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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궁중서화] 조선 왕실의 문예

조선 왕실의 궁중 서화는 단순히 감상을 위한 예술을 넘어, 왕실의 권위와 품격, 그리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결정체였다. 궁중 회화는 왕실의 위엄을 세워야 했기에 가장 값비싼 안료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화원들이 동원되어 극도로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렸다. 왕실의 혼례, 잔치, 행차 등을 사진처럼 기록한 그림들이다. 인물 배치, 복식, 기물 하나하나가 법도에 맞게 그려져 역사적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궁궐의 장식 그림>

조선시대 궁궐에는 공간의 성격과 사용하는 사람의 위상에 따라 다양한 그림이 장식되었다. 왕의 자리인 어좌 뒤와 어진을 모시는 진전(眞殿)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세워 통치자의 존재를 드러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는 <모란도(牡丹圖)〉를 펼쳐 왕실의 위용을 높였고, 왕실 어른을 위한 경사스러운 잔치에는 무병장수를 바라며<십장생도+長生圖〉를 두어 장엄한 분위기를 돋우었다. 이 밖에도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화조도(花鳥圖)>,<영모도(翎毛圖)>,<신선도(神仙圖)>를 비롯해, 학문 숭상을 의미하는<책가도(冊架圖)>병풍을 배치해 공간을 단장했다. 이러한 그림은 주로 국가 의례를 관장했던 예조의 지휘 아래 도화서 화원들이 공동 제작하였으며, 오랜 시간 고유한 내용과 화풍이 크게 변하지 않고 정통성을 유지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일월오봉도 병풍, 조선>

일월오봉도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파도치는 물을 그린 그림으로 국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한다. 평소 왕의 집무 공간을 비롯해 행차하는 모든 장소에 놓였다. 임금이 승하하면 발인 때까지 재궁(梓宮, 왕의 관)을 두는 빈전이 차려지는데, 이때 일월오봉도를 펼쳐 생전과 같게 임금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내고자 했다. 빈전에는 이처럼 작은 병풍을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오직 국왕의 상(喪)에만 일월오봉도를 설치하고, 다른 왕실 구성원의 상에는 모란도 병풍을 세워 신분의 차이를 엄격히 구별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일월오봉도 병풍, 조선>

일월오봉도는 임금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다섯 개의 산봉우리, 해와 달, 소나무, 파도치는 물을 묘사하였다. 국왕의 집무 공간을 비롯해 왕이 행차하는 장소마다 함께 놓이며 권위를 높였다. 특히 정전에는 어좌가 놓이는 당가(唐家) 뒤로 장지(障子) 형태의 대형 일월오봉도가 설치되는데, 일제강점기 창덕궁 인정전에는 일본풍의 봉황도와 서수(瑞獸) 그림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1964년 인정전을 복원하면서 창덕궁에 있던 이 일월오봉도 병풍을 걸었는데, 오랜 노출로 손상되어 6년간 국가유산청 문화유산보존과학센터의 보존처리를 거친 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되고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한궁도 병풍, 漢宮圖 屏風, 19~20세기 초>
<오른쪽>
<가운데>
<왼쪽>

한궁도는 실재하는 궁궐이 아닌 중국풍의 화려한 전각과 청록의 산수를 배경으로 그린 상상화이다.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모습, 누각 안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바둑을 두는 남자들, 쌍륙(雙六) 놀이를 하는 여인들 뿐 아니라, 차 심부름을 하는 시녀와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시동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을 묘사하였다. 평화로운 일상 장면 주위로 학과 사슴의 모습이 어우러져 상서로움을 더하였다. 한궁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그림은 높이가 대략 70cm로 비교적 낮은 편이며, 중국 강남 지역의 봄 풍경을 묘사한<강남춘의도>를 참고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강남춘의도 병풍, 江南春意圖 屏風, 조선후기>
<오른쪽>
<왼쪽>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인 강남의 봄 풍경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다. 청록의 산과 강변을 배경으로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노란 수양버들과 꽃나무가 계절감을 드러내며,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거나 누각 안에 있는 사람들, 강가에서 배를 타는 모습 등 일상의 다채로운 장면을 담았다. 2~3폭에 성곽 안의 홍살문과 흰 탑의 모습이 눈에 띠며, 7~8폭의 강가에 돛대를 올리고 정박해있는 배들을 통해 번화하면서도 평화로운 도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강남 지방은 수려한 산수와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해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이상적인 도시로 여겨졌다. 도시의 모습은 문학작품과 회화의 주된 소재가 되기도 하였는데, 19세기 궁중에서도 강남춘의도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병풍의 뒷면에 ‘棣洞壽候伊宅’이라는 묵서가 있어, 체동에 살던 수명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청록산수도 병풍, 靑綠山水圖 屏風, 19~20세기 초>

