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 2층 1번째 전시실인 “조선의 국왕”이다. 국가의 정점이자 상징이었던 국왕이 조선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왕은 국왕을 상징하는 존재로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후손들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왕의 즉위부터 사후까지, 왕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의례용품과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왕을 상징하는 인장인 어보,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 왕이 공식행사나 일상생활에 입었던 복식,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선원전과 관련된 등이 있다.

어보와 어책
어보(御賣)는 조선 왕실이 의례용 인장으로, 대표적인 왕실의 상징물이다. 왕비, 왕세자 등을 책봉하거나 덕을 기리는 이름을 올릴 때 지위와 이름을 어보에 새겼다. 어책은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으로, 공덕을 칭송하는 글이나 국왕의 훈유(訓諭)를 담았다. 어보와 어책은 받는 사람의 지위와 의례의 격에 따라 재질이 달랐다. 국왕과 왕비의 어보와 어책은 사후에 종묘 신실에 봉안되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나타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어보(御寶)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를 올릴때 제작되어 사용하던 도장이다. 어보는 도장, 도장을 담는 함인 보통, 보통을 담는 보록, 이를 싸는 보자기와 끈 등으로 구성된다. 도장은 원래 거북모양으로 장식했었는데,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에서는 용으로 바뀌었다. 왕과 왕비는 금으로 만든 금보 (金寶), 왕세자나 세자빈은 은으로 만든 은보 (銀寶)를 제작했으며 필요시 옥으로 만든 옥보 (玉寶)도 제작되었다.



태조에게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칭호인 시호를 추가로 올리며 만든 금보다. 기존의 시호 ‘강헌康獻 지인계운至仁啓運 성문신무聖文神武’에 태조가 왕이 되기 이전의 업적인 위화도 회군을 칭송하는 의미의 ‘정의광덕正義光德 네 글자를 더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금보는 ‘천명(天命)을 받은 통치자’라는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조선시대는 생전에는 주로 옥보를 사용했으며 사후에 존호를 올릴때 금보를 제작해서 종묘에 모셨다.

세종이 승하하자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칭호인 시호를 올리며 만든 금보다. 시호는 ‘영문예무英文睿武 인성명효 仁聖明孝 ‘,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칭호인 묘호는 ‘세종世宗’이라 하고 금보에는 시호만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성종이 승하하자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칭호인 시호를 올리며 만든 금보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칭호인 묘호 ‘성종成宗’과 시호인 ‘인문헌무仁文憲武 흠성공효欽聖恭孝’를 금보에 함께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숙종에게 덕을 칭송하는 이름인 존호를 추가로 올리며 만든 금보다. 1713년 올린 ‘현의광른顯義光倫 예성영렬 睿聖英烈’, 1720년 올린 ‘장문헌무章文憲武 경명원효敬明元孝’와 함께 새로운 존호 ‘유모영운裕謨永運 홍인준덕洪仁峻德’을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영조(재위 1724~1776)가 승하하자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칭호인 시호를 올리며 만든 금보다. 시호는 ‘익문선무翼文宣武 희경현효熙敬顯孝’,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라 하고 금보에는 시호만 새겼다. ‘영조英祖’는 1890년(고종 27) 다시 올린 묘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외함은 나무로 만들고 가죽을 씌운 뒤 붉은 칠을 했으며 보록(寶盝)이라 부른다. 바깥에는 겉을 씌우는 케이스이니 호갑(護匣)이 있었다. 보록은 주로 소나무로 오동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소가죽을 씌웠다, 붉은 주칠은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으며 모서리에는 구리와 철로 만든 장석을 달았다.

함의 겉면이나 금속 장식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문양들이 새겨졌다. 만자문(卍)은 끊임없는 번영을 상징하며, 거북, 소나무 등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문양을 새겨 왕실의 영원함을 기원했다.





어보를보호하던 보관함은 조선 왕실 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 보통 2,3중의 포장 구조를 가진다. 내함은 구리에 금도금을 한 상자로 보통(寶筒)이라 부른다.

옥보(玉寶)는 말 그대로 옥(玉)으로 만든 어보를 의미한다. 주로 ‘현직 왕과 왕비’ 혹은 ‘상왕과 대비’ 등 어른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조선 전·중기의 국왕들은 외교적 격식 때문에 생전에 금보 대신 옥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이후 금보를 다시 제작하였다.





