 글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세한도라는 예서체의 제목에 이어 그림이 펼쳐지고 그림 왼쪽에 권돈인의 제발과 김정희의 발문이 적혀 있다. 간명한 구도와 넘치듯 배어 있는 문기 등 그림의 내용과 정신을 중시하는 사의를 지향하는 남종문인화의 전통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전적벽부> 인보, 조선
중국 송나라의 소식이 지은 <전적벽부>를 인장에 새겨 찍은 후 만든 첩이다. 옛 문인들은 이렇게 전각 작읍을 하여 아름다운 시구를 즐기곤 하였다. <전적벽부>는 소식이 적벽대전의 영웅인 조조와 주유를 회상하고 인생과 자연의 의미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출처: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 인장, 19세기. 추사 秋史(김정희의 대표적인 호),
김정희인 金正喜印, 완당 阮堂 (청대학자 완원을 존경하여 지은 당호), 솔진 率眞 (성실하여 거짓이 없음) 등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종가에서 전래된 인장이다. 인장을 새기는 작업을 전각이라고 하는데, 인장에는 자, 호, 이름, 그리고 좋은 글귀들을 새겨 넣는다. 인장은 직접 새겨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각의 대가에게 부탁을 해서 새겨 받겨나, 선물을 받는 경우도 많다. <출처:중앙박물관>
허목 인보, 조선.
허목(1591~1682)은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문보, 화보 호는 미수이다.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고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의 제 1인자로 칭송받았다. 이 인보는 허목의 여러 도장을 찍어 모아 만든 책으로 전해진다.<출처:중앙박물관>
사랑방 가구
사랑방은 조선시대 한 집안의 남자 주인인 가부장의 생활공간이었다. 이곳은 학문을 연마하는 서재 즉 문방(文房)이자, 남성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사랑방은 주인인 사대부나 선비의 높은 안목과 세련된 취향에 맞도록 꾸며졌다. 이들은 사회 지배층으로서 청빈을 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가구도 검소하고 격조가 높은 것을 선택하였다. 재료로는 광택이 없으며 시각적으로 부드럽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소나무, 오동나무를 주로 사용하였다. 또 느티나무와 먹감나무를 장식으로 이용하여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살리기도 하였다. 사랑방에서 사용한 가구는 적은 책상인 서안(書案), 서류.문방구.책 등을 놓아두는 문갑과 사방탁자, 책장 등이 대표적이다. 또 종이.붓.먹.벼루를 모아 두는 연상(硯床), 두루마리를 꽂아두는 지통(紙筒), 필통, 고비(편지꽂이), 붓걸이도 문방생활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이밖에 목칩, 망건통, 팔걸이 등도 사랑방에서 빠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삼층 책장(19세기, 왼쪽), 사층 사방탁자(19세기, 오른쪽)
삼층책장,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과 예술의 공간이었던 사랑방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다. 따라서 주인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책장이 마련되었다. 보통 기둥은 책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였고 판재는 책에 좀이 스는 것을 막기 위해 습도 조절이 잘 되는 오동나무를 사용하였다. 이 책장의 문은 오동나무 판재의 표면을 인두로 지지고 볏짚으로 문질러 나뭇결이 드러나게 하는 낙동법으로 제작되었다. 낙동법을 사용하여 나타난 어두운 색감이 검은 칠을 한 것 보다 은은하고 점잖은 느낌을 준다. 사층 사방탁자. 책이나 도자기, 수석과 같이 즐겨 보는 작은 물건을 올려 놓은 가구이다. 옛것일수록 3층이 많고 후대로 올수록 4층으로 만들었는데 한 층에 문이나 서랍을 달아 보관의 기능을 높였다. 탁자의 사방이 트여 낮고 좁은 한옥 내부에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간결한 구성과 쾌적한 비례로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가구로 평가받는다.<출처:중앙박물관>
이층 책장(19세기, 왼쪽). 책장(조선후기, 오른쪽),
책장은 평소에 읽는 책들을 넣어두는 가구로서 사랑방의 주인이 선비였던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책장(오른쪽)은 책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천판과 측널은 사개물림으로 짜여있다. 복판은 오동나무이며 나머지는 소나무로 만들었다. 키가 작고 단순한 형태로 사랑방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상(輕床), 19세기,
