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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으로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는 했지만, 근대화에 대한 실질적인 진전은 느렸으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과 청나라 세력의 영향력 확대가 이어졌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1880년대에 서구열강들과 본격적으로 수교함으로써 국제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에서 서구열강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이 승리하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등 19세말 조선의 정세는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국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그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국권을 빼았기고 말았다.

<고종황제 어새, 대한제국, 보물>
<어새 함, 대한제국, 보물>

대한제국
1897년 조선 제26대 왕 고종은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을 제국의 궁궐로 삼고 황제국에 걸맞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과 정책을 추진하였다. 행정·군사·재정 등 각 분야의 국가운영체제를 개편하였고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전기·전차·철도 등 서구 근대시설을 도입하고, 시민공원도 조성하는 등 근대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는 전통 건축과 함께 서양식 건물을 건립하고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황궁으로의 위엄을 더하면서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한제국은 한일 강제병합으로 인해 그 역사가 1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국가이자 황제국이었다는 점에서 짧지만 큰 발자취를 남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으로>

19세기 세계는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격변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외교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국외 사절단을 파견하고, 박람회를 통해 서양에 조선을 알리려 노력하였다. 더불어 외국 선진제도와 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여 교통, 통신, 금융, 의료,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서구 근대 문물의 도입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대한제국은 점점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은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했으나,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후 국제질서를 배우며 근대 외교에 나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이어 여러 서양 국가와 수교하며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승수를 판리대신으로 삼아 미국에 파견하는 신임장, 조선 1894년>

신임장은 국가원수가 외교사절 파견을 통지하기 위해 상대 국가의 원수에게 보내는 정식 문서이다. 1894년(고종 31) 4월 6일, 이전에 미국 전권대신으로 보냈던 박정양을 해임하고 대신 서리대신(署理大臣) 이승수를 판리대신(辨理大臣)으로 삼아 미국 수도로 파견한다는 내용의 신임장이다. 고종이 직접 서명한 대군주 수결(手決)이 있으며, 그 아래에 대조선국보(大朝鮮國賣)가 날인되어 있다. 문서 테두리에는 이화문이 인쇄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이 각국과 맺은 조약을 모은책, 대한제국, 1898년>

대한제국기 외교 업무를 전담했던 외부(外部)에서 1876년 이후로 해외 각국과 맺은 조약 등을 모아 발행한 책이다.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맺은 각종 조약을 기록하여 외교업무에 대한 참고 자료로 삼았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의 국제 사회와의 만남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국제사회와 근대적인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 변화한 국제 질서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채 여러 모로 불합리한 조약을 맺은 조선 정부는 곧 근대적인 국제법을 익히고 국제 조약의 사례를 연구하여 다른 나라들과 조약 체결을 준비했다. 1882년 서양 열강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아시아에서는 전례 없이 관세자주권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였다. 조선 정부는 잇달아 영국, 독일, 러시아 등 9개국과 조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으로 세계 외교 무대에 등장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해외 잡지에 소개된 조선의 모습, 1894년>

프랑스 주간지 《Le Journal Illustré》 1894년 9월 2일 자에 소개된 조선의 모습이다. 고위 관리들의 초상과 왕실의 행차, 궁궐 문을 비롯한 서울의 풍경을 담은 사진과 삽화가 실려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은자의 나라 한국, 그리피스, 미국 1882년>

미국인 목사이자 동양학자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 대외문제에 대해 쓴 책으로 1882년에 미국과 영국에서 영어로 발간되었다. 총 3부로 구성 되는데, 1부는 고대에서 조선까지의 역사, 2부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3부는 1784년부터 책이 편찬된 시기까지의 근대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후 1911년까지 판을 거듭하여 발행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서양인이 본 대한제국 풍경
19세기 말 외국 선교사, 상인, 외교관, 수집가까지 조선을 찾아왔다. 이들은 왕실 고문이나 외교사절, 선교활동으로 조선의 정치 ·경제 · 사회 · 문화활동에 참여하였고, 사진과 책 등 기록을 남겼다. 서양인들이 본 대한제국기 풍경은 일부 과장된 부분도 있으나,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기록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은자의 나라 (the Hermit Nation)’조선을 국제사회에 소개하고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개항 이후 고종은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적극 도입하여 전기, 전신, 우편, 근대 화폐, 신문, 전차 등 다양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는 외세 침략의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조선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국민소학독본, 조선 1895년><동사집략, 대한제국, 1902년>

