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회에서 국가적으로 행하는 주요 의례로 제사에 해당하는 길례(吉禮), 국왕 등의 장례절차와 관련된 흉례(凶禮), 왕실의 결혼 등 경사스러운 일에 관한 가례(嘉禮), 전쟁과 관련된 군례(軍禮),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가 있다.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국가간 교류가 많지 않았던 조선사회에는 군례나 빈례에 대한 국가적인 비중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으며, 종묘와 사직, 선대 왕에 대한 제사 등과 관련된 길례와 장례절차에 관련된 흉례가 빈번하게 행해졌던 의례였으며 매우 중요시 되었다.
흉례(凶禮)는 국가나 왕실에 슬픈 일이 생겼을 때 행하는 예법을 의미한다. 왕이나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등이 승하하실 경우 장례와 관련된 일체의 의식과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의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흉례는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엄격했으며, 흉례의 모든 과정은 의궤(儀軌)라는 기록물로 남겼다.

1878년(고종 15) 5월 철종비 철인왕후哲仁조(1837~1878년)가 세상을 떠나자 국장도감, 산릉도감, 빈전혼전도감이 설치되어 국상 업무를 맡아보았다. 국장도감의궤는 철인왕후의 관을 능에 모시는 장례를 관장했던 국장도감의 업무를 기록한 책이다. 1878년 9월 16일에 이루어진 발인 행렬의 반차도와 더불어 대여(大轝), 견여(肩輿), 의장(催仗), 책보(册賣), 부장품 등의 도설 및 제작 관련 사항, 의례 절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睿陵) 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산릉도감은 1878년(고종 15) 5월 12일 철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4개월간 현재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철종의 예룽에 쌍릉으로 철인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철인왕후의 관은 9월 16일 예릉에 모셔졌다. 산릉도감의궤에는 왕릉의 석물과 건축물의 도설, 업무 과정에서 관서 간에 주고받은 문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1878년(고종 15) 5월 세상을 떠난 철종비 철인왕후의 시신을 모셨던 빈전과 발인 후 신주를 모셨던 혼전 관련 업무를 기록한 의궤이다. 빈전혼전도감은 철인왕후 승하 후 창경궁 환경전에 빈전을 차리고 9월 발인까지 각종 의례를 담당하였다. 이후 창경궁 문정전에 혼전을 설치하고 22개월간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1880년(고종 17) 철종비 철인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에는 혼전에서 종묘까지 신주를 운반하는 가마인 신여(神睾)와 의장물 등의 도설 및 부묘반차도가 수록되었다. 철인왕후의 혼전인 창경궁 문정전에 모셔져 있던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신 부묘례는 삼년상을 마친 후인 1880년 7월 6일에 거행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왕의 장례식, 국장
국장(國葬)은 3년간 70여 가지의 절차에 따라 치러졌기 때문에 여러 개의 임시 관청(都監)이 설치되어 업무를 분담하였다. 빈전도감(殯殿都監)은 승하한 후 시신을 수습하여 관(梓宮)에 모시는 일을, 산릉도감(山陵都監)은 장지를 물색하여 능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은 새 왕의 즉위와 돌아가신 왕의 발인을, 혼전도감(魂殿都監)은 장례 후 혼전에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일을 맡았다. 국장은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길례는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제(宗廟祭)와 땅과 곡식의 신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社稷祭) 등의 각종 국가 제례를 가리킨다. 종묘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로, 유교 문화의 핵심 가치인 ‘효(孝)’와 ‘예(禮)’를 국가 차원에서 형상화한 것이다.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왕조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자리였기에 ‘국가 최고의 의례’로 여겨졌다.

종묘와 종묘 제례에 관한 내용을 종합한 책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등의 의례서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록膽錄 등의 기록물에서 종묘와 관련된 부분을 모아 편찬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1866년(고종 3) 2월, 철종(재위 1849~1863)이 직접 종묘제향과 성생기를 거행한 날짜를 기록한 현판이다. 1851년(철종 2)부터 1862년(철종 13)까지 총 17차례의 친향과 성생기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성생기는 종묘제향 전에 제사에 올릴 가축[과 제기를 살피는 의식이다. 본래 왕이 참여하지 않다가 1739년(영조 15)에 국왕이 친히 살피는 의례가 만들어졌고, 이후로 그 날짜를 현판에 기록으로 남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제관들이 입는 옷을 제복(祭服)이라 부르며, 신분에 따라 무늬나 장신구에 차이를 두어 위계를 나타냈다. 제복은 대개 겉옷은 짙은 청색(또는 검은색) 계열이고, 안에는 붉은색이나 흰색 받침옷을 입어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는 음양오행의 조화를 상징한다. 제복은 방심곡령(方心曲領), 패옥(佩玉), 홀(笏)과 같은 여러 부속품이 합쳐져 하나의 ‘예(禮)’를 완성한다.