경상은 원래 사찰에서 스님들이 사용한 책상이지만, 사랑방에서도 작은 책상인 서안(書案) 대신 사용하였다. 상의 양 끝이 감겨 올라가고, 조각 장식을 붙인 상의 양 끝은 두루마리나 병풍처럼 접혀진 책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직선적인 서안에 비해 장식적이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안(書案), 19세기
서안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책상으로 사용한 가구이다. 온돌과 마룻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한옥에 맞게 높이가 낮고 책 하나가 펼 정도의 작은 크기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글을 읽을 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서안의 장식을 최대한 절제하였다. 따라서 서안은 대부분 천판과 다리 판으로 구성된 단순한 모양으로, 담백하고 격조가 높은 것이 선택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삼층탁자(조선 19세기), 오층탁자(조선 19세기)
삼층탁자, 책이나 여러가지 문방용품을 올려 놓았던 탁자이다. 맨 아래층에 서랍과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중요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닫이문과 서랍의 문판에는 검은 먹무늬가 들어 있는 먹감나무 판재를 대칭으로 사용하여 추상적이면서도 나뭇결 자체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
문갑(文匣), 조선 19세기,
문갑, 조선 19세기
문갑은 서류나 여러가지 문방용품을 놓아두는 가구로 대개 방의 뒤뜰로 난 창문 아래에 놓였다. 창문을 가리지 않는 낮은 높이로 벽면에 시원한 여백을 주고 폭을 좁게 하여 많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 문갑은 5칸에 3개의 서랍이 달린 단순한 서안 형태로 천판에는 필통이나 연적 같은 소품을 올려 놓는 장식성이 강한 문갑이다. 방을 정리하는 기능의 문갑은 선비들의 깔끔하고 단정한 생활에 어울리는 가구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목침(木枕), 조선 19~20세기초
십장생 무늬 팔걸이(조선 19세기), 팔걸이(조선 19세기), 목침(조선 19~20세기초), 십장생무늬 목침(조선 19세기)
십장생무늬 팔걸이는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을 때 팔을 받치는 받침대이다. 궤상(机床), 의침(依枕), 완침(腕枕)이라고도 한다. 위의 판과 아래 판을 연결하는 다리 판에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무늬를 뚫어 새겼다. <출처:중앙박물관>
나전 칠 포도무늬 서류함, 조선 17~18세기
서류함, 조선후기
서류함, 19세기
함(函, 조선 19세기), 서류함(19세기),
문방사우
조선시대 선비들의 서재 즉, 문방(文房0에서 사용한 물건 중 종이, 붓, 먹, 벼루 이 네가지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한다. 이것을 문방 필수품으로 생각하는 전통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문방의 벗’이라는 의미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문방사우는 선비들이 애정을 갖고 소중히 다루는 필수품이었으며, 뜻이 맞는 벗들이 주고 받는 의미있는 선물이기도 하였다. 문방사우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보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품이 함꼐 사용되었다. 종이와 관련된 것으로는 책장이나 고비(편지꽂이), 두루마리를 꽂아 두는 지통(紙筒) 등이 있으며, 붓은 필통.붓걸이(筆架).붓받침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또 먹은 먹집(墨匣).먹받침(墨床) 등과 함께 사용되었고, 벼루는 연상(硯床)이나 벼루집(硯匣) 등에 보관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벼루(硯, 조선후기), 연상(硯床, 조선 19세기)
먹(墨), 조선후기
백자 청화 도마뱀 모양 장식 묵호(조선 19세기), 백자 양각 매화무늬 연적(조선 18~19세기)
포도 다람쥐 무늬 필통(조선 19세기), 십장생무늬 필통(조선 19세기), 파도 물고기 무늬 필통(조선후기)
백자 청화 산 동물 모양 필격, 조선 19세기
고비(考備, 편지꽂이), 상아 붓(毛筆, 조선후기)
시전지판(詩箋紙板, 조선 19세기), 시전지(詩箋紙, 시나 편지를 쓸때 사용하는 종이)
시전지판.