국민소학독본, 조선 1895년
대한제국의 교육행정을 담당한 학부에서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교과서이다. 조선은 물론, <뉴욕>. <아메리카 발견> 등 세계 지리와 역사에 관한 신자식을 수록하고 있다.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국가를 강하게 만든다는 교육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동사집략, 대한제국, 1902년
김택영이 1902년에 저술한 역사 교과서이다. 단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상권은 삼국시대까지 다루고, 하권은 고려시대를 담고있다. 대한제국의 교육행정을 담당한 학부에서 간행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호조태환권을 찍은 틀, 조선 1893년>
<세부 설명>

호조태환권은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이자 신 ·구화폐를 교환할 수 있는 화폐 교환 증서이다. 근대적 화폐제도의 도입을 위해 설립한 태환서에서 발행하였다. 태환권을 구화폐와 교환하고, 이를 다시 신화폐(은화 또는 동화)와 교환하고자 하였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실제 발행되지는 못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서북철도국 총재가 사용했던 인장, 대한제국 20세기 초><전환국 인장, 조선 1883년경>

서북철도국 총재가 사용했던 인장, 대한제국 20세기 초
서북철도국(1900~1904년)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가 사용했던 인장이다. 서북철도국은 서울과 신의주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고자 황실 재산 관리 기구인 궁내부 내장원(內藏院)에 설치한 관청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전환국 인장, 조선 1883년경
1883년에 설치된 최초의 상설 조폐 기관인 전환국에서 쓰던 인장이다. 전환국은 근대적인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나 기구인 궁내부 내장원(內藏院)에 설치한 관청이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재정고문을 맡은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의 건의로 폐지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의 근대화 노력
고종은 개항을 단행하고 부국강병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외국기술자를 초빙하여 서양의 기술을 배우고 의학교, 철도학교, 광무학교 등 각종 기술학교를 세웠다. 또한 소학교를 설립하고, 교과서를 편찬하여 근대 교육을 지원 · 장려하였다. 서구의 전기 · 교통 · 통신 시설을 도입하는 등 근대산업시설을 갖추었으며 신문을 발간하고 근대 화폐를 주조하는 등 근대 문물을 도입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주들로, 나라가 격변하던 시기를 이끌었다. 고종은 개항과 근대화, 대한제국 선포를 추진하며 자주독립과 국가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열강의 각축 속에서 일관된 외교 전략을 유지하지 못했다. 또난 국내적으로 사회적 적, 제도적 모순에 대한 이해와 해결 노력 등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열강의 각축 속에서 일관된 외교 전략을 유지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국권 상실을 막지못했다. 순종은 실질적인 통치 권한은 거의 없었으며, 일제의 강압 아래 나라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했다.

<고종과 순종>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높여 황제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을사늑약 반대(1905년), 헤이그 특사사건(1907년) 등을 구실로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했다. 순종은 일제의 간섭이 심해진 시기에 즉위하여 황제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 할 수 없었다. 일제가 계획한 순종의 전국 순행은 거꾸로 백성들이 애국심을 표출하고 단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종과 순종의 죽음은 각기 3·1운동(1919년)과 6·10만세운동(1926년)의 기폭제가 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1902년은 고종의 즉위 40주년이자 51세가 되는 해였다.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존호를 올리고,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진연을 열었으며 어진을 제작하였다. 또한 세종로에 칭경비를 세우고 기념장과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 제작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2년, 보물>