제관의 복식
국가의 제사를 진행하는 관원인 제관은 검은 색 겉옷(祭服) 아래 흰색 옷(中單) 등을 갖춰 입고 머리에 제관(祭冠)을 썼다. 머리에 쓰는 제관의 앞면에 세로로 가로지르는 금줄을 양(梁)이라고 하는데, 신분에 따라 양에 표시되는 금줄의 개수가 달라졌다. 금줄의 개수가 많을수록 품계가 높아졌으며 줄이 하나도 없으면 1량관, 네 가닥이면 5량관을 의미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5년)
종묘대제는 종묘에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봄.여름.가을.겨울.납일 등 1년에 5번 지냈다고 한다.

종묘대제 등 종묘에서 거행되는 주요 행사에 대한 절차와 규정을 설명한 8폭 병풍이다. 제례 실무자가 평소에 병풍을 통하여 의식 절차를 익히도록 돕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향로는 향을 태운 연기로 천상의 혼을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제기이다. 신관례 때 초헌관은 향로에 향을 세번 나누어 사른다. 향을 담아두는 향합은 향로의 동쪽에 진설한다.

향을 태운 연기로 천상의 혼魂을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제기인 향로와 향합이다. 신을 모셔와 인사를 하고 예물을 바치는 절차인 신관례 때 제사의 주관자인 초헌관이 향로에 향을 세 번 나누어 사른다. 왕이 친히 나서는 제사에서는 왕이 초헌관을 맡는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찬은 ‘용찬龍瓚’ 또는 ‘규찬圭瓚’이라고도 한다. 신관례에서 지하의 백(魄)이 술의 향내음을 따라 올라와 신주에 모셔질 수 있도록 찬에 울금향의 술(울창주鬱鬯酒)을 담아 신실 바닥에 뚫린 관지통灌地桶에 붓는다. 접시형의 받침대인 찬반과 한 쌍을 이룬다.

향기로운 연기와 술을 통해 신을 신주로 불러 모시는 의식인 신관례 때 사용한 제기이다. 술이 땅으로 내려갈 수 있게 신실 바닥에 구멍을 뚫어 원통 모양의 관지통을 심은 뒤, 용찬에 담긴 술을 부어 지하의 백이 신주에 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신에게 술을 올릴 때 사용하는 잔으로, 모양이 새(작雀)와 비슷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종묘대제 등 큰 제사 때 매 신위마다 세 개의 작을 올리는데 각각 예제(醴齊), 앙제(盎齊), 청주(淸酒) 등을 담아 올린다. 점은 작을 받치는 판이다.

신에게 술을 올리는 헌작(獻爵) 때 사용한 잔인 작과 받침인 점이다. 작은 참새(雀)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데에서 그 명칭이 붙여졌다. 점에는 작이 움직이지 않도록 둥근 선이 패여 있다. 제상에 올릴 때 점 위에 작을 놓는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축판은 축문을 올려두는 나무판으로 검은 칠을 하였다. 축문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놋쇠로 된 문진으로 고정시켜 제상의 서편에 놓았다.