시전지
십장생 무늬 지통(紙筒), 조선 19세기
서안(書案), 조선 19세기
연상, 조선 19세기
포도무늬 벼루, 조선후기
안방가구
조선시대 한 집안의 안주인이 거처한 안방은 유교의 윤리관에 따라 외부와 격리된 공간이었다. 이곳은 여성들이 자녀를 기르고 집안 살림을 이끌어 나가는 곳으로 온화하고 안정된 분위기로 꾸며졌다. 따라서 단순하고 검소한 분위기의 사랑방 가구와는 달리 밝고 따뜻한 느낌의 가구가 사용되었다. 안방 가구는 나뭇결이 아름다운 느티나무.먹감나무.물푸레나무를 주로 사용하였고 나전(螺鈿)이나 화각(華角)으로 장식하기도 하였다. 무늬가 거의 없는 사랑방 가구와는 달리 꽃.새와 같은 여성 취향의 것이나 개인과 가정의 부와 복(福), 장수(長壽),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길상(吉祥)무늬, 십장생무늬가 사용되었다. 안방의 가구로는 의류와 직물을 넣어 두었던 장(欌)과 농(籠) 등이 대표적이다. 또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머릿장이나 문갑,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함과 상자, 바느질 도구를 모아 두는 반짇고리도 갖추었다. 화장 도구를 보관하는 빗접과 경대(鏡臺) 역시 안방에서 빠질 수 없는 가구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삼층장(조선 19세기),
옷이나 옷감, 솜 등을 보관하는 가구이다. 농과는 달리 옆판을 한 판으로 하여 각 층이 분리되지 않도록 만들고, 천판은 몸체보다 튀어나게 만든 차이점이 있다.이층농(조선 19세기), 옷이나 옷감, 솜 등을 보관하는 가구로 안방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용도의 가구로는 장과 농이 있는데 농은 장과는 달리 각 층이 분리되고 양 옆판에 손잡이를 달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화각함(華角函), 조선 19세기,
화각은 얇게 편 소의 뿔로 만든 판에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것이다. 어린 소의 뿔을 편 다음 일정한 크기의 사각으로 얇게 갈아 만든 각지 위에 광물성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그림이 그려진 면을 물건 표면에 붙여 장식하였다. 각지는 시간이 지나면 약간 노랗게 변색되어 부드럽고 화사한 느낌을 주어 주로 여성용품에 이용되었다. 작은 상자 제작에도 수십개의 쇠뿔이 필요하고 일일이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귀한 공예품이었다. 십장생, 용, 봉황, 모란, 물고기 등 부귀와 복을 상징하는 무늬가 주로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머릿장(單層欌), 조선 18세기, 머릿장, 조선 19세기
머릿장은 방의 머리맡에 두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단층장이다. 천판 위에는 애완품이나 작은 물건을 올려 놓기도 하였다. 사랑방에서 사용한 머릿장은 천판 아래에 서랍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여닫이문을 장치한 공간을 만들어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탁자장(卓子欌, 왼쪽, 조선 19세기), 머릿장(오른쪽, 19세기)
탁자장은 탁자와 장의 기능을 함께 갖춘 가구이다. 3면이 막히고 앞면이 트인 위층에는 책을 올려놓았다. 또 여닫이문을 달아 장의 형태로 만든 아래층에는 가까이 두고 사용하는 물건을 보관하였다. 이 탁자장은 간단한 장석(裝錫, 물건의 사용을 편리하게 해 주거나 힘을 보강해 주는 금속)과 단순한 나뭇결이 어우러져 검소하고 소박한 사랑방 가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약장(藥欌), 19세기
한약재를 종류별로 보관하는 서랍이 달린 장이다. 한학에 능통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간단한 약 처방을 할 수 있어 집에 한약재를 갖추고 가족의 병을 치료하였다. 각 서랍은 약재가 섞이지 않도록 두세개의 칸막이로 나누고 서랍 문에는 약재 이름을 써 넣었다. 큰 서랍에는 자주 사용하는 약재를 넣고 극약은 자물쇠가 달린 서랍이나 장에 보관하였다. 같은 크기의 서랍이 나란히 배열되어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준다.<출처:중앙박물관>
부엌가구
조선시대 가옥에서 부엌은 방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음식을 장만해서 방으로 운반하여야 했다. 따라서 부엌가구는 크게 부엌에서 사용된 종류와 음식을 나르고 동시에 밥상으로도 사용된 소반으로 나뉘다. 부엌의 기본 가구는 그릇과 음식을 보관하는 찬장과 찬탁으로, 무거운 놋그릇이나 사기그릇의 무게를 견디고 습기에도 강한 나무를 사용하였다.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는 무게를 감당하고 곡식이 상하지 않도록 바람이 잘 통하고 벌레의 해를 방지할 수 있는 나무를 선택하였다. 이러한 부엌 가구들은 두꺼운 판재와 굵은 기둥으로 구성되어 단순하면서도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출처:중앙박물관>
삼층 찬탁과 함지, 19세기.