청록의 산과 잔잔한 강가를 배경으로 여러 척의 배들이 유유히 떠다니는 평화로운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국 강남 지역의 이상적인 풍경을 묘사한 <강남춘의도>와 <한궁도>의 배경이 되는 강변과 산수의 모습을 부각하여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녹색, 청색으로 화려하게 묘사된 산과 분홍빛 운무, 잔잔한 물가에 떠 있는 여러 척의 배들이 이상적인 강변 도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문방구들이다. 문방구라 함은 선비들이 거처하던 서재였던 사랑방에 비치된 것을 말하지만 일반적을 필기도구를 문방구라 한다. 그 중 종이.붓.먹.벼루는 글을 쓰는데 꼭 필요한 문방구로 문방사우로 불린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절제된 삶은 강조하면서 사치를 배제하고자 했지만, 글을 쓰는 도구였던 문방구에 대한 욕구는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선비들이 욕심내었던 사치 기호품으로 중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물품이었다. 이런 기호품들은 실제 사용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소유를 통해 만족감을 주는 공예품의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실의 문예>

조선은 학문을 숭상하여 배움을 글로 풀어내는 글짓기와 인격을 반영하는 서예의 수련을 매우 중시하였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왕은 옛 성현의 글을 적으며 그 뜻을 따르고자 하였고, 스스로 글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사색하는 공간에는 붓, 먹, 벼루, 연적 등의 문방구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써내려가는 방법이 기록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문방구는 매우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왕실에서는 다채로운 문방구를 활용하여 왕과 신하가 함께 시를 짓고 화합하였으며, 궁궐의 전각과 아름다운 경치를 소재로 감흥을 나누는 등 활발한 문예활동을 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1 ‘曰’자 모양 벼루><2 분홍빛 벼루><3 옥으로 만든 벼루><4 수정으로 만든 벼루>
<5 옥으로 만든 필통과 붓><6 꽃 모양 대나무 필통><7 옥으로 만든 필통><8 납석으로 만든 필통과 붓>

사방탁자(四方卓子)는 사방이 트여 있는 다층의 탁자로 네 기중과 층널로만 구성되어 있어 시작적으로 시원하고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들이 사용한 가구이다. 

<9 책꽂이>
<10 용무늬 탁자>
<11 촛대>
<12 주칠 경상>
<13 4층 책장>
<14 국화무늬 연적><15 산수무늬 연적><16 산수무늬 연적><17 태극무늬 연적>
<18 박쥐무늬 연적><19 칠보무늬 연적><20 백자 환형 연적>
<21 곤충무늬 벼루>

왕실에서 사용한 인장 중 개인적으로 사용한 사인(私印)은 전각 예술로 발전해 왕실의 문예 취미를 잘 보여준다. 전각은 중국 송·원대에 개인적 취향을 반영하는 예술로 자리 잡았고, 조선 후기 정조의 문예 정책으로 크게 성장했다. 인장의 예술성은 헌종이 애장한 인장과 ‘보소당인존’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헌종이 수집한 인장들은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고종 대에 모각한 것들이 남아 있다.