신에게 축원을 드리는 글인 축문을 올려두는 판과 누르는 문진이다. 축판은 주로 나무에 검은 칠을 하여 만들었다. 축문은 초헌관이 첫 술잔을 올린 후 읽었으며 바람에 날리지 않게 놋쇠로 된 문진으로 눌러 제사상의 서쪽에 놓았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서직비는 메기장(서黍)과 찰기장(직稷)을 태우기 위해 조금씩 덜어낼 때 사용하는 수저이다. 번간로는 희생의 간이나 서직(黍稷)을 태울 때 사용하는 화로이다. 간과 서직을 태우는 절차는 민간의 가례(家禮)에서는 찾을 수 없는 국가 제례의 독특한 의식으로 고대 주왕조의 번제(燔祭)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신에게 익힌 고기를 바치는 궤식례(饋食禮)의 마지막에 쑥(蕭), 메기장·찰기장(黍稷), 희생의 기름을 화로에 넣고 버무려 숯불에 태운다. 이때 사용된 화로인 번간로와 서직을 조금씩 덜어낼 때 사용된 숟가락인 서직비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신을 보낸 후에는 제례에 사용되었던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우는 망료례를 행하여 제례를 청결하게 마무리하였다. 제례에 사용된 축문과 폐백은 제례가 끝나면 모아서 구덩이에 묻었다. 영조대부터 축문과 페백을 모아 불에 태우기 시작했는데 이 때 사용한 그릇과 젓가락이다.

제례의 마지막 절차에서 축문과 폐백을 불에 태우는 망료례 때 사용한 그릇과 젓가락이다. 본래 종묘 제례에서는 축문과 폐백을 땅에 묻었는데(望痤), 영조 대에 이를 태우도록 변경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소.양.돼지 등 희생을 올리는 데 사용한 네모난 소반 모양의 제기이다. 상판은 삼등분하여 양쪽 끝은 붉은 색, 가운데는 흑색칠을 하였다. 천조관(薦俎官)은 조를 받들어 남신문과 신의 길을 지나 신실로 입장해 제상의 서쪽에 올렸다.

소·양·돼지와 같은 제물 고기인 희생을 담는 생갑, 생갑을 올려두는 상인 조이다. 신에게 익힌 음식을 올리는 절차인 궤식례(饋食禮)에서 희생의 삶은 고기를 생갑에 담아 바치는데, 이 절차는 국왕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친제(親祭)때만 행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종묘 제향과 왕릉·진전 제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심이 되는 제사 음식에 있었다. 종묘 제향은 소·양·돼지를 통째로 바치는 희생(犧牲)과 그 피를 올리는 혈식(血食)을 가장 귀하게 여겼으며, 기장·수수 등 다양한 토산물을 골고루 올렸다. 반면, 왕릉과 진전의 제사는 기름과 꿀을 섞어 만든 밀과(蜜果)를 중심으로 떡, 과일, 국수 등을 준비하여 차림의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종묘 제향은 짐승의 고기와 피를 바치는 ‘혈식血食’의 제사로, 소·양·돼지가 중심 제물[희생犧牲]이었다. 희생으로 쓰이는 가축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정결하게 키운 것으로 제사상에는 희생의 털과 피, 생고기와 삶은 고기, 고기를 삶은 국물을 올렸다. 희생 외에도 기장과 수수 등의 곡식, 땅과 물에서 난 다양한 산물로 만든 각종 음식을 차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신실에는 국왕과 왕비의 신위 외에도 책(冊)과 보(寶), 교명(校名), 국조보감(國朝寶鑑)이 함께 봉안되었다. 신실 중앙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주장이 있고 좌.우에 책과 보를 보관하는 책장과 보장이 배치되어 있다. 신주장 앞에 종묘제례 때 신주를 옮겨모시는 신탑과 그 위에 궤가 있다.

종묘는 하나의 건물을 여러 칸의 신실로 나누어서 여러 신주를 함께 모신 곳으로 현재 정전에는 19개의 신실에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位가, 영녕전(永寧殿)에는 16개의 신실에 34위가 있다. 신실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주장이, 좌우에는 책장과 보장(寶欌)이 있다. 신주장 앞에는 제례를 지낼 때 신주를 옮겨 모시는 신탑(神榻)이 있는데 그 위로 신주 뒤에 놓이는 궤(几)가 있다. 신실 앞에는 노란 명주 천으로 만든 면장(面帳)을 드리웠고 각 신실 사이에 격렴(隔簾)을 내려 공간을 구분하였다. 제례를 지낼 때에는 신실 앞에 제상을 차리고 양쪽에 선(扇)·개(蓋) 등의 의장물을 세웠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음식과 함께 술의 진헌은 신들에 대한 공경과 정성을 표현하는 제향의 핵심요소였다. 종묘제향의 준소상에는 여섯 개의 술항아리를 계절별로 종류를 달리하여 올렸다. 봄과 여름에는 계이鷄彝.조이鳥彛.상준象尊.희준犧尊.산뢰山罍가, 가을과 겨울에는 가이斝彛.황이黃彛.착준著尊.호준壺尊.산뢰가 사용되었다. 계절마다 항아리 모양을 달리하는 것은 인간의 의례가 자연의 흐름과 일치해야 한다는 유교적 우주관을 보여준다.