삼층찬탁은 그릇을 얹어 두는 탁자로 부엌에 딸린 마루나 대청에 두고 사용하였다. 그릇을 말릴 때 생기는 습기에 강하고 단단한 소나무를 주로 사용하였다. 또 무거운 그릇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기둥을 굵게 만들고 층널도 두껍게 만들었다. 이 찬탁은 중간 층에 장을 설치하여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큼직한 문판의 나뭇결과 네모난 경첩이 굵은 기둥과 어울려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함지는 떡, 과일이나 그릇을 담아 두고 옮기는데 사용한 것이다. 여러 개의 나무 판을 연결해서 밖으로 벌어지는 형태로 만들며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였다. 주로 튼튼한 대추나무나 박달나무로 만들었다.<출처:중앙박물관>
소반(小盤)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방에 놓고도 사용하는 작은 밥상을 소반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가옥은 부엌과 방이 떨어져 있었고 음식 그릇으로는 무거운 놋그릇이나 사기그릇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소반은 옮기기 편하고 그릇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단단한 판재를 얇게 켤 수 있는 나무가 사용되었다. 또 한 사람이 상 하나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집마다 크기가 작은 여러 개의 소반이 마련되어 소반의 숫자로 그 집안의 위세와 생활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쓰임새, 다리나 천판의 모양, 생산지역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전한다.<출처:중앙박물관>
호족반(虎足盤, 호랑이 다리모양 소반), 조선 20세기,
다리의 윗부분이 밖으로 휘어졌다가 안으로 구부러져 내려오면서 ‘S’자형을 이룬 후, 발끝이 살짝 밖으로 내밀린 형태의 소반이다. 호랑이 다리처럼 유연하면서도 힘차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전라남도 나주에서 만든 나주반에 이러한 형태가 많다. 천판(天板)은 12각이며, 밑면에 ‘삼각뎡’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삼각뎡’은 기증자의 집이 있었던 ‘삼각정(三角町)’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 중구 삼각동의 일제강점기 때 명칭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해주반(뒤 왼쪽), 호족반(뒤 오른쪽), 개다리소반(앞 오른쪽), 나주반(앞 가운데), 통영반(앞 왼쪽).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의 소반이 만들어졌다.