왕세자나 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주로 은으로 만든 인장(銀印)을 수여했다. 왕을 상징하는 재질은 금이나 옥이었던 반면,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에게는 은을 사용하여 격의 차이를 두었다. 왕세손의 책봉 시에도 은인을 사용했으며, 간혹 신분에 따라 사후에 공덕을 기리며 올리는 어보를 은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죽책(竹冊)은 대나무 쪽을 엮어서 만든 문서이다. 왕실에서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등을 임명(책봉)하거나 비빈에게 존호를 올릴 때, 그 취지와 칭송하는 내용을 새겨 넣은 것이다. 대나무의 ‘변하지 않는 절개’와 ‘강인함’을 상징하며, 왕실의 기록을 영구히 보존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보(御寶)는 조선 시대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을 말한다. 단순히 서류에 찍는 실무용 도장이라기보다, 왕이나 왕비의 덕망을 기리고 그 지위를 공인하는 ‘상징물’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생전에는 궁궐에 보관하다가, 죽은 후 그 업적을 기리며 종묘에 함께 봉안되었다.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국새와는 달리 일부를 제외하고는 총 366점 중 323점이 남아 있다. 현재 조선 왕실의 어보와 어책은 그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옥책(玉冊)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보(도장)와 짝을 이루는 ‘옥으로 만든 공식 문서이다.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 시호, 휘호를 올릴 때 그 배경과 칭송하는 글을 옥판에 새겨 엮은 것이다.








어보의 바닥면에 새겨진 글씨를 인문(印文)이라고 한다. 이 글씨들은 단순히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신분, 업적, 그리고 사후의 영광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주로 전서체(篆書體)를 사용한다. 꼬불꼬불하고 기하학적인 모양의 서체로, 인장 예술의 정수로 꼽히며 위조 방지와 권위 상징에 제격이다.








어보에 새기는 이름
어보에는 지위와 함께 존호尊號, 시호諡號, 묘호廟號 등 다양한 이름을 새겼다. 존호는 왕의 공덕功德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이름이다. 시호는 왕이 승하하면 생전의 업적을 평가해 올리는 이름으로, 신하들이 지어 올리는 것과 중국으로부터 받는 호칭 두 가지가 있다. 묘호는 삼년상을 마치고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이름이다. 국왕은 신하들에게 존호를 받아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선대왕에게 존호를 올려 왕실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어좌는 국가 그 자체와 통치권을 상징하는 공간적 중심이다. 궁궐 정전이나 편전 내부 북쪽 정중앙에 배치된다. 바닥보다 높은 단(壇) 위에 설치되어,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보게 함으로써 국왕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어좌 위에는 마치 작은 집처럼 생긴 정교한 지붕 구조물이 있는데, 이를 당가(唐家, 닫집)라고 한다. 닫집은 어좌를 독립된 신성한 구역으로 분리해 준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래 기독교, 불교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국왕의 의자인 어좌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붉은 칠을 한 후, 금색 용과 구름을 그리고 모서리에 용머리를 장식해 위엄을 더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었던 <태조 어진>에 그려진 어좌와 형태, 무늬가 동일하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어좌 뒤에는 반드시 해와 달,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병풍이다. 해와 달은 음양의 조화를, 다섯 봉우리는 오악(五嶽)을 상싱한다. 국왕이 완성된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보여준다. 음양오행설이 잘 반영된 부분이다.

국왕의 자리 뒤에 놓는 병풍이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그려져 있어 <일월오봉도>라고 한다. 궁궐의 정전, 편전과 같은 국왕의 집무 공간을 비롯해 국왕이 행차하는 모든 곳에 함께 놓여 권위를 높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보개(寶蓋)는 어좌(임금의 의자) 바로 위 천장에 설치된 화려한 지붕 장식을 의미한다. 보개에는 상징 동물인 ‘용(龍)’과 ‘봉황(鳳凰)’이 표현되어 있다. 용은 임금 그 자체를 상징하며, 봉황은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정전이나 편전에서 국왕의 자리 천장에 설치되던 보개다. 특히 정전에는 지붕과 좌탑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당가에 어좌를 두고 바로 위 천장에 보개를 두었다. 보개에는 국왕의 상징인 용을 화려하게 장식해 신성과 위엄을 강조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국왕의 상징
국왕이 머무는 공간과 의례, 생활용품에는 국왕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임을 나타내는 여러 상징들이 표현되어 있다. 국왕의 의자인 어좌가 놓이는 공간은 당가(唐家)로 화려하게 장식해 국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당가의 상부는 보개로 덮고,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이나 봉황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조각했다. 어좌 뒤에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를 묘사한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두어 왕권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했다. 또한 오로지 국왕만이 입을 수 있는 복식을 따로 정해 위엄과 권위를 나타냈다. 국왕의 모습을 그린 어진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제작되었고, 어진을 모시는 전각인 진전에 보관되어 정통성을 상징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의(衣)와 중단(中單)은 제례복이나 혼례복처럼 가장 격식이 높은 옷을 입을 때 갖춰 입는 핵심적인 구성 요소이다. ‘의’는 가장 바깥에 드러나는 겉옷을 의미한다. 왕의 면복에서는 ‘현의(玄衣)’라고 부르는 검은색 상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현의에는 왕의 권위와 덕목을 상징하는 다섯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다. 중단은 안에 받쳐 입는 속적삼을 말한다.