계이(鶏彝)는 겉면에 닭(鷄) 문양이 새겨져 있거나 닭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는 항아리이다. 보동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새문양을 새긴 조이(鳥彝)와 짝을 이루어 배치된다. 닭이 새벽을 알리듯, 지상의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시작함을 조상(하늘)에게 알린다는 상징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조이에 새겨진 새가 봉황을 의미할 경우, 이는 왕실의 권위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봄의 소(희준)와 여름의 코끼리(상준)는 농경 사회였던 조선에서 한 해의 풍년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주술적·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산뢰(山籟)는 특정 계절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계절 제향에 두루 쓰이는 핵심 제기에 가깝다. 산처럼 변치 않는 숭고함을 담고 있다.

제례 때 물과 술을 올리는 상, 尊所床, 대한제국
신실 밖에는 제례 때 사용되는 물인 명수(明水)와 술이 담긴 항아리를 올린 준소상이 놓였다. 계절별로 다른 모양이 사용되었는데 각 항아리에 담는 술의 종류도 달랐다. 봄·여름 제사에는 계이(鶏彝), 조이(鳥彝), 상준(象尊), 희준(犧尊), 산뢰(山籟)가, 가을 ·겨울 제사에는 가이(斝彝), 황이(黃彝), 착준(著尊), 호준(壺尊), 산뢰가 사용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등(登)과 형(鉶)은 음식(국)을 담는 아주 중요한 그릇이다. 몸체는 둥글고, 아래에는 세 개의 발이 달려 있으며, 양옆에는 귀 모양의 고리가 있다.






이(彛)는 종묘제례에서 사용하는 술 항아리(尊) 중에서도 가장 격조 높고 신성시되는 제례용 항아리를 말한다. 더 깊은 종교적·의례적 의미를 지니며, 주로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서만 엄격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겉면에 새겨진 문양에 따라 이름과 용도가 결정된다.







호준壺尊과 착준著尊 가을.겨울 제사에 앙체(탁주)와 예제(단술)를 담는 술동이이다. 산을 새긴 술동이, 산뢰山罍, 사계절 제사에 청주와 현주를 담는 술동이이다.

운점(雲坫)은 준과 산뢰를 올리는 받침대로 이彛를 올리는 주舟와 함께 새롭게 제작한 기형이다.

종묘 제향을 위한 그릇, 제기
제기는 종묘에서 제사 음식을 마련하고 바치는 데 사용한 그릇이다. 제기의 형식은 역대 예제禮制를 참고하여 법식法式을 정해, 조상을 모시는 데 잘못이나 모자람이 없도록 하였다. 제기는 낡거나 파손되어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땅에 묻거나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의례를 통한 효의 실천
‘효孝’는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국왕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왕과 왕실 가족의 죽음과 관련한 의례, 조상을 섬기는 제례에서 잘 나타난다. 통치자의 죽음이자 부모의 죽음인 국상(國喪)은 나라의 가장 큰 슬픔으로 여겨졌다. 엄격한 절차와 장중한 분위기에서 치렀으며 어떤 의례보다 오랜 기간 동안 거행했다. 선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국가 제사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중요한 의례였으며, 왕릉에서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치러 조상에 대한 효를 다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은 유교적 국가통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국가와 왕실을 중심으로 각종 의례에 맞는 음악을 연주함으로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예악(禮樂)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세종은 난계 박연 등과 험께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기술로 악기와 악보를 만들어 조선의 음악제도를 정립하였는다. 세종은 종묘제례악의 근간이 되는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 등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또한 음악의 길이를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였고, 표준 음높이를 제장하고, 편종.편경 등을 제작하는 등 음악의 근간을 확립하였다.

