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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대한제국] 황실 생활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황실은 일본 귀족으로 관리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족으로는 잘 알려진 인물은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그의 이복형인 의친왕 등이 있다. 영친왕은 마지막 황태자로 일본에서 오랜 세월 볼모 생활을 하였으며, 일본 귀족의 딸인 이방자와 결혼하였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또한 1960년대까지 창덕궁에서 마지막을 보낸후 조선왕실 중 마지막으로 왕릉에 묻혔다. 또한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대마도 귀족과 강제 결혼하여 불행한 삶을 살다 귀국하여 영친왕비와 함께 1980년대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은 자식이 많아 지금도 생존해 있는 후손들이 많은 편이다.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법궁이자 도시 근대화 사업의 중심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궁역을 확장하고 전각을 신축하였으며 궐내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근대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고, 이름도 고종의 궁호에 따라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황칠어좌, 대한제국>

어좌는 황제 또는 왕이 앉는 의자다. 옥좌 또는 보좌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어좌가 붉은색이었던 것과 달리 대한제국기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칠했다. 몸체 전면을 용무늬로 장식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금색 용머리를 끼웠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현 덕수궁)의 정전이다. 본래 중층의 건물로 지어졌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현재와 같은 단층으로 재건되었다. 이곳 중화전은 황제국의 정전답게 조선 궁궐과는 다른 요소가 돋보인다. 답도의 문양, 천장 장식물 등은 기존의 봉황 대신 용으로 조각하였고, 창호와 어좌 주변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사용하여 꾸몄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근대기 황실 궁궐 내부 모습>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하여 궁궐에는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서양식 가구와 장식용품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구와 생활용품 대부분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자두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샹들리에와 같은 전기 시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덕수궁, 창덕궁의 생활공간은 점차 서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덕수궁의 변전과 주요 전각>
<덕수궁 영역>

경운궁(현 덕수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의 현장이었다.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최대로 확장되었을때 영역이 현재의 3배에 이르렀다. 대한제국이 근대국가로 변모해 가는 중심에 있던 곳으로, 불과 13년이란 짧은 역사를 지닌 대한제국의 빛과 그늘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경운궁 중건 내용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7년, 보물>

경운궁이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전소된 직후 1906년(광무 10)까지 복구공사를 진행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화재 후 현재와 같이 단층으로 재건된 중화전의 모습 등 중건 이후 전각들에 대한 그림과 설명을 담고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중화전 영건 내용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7년, 보물>

1901년(광무 5)부터 1902년(광무 6)까지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을 지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중화전은 고종이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사용하면서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 중층 건물이 었음을 도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창덕궁 평면도, 19세기 ~ 20세기 초>

창덕궁의 배치를 나타낸 평면도이다. 도면에는 왕의 어머니이자 선왕의 왕비인 왕대비가 거처했던 수정전과 하월지, 그리고 집상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수정전은 본래 수정당으로 지은 대비전이었으나, 1794년(정조 18) 혜경궁 홍씨(1735~1816년)의 환갑잔치를 행하는 장소로 사용하면서 위계를 높여 수정전으로 바꾸어 불렀다. 수정전은 1907년경 제작된 <동궐도형>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평면도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돈덕전 현판, 대한제국 1901년경>

경운궁 돈덕전에 걸었던 현판이다. 돈덕전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연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1907년(융희 1)에는 이곳에서 순종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의 역사와 함께 한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고종 사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현판의 글씨체는 당나라 구양순의 글씨를 문헌에서 찾아 모아 새긴 것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경운궁 사진엽서, 20세기 초<<요시히토 황태자 한국 방문 기념 사진첩, 일본 1907년>

훗날의 다이쇼 천황(재위 1912~1926년)인 요시히토가 황태자 시절인 1907년(융희 1) 한국을 방문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에서 제작한 사진첩이다. 황태자가 경성에 도착해서 방문한 주요 장소들과 함께 궁궐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관문각 현판, 조선 1875년 경>

궁궐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에 걸었던 현판으로, 고종의 글씨를 새겼다. 경복궁 건청궁 뒤편에 위치했던 관문각은 본래 왕실 서재로 사용되었다. 1891년(고종28)에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 I. Sabatine에 의해 서양식 벽돌 건물로 개축되었다가 1901년경 철거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궁궐 내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었다. 에디슨이 전등회사를 설립한지 불과 8년 뒤인 1887년에 건청궁에 한국 최초의전등이 켜졌다. 덕수궁 석조전 등 서구식 건물을 짓고 내부에 라디에이터 난방과 수세식 화장실 같은 선진적 위생 시설을 갖추었다. 전기와 함께 전화기를 설치해 실시간 통신 업무를 수행했으며, 황실 전용 자동차를 도입했다.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

서양문물이 수용되면서 궁궐은 전통적인 모습과 함께 서양식이 결합된 형태로 변모하였다. 특히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은 궁궐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7년(고종 24) 경복궁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켜지며 전기시설이 궁궐에 도입되었으며, 침대와 의자가 배치되거나 샹들리에와 커튼 박스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궁궐에 근대 수도시설이 갖추어진 다음에는 서양식 요리를 만드는 서양식 주방에 수도를 연결하고,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도 설치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특별전, 2026년)