1902년 고종의 51세와 즉위 40년을 경축하기 위해 고종과 황태자(후에 순종)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과 필요 물품 등 제반 사항을 기록한 책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옥책, 대한제국 1902년, 보물>
<고종황제 기로소 입소 기념 잔치를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2년, 보물>
,고종황제 어진, 대한제국 20세기초, 복제, 국립중앙박물관>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장, 대한제국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육순을 바라보던 1902년에는 대한제국 황제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행사가 추진되었다. 고종에게 새로운 존호를 올리고 어진을 제작하였으며,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진연을 베풀었다. 아울러 기로소 앞(현 세종로 네거리)에는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비를 건립하고, 기념장과 기념우표 등도 발행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 대한제국 1907년>
<순종 사진엽서, 영국, 1895년>

순종의 흑백사진이 인쇄된 엽서이다. 사진 속 순종 황제는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와 옥대를 차고 있다. 엽서 앞면에는 순종황제를 가리키는 ‘EMPEROR OF KOREA’가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Printed in England’라고 적혀있어 영국에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순종황제 즉위식
1907년 8월 27일 순종이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순종의 즉위식은 경운궁(현 덕수궁) 돈덕전에서 이루어졌는데 전통적인 의례와 근대적 예식을 병행했다. 순종은 전통예복인 면복과 서구식 복장인 육군대장복을 입었고, 참석자들은 서양대례복을 필수로 착용하였다. 음악도 전통 악대의 음악과 함께 서양식 군악대의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즉위식이 끝난 뒤에는 서양식 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념장과 기념엽서를 배포해 순종의 황제 즉위 사실을 알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순종의 전국 순행은 대한제국 황제가 직접 지방을 방문하여 백성과 소통하고, 황실의 권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시행한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을 상실하고, 통감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종의 순행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을 뿐, 국권 회복이나 정치적 자율성 확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순종황제 남서순행 기념장, 대한제국, 1909년>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대한제국 1909년>

순종의 전국 순행
순종은 1909년(융희 3) 1월~2월 대구–부산-마산으로 남순행과 개성-평양-의주-신의주로 서북순행을 하였다. 황제의 순행은 대한제국 대신들과 일본 통감부 관리들이 수행했다. 순행에 동반했던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가 가지는 상징성을 이용해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순행로에 태극기와 함께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거나 훼손하였고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며 순종의 방문을 환호하였다. 순종의 전국 순행은 일본의 계획과는 달리 반일의식과 애국심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황제 국장 사진엽서, 1919년>

1919년 1월에 세상을 떠난 고종황제의 국장 장면을 촬영하여 제작한 사진엽서이다. 어신행렬, 의장병, 백성들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각 사진 하단에는 제목이, 뒷면에는 ‘郵便はかき우편엽서’가 인쇄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순종황제 국장 사진첩, 1926년>

1926년에 있었던 순종황제(1874~1926년)의 국장을 촬영하여 발행한 사진첩이다. 국장의 준비 과정부터 영결식까지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 같은 해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 선포를 선포하였다. 이후 황실 의례를 황제국에 맞게 정비하고 황실의 위상을 높여, 자주독립 국가로서 대한제국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국 건립>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1897년 2월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지며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국호를 대한으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환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국격을 높인 고종은 국가 간 동급의 외교를 하고, 황제국에 맞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여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황제 즉위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897년, 보물, 복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897년(광무 1)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과 황후 · 황태자 책봉 등 의식의 절차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가마와 의장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대한제국 시기 예법을 규정한 책, 대한제국, 복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국에 맞는 예제禮制를 제정·시행하기 위해 만든 예전禮典이다. 《국조오례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중국 명의 의례를 참고하였다. 환구단 도면, 황제 복식, 깃발 등의 그림과 설명이 실려 있어 황제국으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명성황후 책봉 시 올린 금책, 대한제국 1897년, 보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할 때 내린 글을 새긴 금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옥으로 만든 옥책을 하사하였으나 황제국의 격식에 따라 금책으로 만들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명성황후 책봉 시 올린 금보, 대한제국 1897년, 보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인면에는 ‘황후지보(皇后之寶)’ 라고 새겼다. 이전에는 거북이 모양의 옥보였지만, 대한제국 시기에는 용의 형상을 한 금보로 제작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태조 · 장조 · 정조 ·순조 · 익종을 황제로 추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899년, 보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오른 뒤, 직계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 및 왕조 창업자인 태조를 황제로 추존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묘호도 일부 수정하여 ‘장종’을 ‘장조’로, ‘정종’을 ‘정조’로 ‘익종’을 ‘문조’로 변경하였으며, 이를 반영하여 어책과 어보를 제작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장조 · 정조 ·순조 · 문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만든 어보, 대한제국 1899년, 보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직계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제작한 옥보이다. 황제국의 격에 맞춰 용의 형상으로 손잡이를 제작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의왕 · 영왕을 책봉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0년, 보물>