나무틀에 16개의 철편鐓片을 매달아 만든 타악기이다. 망치 모양의 채로 철편을 쳐서 연주한다. 철편의 크기는 모두 같으나 두께를 다르게 하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했다. 두꺼울수록 높은 음이 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큰 종 한 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만든 타악기이다. 종의 아랫부분 가운데에 둥글게 튀어나온 부분을 망치 모양의 채로 쳐서 소리 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엎드린 호랑이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타악기로, 음악의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호랑이 등줄기에 있는 톱니 모양 갈기를 대나무 채로 긁어 연주한다. 음陰을 상징하는 어는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축祝과 대비하여 서쪽에 놓았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나무상자 모양 몸체의 윗면에 구멍을 뚫어 나무채를 꽂아둔 타악기이다.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며, 나무채로 절구질하듯 축의 바닥을 내리쳐 연주한다. 음악의 끝을 알리는 악기인 어敌와 짝을 이룬다. 양陽을 상징하여 동쪽에 배치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음악의 시작과 끝, 또는 악절이 바뀔 때 치는 타악기이다. 좁고 긴 나무판 6개를 엮어 판 사이에 엽전을 끼워 만들었다. 박의 아랫부분을 부채처럼 폈다가 빠르고 힘있게 위쪽으로 접어 올려쳐 연주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돌로 만든’ㄱ’자 모양의 경 한 개를 나무를에 매달아 안든 타악기이다, 망치 모양의 채로 경의 아랫부분을 쳐서 소리 낸다. 동양 음악에서 사용하는 한 속타브 범위 내의 십이율 중 첫 음인 황종을 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진고는 현재 전하는 북 가운데 북통이 가장 큰 국악기이다. 네 개의 기둥으로 받친 나무틀 위에 올려놓은 북을 두 손으로 나무채를 잡고 쳐서 소리 낸다. 북면에 닿는 나무채의 끝 부분은 형겊으로 감아 사용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제례 때 사용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허리가 잘록한 나무 울림통 양쪽에 가죽을 대어 만든 타악기이다. 울림통의 왼쪽을 북편, 오른쪽을 채편이라고 하는데, 북편은 손으로 치고 채편은 대나무로 만든 얇은 채로 친다. 조선 왕실에서 행해진 각종 의례에 두루 사용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반구형 나팔 부분을 지닌 세로로 부는 관악기이다. 음이 강하고 높아 주로 야외 음악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제례악 중 <정대업定大業>에, 궁중무용인 <선유락船遊笑>의 반주 음악에 사용되었다. 조선 군대에서 신호와 통신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소라의 꼭지 부분에 구멍을 내어 만든 관악기이다. 한 가지 음을 낼 수 있는데 음 높이는 소라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 후기에는 왕의 행차 때 음악을 연주하던 악대인 내취內吹에 편성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가로로 부는 관악기인 대금이다. 일반적으로는 대나무로 만들어지나 철로 제작되어 연주용이 아닌 의례용으로 보인다. 두 대금 모두 겉면에 실제 악기와 같이 대나무 마디를 표현하였다. 금은입사대금은 넝쿨 문양과 학鶴 문양을 금사와 은사를 넣어 장식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둥근 접시 모양의 작은 징 10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만든 타악기이다. 징의 크기는 같으나 두께가 달라 다른 음을 낸다. 망치 모양의 채로 쳐서 연주한다. 고정된 장소에서는 받침대에 꽂은 채로, 행진할 때에는 받침대에서 뽑아 자루를 손으로 잡고 연주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정재(呈才)는 ‘재주를 바친다’는 의미로, 의례 때 공연되었던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종합공연예술이다. 조선 왕실은 잔치에 음악과 노래, 무용을 함께 올려 신하, 백성과 더불어 즐기고자 했다. 정재는 대체로 기존의 전해오는 선율에 새로운 노랫말과 춤을 얹는 방법으로 창작되었으며, 국왕의 장수, 왕조의 번영을 바라는 내용이 많다. 〈헌선도獻仙桃〉는 한 개만 먹어도 천년을 살 수 있다는 복숭아를 국왕께 올리는 내용이며, <봉래의鳳來儀>는 조선 왕조의 개국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가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한 것이다. 민간에서 유행하던 연희를 궁중잔치에 올리기도 하였는데 <선유락船遊樂>이나 <검기무劍器舞> 등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출처>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4.13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4월 13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