<조선 왕실의 사인(私印)>

왕실의 인장에는 왕과 왕비의 존엄을 상징하는 어보(御寶), 국가 업무에 쓰이는 국새(國璽)나 관청의 공식적인 관인(官印) 외에도 개인적으로 사용한 사인(私印)이 있다. 사인은 돌, 나무, 금속 등 여러 재질로 제작되었으며 손잡이의 모양과 새겨진 내용 또한 다양하였다. 특히 헌종은 선대 왕들의 인장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인장의 정보를 모아 책을 간행하고, 당호(堂號)인 ‘보소당’을 붙여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이라 하였다. 헌종이 수집한 인장을 ‘보소당인장’이라 하는데, 1900년 덕수궁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고종 대에 모각한 본이 전하고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보소당인존장(寶蘇當印存欌), 조선>

보소당인장을 보관했던 장欌으로 전집前集과 후집後集 두 점이 전해진다. 이 장은 후집으로 문 안쪽에 종이를 붙여 보관된 인장에 관한 정보를 적어 두었다. 좌우 두 칸에 다섯 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두 장에 총 774방(方)의 인장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보소당인존》에는 헌종 본인의 인장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부터 당대(19세기)에 이르는 유명 문인, 학자들의 인장 700여 과(顆)가 수록되어 있다. 인장들 중에는 추사 김정희, 옹방강 등 조선과 청나라 문인들 사이의 학문적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인장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김생, 한석봉 등 역사적 인물들의 서체를 본떠 만든 인장들을 통해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예술적 안목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보소당인존, 寶蘇當印存, 조선후기>
<《보소당인존》 그림과 일치하는 인장 1~5>
<헌종의 인장 6~11>
<헌종의 인장 6~11>
<정조의 인장 12><고종의 인장 13~16>
<고종의 인장 13~16>
<왕과 교유한 신하들의 인장 17~22>
<왕과 교유한 신하들의 인장 17~22>
<인장>

국왕의 글은 어제, 글씨는 어필이라 하며, 세자의 글과 글씨는 각각 예제·예필이라 불렀다. 어제·어필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존숭의 대상이었으며, 국왕은 관직 임명문이나 신료·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궁궐과 서원 등의 편액과 글도 직접 작성했다. 왕이 승하하면 새 왕은 실록 편찬과 함께 어제·어필을 수집·간행했으며, 이를 책이나 첩으로 만들거나 목판·석각으로 보존하였다.

<어필(御筆), 왕의 글씨>

왕의 글인 어제(御製)와 왕의 글씨 어필(御筆)은 군왕이 남긴 흔적으로 제왕의 풍모와 왕실의 위엄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쓴 시와 훈유(訓識, 훈계의 글), 편지와 같은 기록물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이를 후대에 오래도록 계승하기 위해 단단한 돌에 새기고 탁본하여 《열성어필(列聖御筆)》이라는 책으로 간행하거나, 나무에 새긴 뒤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두기도 하였다. 선대 왕의 글과 글씨를 보전하는 행위가 효추의 실행이자 위업의 전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필각석(御筆刻石)과 현판 등 왕실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훌륭한 기록물을 통해, 조선의 임금들이 추구했던 문예와 품격 있는 왕실 서예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태조가 자신의 다섯 번째 딸 숙신옹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그 소유권을 증명하기 위해 쓴 문서이다.

<1 태조 어필각석, 조선>
<1 태조 어필각석, 조선>

선조가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지은 시이다. 명필로 알려졌던 선조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2 선조 어필각석, 조선>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청나라 심양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구오를 전송하며 지은 시이다.

<3 효종 어필각석>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청나라 심양에서 먼저 귀국한 구오에게 보낸 편지이다.

<4 효종 어필각석>

숙종이 고모인 숙명공주의 쾌유를 기뻐하며 지은 시(왼쪽)와 숙종이 멀리 떠났던 아들 연잉군(훗날 영조)이 돌아와 기쁜 마음을 표현한 글(오른쪽)이다.

<5~6 숙종 어필 각석>

숙종이 영의정 김수항에게 국방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편지이다.

<7 숙종 어필 각석>

숙종이 도성을 떠난 영부사 남구만을 그리워하며 내린 시이다.

<8 숙종 어필 각석>
<9 속종이 쓴 ‘飛’>
<10 숙종이 쓴 ‘龍’>

경종이 세자시절 자신의 호위를 맡았던 세자익위사 관리 김재해에게 문방구를 하사하며 준글이다.