1900년(광무 4) 고종의 두 아들 이강과 이은을 황제국의 격식에 맞게 각각 의왕, 영왕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의친왕부 인장, 대한제국 1900년경><영친왕부 인장, 대한제국 1900년경><영친왕부 총판 인장, 대한제국 1900년경>
<김용제를 궁내부 세금 대장 조사위원으로 임명하는 문서, 대한제국 1904년>

1904년(광무 8) 김용제를 황실 사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의 세금 대장 조사 위원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 ‘광무8년 9월 20일’ 이라는 임명 날짜가 쓰여 있고, 대한제국 황제 칙명 도장이 찍혀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근대적 관제 개편
고종은 국내외의 급변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고 근대적인 사업을 수행할 전담 부서를 수차례에 걸쳐 증설 · 세분화하며 관제를 개편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국가 사무와 왕실 사무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다. 궁내부는 왕실 사무뿐만 아니라 통신 · 철도 등의 근대화 정책도 이끌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개항 이후 조선은 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별기군, 친군영, 친위대와 시위대, 진위대를 차례로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성립 후에는 고종이 대원수가 되어 군을 직접 통솔하고, 원수부를 설치해 황제 중심의 근대적 군사체제를 확립하였다.

<친군영 인장과 함, 조선 1883년 경>

친군영의 인장과 인장을 담던 함이다. 친군영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수도 방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편성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해체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군사제도의 근대화
개항 이후 조선은 신식 군사기술의 수용과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81년(고종 18)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1882년(고종 19) 수도 방위 강화를 위해 친군영을 설치했다. 1895년(고종 32) 서울에 친위대와 시위대를, 지방 주요 도시에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9년(광무 3)에는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가 모든 군권을 통할하는 대원수에 올라 황제의 군권을 강화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대한제국 관보, 대한제국 1903년>

관보는 국가 주요정책을 국민에게 알려주기 위해 발간하던 간행물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의정부 총무국 관보과에서 담당하였다. 왕실의 여러 일들, 관리 임명 등 인사, 정책 홍보, 광고 등을 수록하였다. 전시된 유물은 1903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관보를 모아 놓은 것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국가운영체제의 정비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위해 국가운영체제 정비에 힘썼다. 특히 왕실 사무기구인 궁내부를 국가개혁을 이끌어갈 핵심 조직으로 삼아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의 근대화를 꾀하고,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또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를 공포하고, 《형법대전》을 반포하여 근대적인 법체계를 수립하는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취해진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한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황제의 황색 상징물>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한 이후 고종은 각종 국가 의례와 상징물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정비하였다. 어보와 궁궐처럼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과 공간에는 거북이나 봉황대신 용 문양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의복과 의례용품으로는 황색이 많이 사용되었다. 한편 국기로 제정된 태극기를 각종 행사 때 황실의 상징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황제의 50세 기념 진찬에 대한 기록, 대한제국 1901년, 보물>