해주반(19세기), 황해도 해주 지역에서 만든 소반이다. 통판으로 된 직사각형 전면은 모서리를 둘글리거나 모를 잘라냈으며 가장자리는 따로 대지 않았다. 다리는 두개의 넓은 다리 반을 바깥쪽으로 붙였다. 다리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뚤어새겨 다른 지역 소반에 비해 부드럽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호족반(19세기), 다리의 윗부분이 밖으로 휘어졌다가 다시 안으로 구부려져 내려오면서 유연한 s자형을 이룬 후 발끄팅 살짝 내밀린 형태의 소반이다. 호랑이 다리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맹수의 다리처럼 유연하면서 힘차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개다리 소반(19세기). 각이 선 다리가 밖으로 벌어지면서 내려오다가 가늘게 안으로 오므라든 형태의 소반이다. 그 모양이 개의 다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는데 충청북도 충주 지방에서 주로 만들어져 충주반이라고도 한다. 각이 진 힘찬 다리 모양은 소반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다른 가구에서도 볼 수 있다. 나주반(19세기). 전라남도 나주 지역에서 만든 소반이다. 천판은 네모서리의 모를 잘라 낸 형태이고 가장자리는 홈을 파낸 나무를 올려 뒤틀림을 막았다. 다리는 운각에 물려 있고, 중간에 가락지라는 중간대가 있어 힘을 받쳐 주고 있다. 다른 지역 소반에 비해 간결한 느낌을 준다. 통영반(19세기). 경상남도 통영 지역에서 만든 소반이다. 통판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천판은 네 모서리를 둥글린 형태이고 천판에 다리를 바로 연결하였다. 천판과 다리 사이에는 풀무늬가 조각된 판인 초엽을 대고 그 아래에 윗중대를 둘러 고정시켰다. 다리 중간에는 아랫중대를 둘러 힘을 받쳐 주었다. 이 통영반은 일반적인 통영반과는 달리 네 모서리를 귀접이 하고 초염을 아亞자 무늬로 뚫어새겨 장식하였다.<출처:중앙박물관>
사당가구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사회 질서의 중심이었던 조선시대에 충효는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시된 덕목 중의 하나였다. 특히 ‘효’라는 사회 윤리규범은 살아계신 어버이는 물론 돌아가신 조상님들도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지극한 정성으로 모실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말에 도입된 가묘제도가 조선 초기에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양반집에서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건물인 사당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사당에서 사용한 가구에는 신주을 안치하는 장인 감실과 주독, 향안 등이 있다. 이러한 가구들은 일반 생활 목가구와는 달리 격식을 갖추고 예를 올리기 위해 특별한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검은 칠을 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사당 가구는 집안 대대로 전해져 사용되었으며 낡아도 내다버리지 않고 땅에 묻을 정도로 소중히 다루었다.<출처:중앙박물관>
의례서에 보이는 사당의 모습과 실제 예, 사당지도(왼쪽, 허전, 1870년, 『사의(士儀)』, 경북 안동 농암 종가의 사당 전경(오른쪽)
사당감실지도(왼쪽, 김장생, 1599년, 『가례집람(家禮輯覽)』), 전남 해남 고산 종가의 사당 내부(오른쪽)
사당 가구의 사용모습
교의(交椅)와 향탁(香卓)
교의는 신주나 신주를 넣어두는 독을 모시는 의자 모양의 가구이다. 제사를 지낼 때는 교의, 제상, 향탁을 함께 사용하는데, 교의는 그 앞에 놓여진 제상과 향탁보다 높아야 하기 때문에 다리를 길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교의(오른쪽). 교의에서 신주가 놓여지는 신좌 부분은 영혼을 모시는 상징적인 곳으로 좁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교의의 신좌는 다른 것들에 비해 넓게 만들어졌다. 신좌 등받이 윗부분에는 원형 판 3개로 장식하고 그 위에 화형 및 곡선으로 깎아낸 가로대를 대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비교적 단순하여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향탁은 향안 또는 향상이라고도 하며 위에 향로나 향합을 올려둔다. 향탁은 제사를 지낼 때 제상 파에 놓되 높이는 제상보다 낮게 만든다. 중간에 서랍을 달거나 층널을 얹기도 하는데, 이 향탁에는 서랍이 설치되어 있다. 돌아가신 분의 혼을 모시기 위한 것인 만큼 검소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풍긴다.<출처:중앙박물관>
감실(龕室), 19세기
사당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셔두는 장으로 신주장이라고도 한다. 조상의 넋을 모시는 곳이므로 생전에 살던 공간과 마찬가지 의미로서 집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받침대, 몸체,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감실은 내부에 두개의 칸이 있어 두분의 신주를 모셨음을 알 수 있다.<출처:중앙박물관>
독(櫝) 안에 신주를 모신 감실 내부(안동 악봉종가)