<11 경종 어필각석>
<11 경종 어필각석>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 숭검조당(崇儉調黨, 검소함을 존숭하고 당파를 조절하는 것 )’을 강조하며 훈계한 글이다.

영조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쓴 기본 원칙 ‘육덕, 육행, 육예’이다.

<13 영조 어필각석>
<14 영조가 쓴 명문구, ‘착한 일을 하라’>
<15 영조가 궁궐 안의 풍경을 읊은 시>
<16 영조가 자신의 시력을 시험하기 위해 쓴 글씨>
<연못을 바라보며 쓴 시를 새긴 현판>

1694년(숙종 20) 숙종이 연못을 바라보며 느낀 감상을 읊은 시이다. 햇살이 비추는 봄날에 연못을 헤엄치는 오리와 물고기를 보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창덕궁 후원의 영화당 주변에는 부용지와 춘당지를 비롯한 크고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이 일대의 풍광을 시로 읊은 것으로 보인다. 글의 끝에는 숙종이 사용했던 인장으로 왕의 문장이라는 뜻의 ‘신묵(宸墨)’, ‘신장(宸章)’을 새겼다. 어필은 개인의 필적을 넘어 왕의 위엄과 통치, 문예를 드러내는 상징물이었기에, 현판으로 만들 때에도 귀한 금을 칠하고, 봉황과 구름무늬를 그린 테두리로 최고의 위계를 갖추었다. 어제어필(御製御筆) 현판의 경우 문을 달아 왕의 글씨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보호하였는데, 현재는 문을 고정했던 경첩만이 남아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옹도의 시 ‘과남린화원(過南鄰花围)’을 새긴 현판, 선조 어필, 조선 후기>

중국 당나라의 시인 옹도(雍陶)가 지은 ‘남린의 화원을 지나가며(過南鄰花園)’라는 시로, 세월이 빠르게 흘러 봄이 끝나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감정을 읊은 것이다. 선조의 글씨로 현판을 만들어 훗날 창덕궁 존덕정에 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선대 왕의 글과 글씨를 모아 책으로 간행하고, 이를 다시 돌이나 나무에 모각하여 선대의 자취를 보존 하는 관례가 있었다. 현판 왼쪽 하단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제작과 보수 이력을 통해, 인조 대에 현판을 만들고 숙종 대 이후 두 차례 보수를 거듭하며 선조의 글씨를 소중하게 간직했음을 알 수 있다. 글자는 양각한 뒤 금칠하였고, 네 모서리는 큼직한 박쥐와 칠보무늬로 화려하게 꾸며 어필의 위엄을 더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국왕이 남긴 글>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지은 시, 1793년>
<규장각 제학 신(臣) 정민시>
<신(臣) 서정수>
<원임직 각신(閣臣) 서용보>
<신(臣) 윤행임>

1793년(정조 17) 3월 20일 창덕궁 후원 옥류천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지은 시 42수를 연결한 것이다. 정조는 이날이 계축년이자 계축일인 것을 기념하여, 왕희지의 난정수계(蘭亭水禊) 고사(故事)를 본떠 41명의 규장각 전 ·현직 관원과 그 자제들이 모여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읊도록 하였다. 임금의 덕과 왕실의 번영을 기리고 후원의 아름다움과 모임의 성대함을 칭송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정조를 비롯한 당대 규장각 관원들의 문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조선시대 글과 글씨가 군신간의 소통을 도모하고 의리를 다지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궁중 서화
조선에서는 국가의 신성한 권위와 왕실의 영원한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궁중서화를 제작하였다.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임금의 초상 어진(御眞), 국가 행사의 과정을 담은 기록화, 궁궐 내부를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화 등 특별한 목적과 쓰임새를 지닌 그림들은 통치 이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다. 유교 정치에 입각한 조선 왕실에서는 정신 함양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글짓기와 서예 수련을 중요시했다. 왕의 글과 글씨(御製御筆)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대대로 보전해야 할 존숭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궁중서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국정을 시각화하고, 학문 수양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2.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3.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4.23 확인)
  4.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4월 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