1901년 고종의 50세를 기념한 잔치의 전모를 정리하여 간행한 책이다.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연 거행을 위한 준비 과정, 절차, 관련 물품과 참여한 사람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특히 권수에는 반차도, 정재도(呈才圖), 기용도(器用圖) 등 관련 도설을 수록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변화상>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의례와 제도가 조정되었다. 기존 조선의 국왕과 궁중에서 사용하던 각종 의례 용품도 붉은색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기 궁중 잔치를 기록한 그림에서 황색 의자와 각종 의례용품을 올려놓는 탁자, 황색 부채 등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향꽂이를 올려 놓는 탁자, 대한제국>
<황제가 앉는 의자, 대한제국>
<술병과 술잔을 올려놓는 탁자, 대한제국>

고종이 환구단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한 것은 조선이 독립된 황제국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의례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성립과 황제권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국가적 선언이었다. 즉, 환구단 제사는 황제의 권위와 국가의 자주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고종은 중국 사신의 숙소였던 남별궁에 환구단을 건립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중국의 제후국으로서 천제를 지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여겨 세조 대 이후 중단되었던 환구제도 대한제국기에 다시 시행되었다. 이곳에서 황제는 동지와 정월 첫 신일(辛日)에 황태자와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하늘 신(皇天上帝), 땅 신(黄地祗), 그리고 왕조의 시조인 태조고황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환구단 건설과 환구제의 시행은 독립된 황제국의 수립을 상징했다. 그러나 1913년 일본이 환구단 자리에 호텔을 지으면서, 현재는 신위를 보관하던 건물인 황궁우 등 일부 시설만 남아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환구제의 축식을 기록한 책, 대한제국 1907년, 복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환구제를 행할 때 신에게 고하는 글인 축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1897년(광무 1)과 1907년(융희 1)의 축식이 모두 실려 있어 고종과 순종 시기 환구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용머리 장식 국자, 대한제국>

술을 뜨는 데 사용한 제기로 손잡이 부분에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몸체는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붉은색으로 환구단을 의미하는 ‘구丘’자를 적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놋쇠 주걱, 대한제국>

곡식을 푸는 데 사용된 놋쇠 주걱이다. 윗면에 환구단을 의미하는 ‘구丘’자가 붉은색으로 적혀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국을 담는 제기, 대한제국>

간을 하지 않은 고깃국인 대갱을 담는데 사용한 제기이다. 윗면에 환구단을 의미하는 ‘구丘’자가 붉은색으로 적혀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환구제 때 축문을 올려두는 판, 대한제국>

환구제圜丘祭를 행할 때 기원 내용을 담은 축문을 올려두는 데 사용한 판이다. ‘환구축판(圜丘祝板)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붉은색으로 칠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환구단 건립 역사와 공간 배치>
<환구단 옛 사진>
<환구단(사적) 황궁우>

환구단 영역은 크게 1 환구단, 2 황궁우, 3 서쪽 재실, 4 동쪽 행각 영역으로 구분된다. 환구단은 원형의 담장과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황궁우, 재실 영역과 구분되었다. 장방형의 담장 남쪽에는 3칸의 황살문, 북쪽으로는 벽돌로 쌓은 아치형의 삼문이 자리 잡고 있었고, 동쪽과 서쪽에는 재실과 행각으로 향하는 1칸 짜리 문이 있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베이징 천단공원의 황궁우>
<신위를 모시는 용무늬 장식 의자, 대한제국>

환구단에서 제향을 지낼 때 신위를 모시는 데 사용한 의자이다. 각 모서리마다 도금한 용머리로 장식했으며, 의자의 등받이에도 용무늬를 장식하여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신좌 뒤에 설치하는 병풍, 대한제국>

황궁우皇穹宇에서 주요 신위를 봉안추安하는 신좌 뒤에 설치하는 병풍이다. 나무에 붉은 칠을 하였고, 구획된 칸마다 용, 봉황, 모란 등의 무늬를 새겼다. 각 모서리에 용머리 장식을 도금하여 품격을 높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2.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3.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4.27 확인)
  4.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4월 2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