조선의 목가구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윤리관에 따라 남녀의 생활공간이 사랑방과 안방, 부엌 등으로 분리되어 각 공간 특성에 맞는 다양한 목가구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목가구는 한옥의 좁은 실내와 낮은 천장을 고려하여 대부분 작고 단순하게 만들어졌다. 재료로는 단단한 소나무.느티나무.은행나무 등을 기둥재(骨材)로, 오동나무.먹감나무 등을 판재(板材)로 사용하였다. 대나무 또는 엇갈리거나 소용돌이 무늬가 있는 나무의 뿌리부분 등은 장식재로 활용하였다. 목가구 제작에는 사계절의 온습도 변화에 따른 변형을 막기 위해 기둥재로 면을 나누고 여기에 홈을 파서 판재를 끼워 넣는 짜임과 이음의 방법이 이용되었다. 또 더욱 튼튼하게 결합되도록 꼭 필요한 부분에만 접착제와 대나무못을 사용하였다. 이는 간결한 선과 명확한 면 분할이 특징인 조선 목가구 제작에 필수적인 방법으로, 겉으로드러나는 아름다움과 보이지 않는 내부 구조를 함께 고려한 격조 높은 기법이었다. 목재의 결합부위에 힘을 보강하고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장석(裝錫)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나 나무의 질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만 사용되어 간결한 조선시대 목가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목가구에 사용된 나무의 종류,
목가구에 사용되는 나무는 힘을 받는 기둥재(骨材), 널판으로 사용하는 판재(板材),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장식재로 나뉜다. 기둥재는 곧고 단단한 나무의 곧은결로, 판재는 무늬가 뚜렷한 나무의 눌결로 만든다. 장식재는 소용돌이나 엇갈린 무늬가 있는 뿌리 부근의 근재(根材), 대나무 등을 사용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짜임과 이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목가구는 주로 온돌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온.습도의 변화에 따른 수축과 팽창, 뒤틀림과 터짐을 방지하는 방법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넓은 판재보다는 단단하고 가느다란 기둥재로 면을 나누고 기둥재에 홈을 파서 판재를 끼워 넣어 환경변화에 따라 목재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짜임, 판재와 판재, 판재와 기둥재와 쇠목(두 기둥 사이에 가로대는 나무)의 결합에 쓰이는 방법.,
* 이음, 필요한 크기의 목재가 없을떄 목재끼리 이어 쓰는 방법
장석(裝錫),
일정한 기능을 하도록 목가구에 부착하는 금속 장식을 장석이라고 한다. 장석은 문을 여닫거나 물건을 들어 옮기는 등의 기능과 목재의 결합부분, 모서리에 힘을 보강해 주는 기능뿐만 아니라 목가구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의 효과도 있었다. 무쇠, 주석, 백동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복을 기원하는 박쥐무늬나 수(壽), 복(福)과 같은 글자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랑방(舍廊房),
조선시대는 국가통치이념인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의 역할과 지위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따라서 한 집안 내에서도 남녀의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안방과는 별도로 남성이 거처하는 사랑방이 마련되었다. 특히 선비들에게 있어서 사랑방은 주거 공간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선비들은 유학의 이념과 도덕을 바탕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사회를 교화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학문을 연마함과 동시에 시(詩).서(書).화(畵)의 예술 활동을 필수 교양으로 여기고 소홀히 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랑방은 학문을 연마하는 문방이자 예술활동의 공간, 더 나아가 뜻이 맞는 벗들과의 교유장소가 되었다. 사랑방은 학문과 예술의 장소인 동시에 주인의 안목과 격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선비들은 사회지배층이지만 부귀를 나타내는 화려함을 속된 것으로 여겨 사랑방 역시 단정하면서도 깔끔한 멋이 배어날 수 있도록 꾸몄다. 특히 사랑방 목가구는 번잡한 장식이나 과다한 배열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선비의 취향에 맞게 간결한 선, 단순한 구조, 쾌적한 비례를 고루 갖춘 것이 선호되었다. 이와 함께 사랑방에 갖추어 놓고 사용하는 기물 중 소중히 다루었던 것은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의 문방사우였으며, 이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보관하기 위한 여러가지 용품도 함께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과 예술세계의 중심지였던 사랑방은 깊이 있는 내면생활을 추구하였던 그들의 격조와 품위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