광택 없이 얇게 짠 옷감인 은조사(銀條紗)로 만든 의와 중단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바탕 전체에 작은 크기의 마름모형 무늬를 넣어 짠 옷감인 순인으로 만든 중단과 순인에 섬세한 무늬를 짜 넣은 옷감인 갑사(甲紗)로 만든 의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0
국왕의 최고 예복, 면복의 구성품 ‘의’와 ‘중단’, 조선
국왕과 왕위 계승자가 입는 가장 격식 있는 예복인 면복의 구성품인 의와 중단이다. 의는 면복 차림을 할 때 가장 겉에 입는 옷이고 중단은 그 안에 받쳐 입는 옷이다. 의에는 양쪽 어깨와 등, 뒤쪽 소매 부리에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입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무늬의 종류와 개수가 달랐다. 왕은 용, 산, 불꽃, 꿩, 종묘 제사용 술잔 종이(宗彝), 총 다섯 가지 무늬가 그려진 의를, 왕세자는 불꽃, 꿩, 종이 세 가지 무늬가 그려진 의를 입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국왕의 복식
조선의 국왕은 참여하는 행사의 격에 맞는 복식을 갖춰 입음으로써 권위와 위엄을 보였다. 의례 때는 면류관(冕旒冠)에 곤복(衰服)이나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일상 집무 때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 궁궐 밖을 행차할 때나 군사의례에 참여할 때는 융복(戎服), 군복(軍服), 금갑(金甲) 등을 입었다. 이 중 면류관과 곤복으로 이루어진 면복(冕服)은 가장 격식 있는 예복으로, 국왕과 왕위계승자만 입을 수 있는 특별한 복식이었다. 곤복의 상의와 하의에는 국왕의 덕목과 권위를 상징하는 무늬를 그리거나 수놓아 국왕으로서의 책임을 일깨우고 위엄을 나타냈다. 국왕은 즉위식, 가례(嘉禮), 종묘대제(宗廟大祭), 대조회(大朝會)등 가장 중요한 의례를 행할 때 면복을 입어 행사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말로,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 어진은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만들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조대부터 마지막 순종대까지 만들어졌으며 진전이라는 건물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살아있을 때 직접 그리는 경우도 있으며, 죽은 후에 기억으로 그리거나 이미 있는 어진을 보고 그리는 방법 등이 있다. 어진은 진전이라는 건물에 모셨는데, 진전은 궁궐 정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전전이 창덕궁 선원전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재위 1724~1776)의 어진이다. 1900년 경운궁 선원전 화재로 소실된 일곱 왕의 어진을 채용신(1850~1941)과 조석진(1853~1920) 등이 새로 모사했는데 그중 하나다. 수염이 희끗한 51세 때 영조의 모습을 그린 반신상으로, 익선관을 쓰고 붉은 곤룡포를 입고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교의(交椅)란 ‘다리가 교차(X자형)하는 의자’라는 뜻이다. 국왕의 야외용 의자나, 왕실의 제사용 의자로 만들어졌다.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올린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사용하던 교의다. 좌판의 너비가 깊이에 비해 긴 것은 어진의 폭에 맞춰 제작했기 때문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어진함은 어진을 봉안하는 함으로 의궤에는 흑장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진을 봉안할 때에는 이 흑장궤에 넣어 신여라는 가마로 모신다.

어진을 보관하거나 옮길 때 사용한 함이다. 어진을 옮길 때는 함에 넣은 뒤 어진을 위한 가마인 신여 神轝로 이동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어진을 모실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자 장식 뚜껑을 갖춘 향로다. 고종 즉위 40주년과 망육순을 기념해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한 기록을 담은 《어진도사도감의궤御眞圖寫都監儀軌》(1902)에 유사한 형태의 향로가 그려져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1900~1901년에 걸쳐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일곱 왕의 어진을 옮겨 그리고 봉안한 내용을 담은 의궤다. 어진 모사 일정, 투입된 인력과 예산, 관련 물품을 그린 도설(圖說)과 행차도인 반차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국왕의 초상
국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은 선대왕을 추모하고 왕실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국왕의 어진은 제1대 태조부터 제27대 순종까지 대부분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어진은 당대 최고 궁중화원들이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렸으며, 국왕의 사후에는 기억에 의존해 그리기도 했다. 어진이 낡아 훼손되거나 새로 지은 진전에 어진을 모실 때에는 이미 있던 원본을 따라 그리는경우도 있었다. 어진은 살아 있는 국왕과 다름없는 위상을 가졌다. 어진을 진전에 봉안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길 때는 가마와 의장을 갖추었으며 어진이 불타면 초상을 겪은 듯 소복차림을 하고 사흘간 곡을 하여 예우를 다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조선국왕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1910년까지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조선의 국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강력한 지배 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뛰어난 능력과 덕을 갖추고,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바른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이 주관하는 국가의 공식 일정을 비롯한 크고 작은 일들은 《조선왕조실록》등의 문헌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조선의 국왕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나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타당한 규율 내에서 관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조화롭게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출처>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3.22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3월 22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