<창덕궁에 설치한 수도관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대한제국 1908년>

1908년 10월 22일에 제작된 수도관을 표시한 지도다. 도면에 대조전, 희정당 등의 건물명이 기입되어 있어 창덕궁의 도면임을 알 수 있다. 근대기 궁궐에 수도시설이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커튼 장식 스케치, 20세기 초, 복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창덕궁을 수리하면서 전각 내부에 설치할 커튼의 모습을 가상해서 그린 스케치다. 3중으로 설치된 커튼 중에 가운데의 푸른색 커튼에는 중앙에 오얏꽃 문양을, 좌우에 용 문양을 배치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근대시설을 갖춘 궁궐의 모습, 일본 1911년>

일본 유라쿠사(有樂社)에서 간행한 사진첩 《일본지 조선》에 실린 궁궐 모습이다. 대한제국 황실 모습과 함께 국내 산업 및 풍속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황실 생활공간을 보여 주는 사진 자료들도 있어 근대시설이 도입된 궁궐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유리전등갓, 20세기 초>

궁궐 전각 천장에 설치했던 전등기구의 유리갓이다. 상부 중앙에는 연꽃 봉오리 꼭지가 부착되어 있으며, 가운데가 볼록한 타원형이다. 등갓의 가운데에는 3개의 오얏꽃(자두꽃)이 장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대한제국 시기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서구의 근대 문명이 격동적으로 교차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궁궐의 가구와 생활용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서구식 생활 양식의 도입되면서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에서 의자와 책상을 사용하는 입식 생활로 바뀌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가구와 용품의 장식성이 극대화되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가구, 식기, 커튼, 카펫 등 모든 생활용품에 새겨졌으며, 황제만이 사용할 있었던 황색이 가구의 장식 등에 사용되었다. 기존 조선의 전통 목공예 기술과 서양의 새로운 소재 및 기술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가 나타났다.

<대한제국 황실 생활공간>

대한제국 황실 생활공간
대한제국기 황실에는 의·식·주를 망라하여 서양의 문화가 대량 유입되었다. 궁궐에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내부에는 높은 천장에 화려한 조명과 서양식 커튼, 카펫으로 장식되고, 침대, 의자, 탁자 등의 서양식 가구들이 비치되었다. 서양식 가구의 도입으로 황실 가족들의 생활은 점차 입식 생활로 변모하였다. 또 황궁 내 서양식 주방과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 사용하는 물품들도 서구식으로 변화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상단을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책상으로, 손잡이가 있는 두 개의 서랍이 달려 있다.

<대리석 책상>

프랑스 바로크식 탁자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조각이 장식되어 있으며 상단 각 귀퉁이에는 꽃문양이 그려져 있다.

<탁자>
<<유란부幽蘭賦>를 수놓은 병풍, 대한제국 1904년>

푸른 비단 바탕에 금색 실로 중국 당나라 시인 한백용의 시 「유란부」를 수놓은 6폭 병풍이다. 여섯 폭에 걸쳐 행서로 쓰인 「유란부」는 북송대 서예가인 황정견의 글씨이다. 석벽에 새긴 황정견 글씨의 탁본을 서화가 김규진이 얻었고, 이를 자수병풍으로 만들어 1904년 고종에게 헌상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김규진이 예서로 적은 관기 역시 병풍 여섯 번째 폭 왼쪽 아래에 수놓아져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양쪽으로 접을 수 있는 접이식 탁자이다. 다리에는 바퀴를 달아 이동을 편리하게 하고 카펫에 자국을 남기지 않게 하였다.

<접이식 탁자>
<대한제국기 황실 가구>

대한제국기에는 궁궐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내부도 서양식 가구와 소품들로 꾸몄다. 대표적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의 석조전에서 사용했던 가구 중에는 영국의 메이플사(Maple&Co.) 제품이 다수 있었다. 1905~1910년 발행된 메이플사의 가구 카탈로그에서는 20세기 초 석조전에서 사용했던 가구와 유사한 가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된 다양한 형태의 탁자이다. 상단에는 대리석을 부착하였고,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가미하였는데, 금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보조 탁자>

피아노를 연상시키는 로코코 양식의 서랍식 책상이다. 책상에는 18세기 영국의 초상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초상화를 포함한 여러 인물화가 그려져 있다. 13개의 서랍이 달려 있고, 다리에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을 편리하게 하였다.

<서랍식 책상>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문양은 오얏꽃이었다. 오얏 리(李)’에서 따온 문양으로, 황실의 가문적 상징을 국가적 상징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우주 만물의 근원과 조화를 상징하는 태극(太極)은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확립되면서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자리잡았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과 황비를 상지하는 봉황이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독수리나 사자가 주로 사용되는 서양과는 달리 조선은 매 문양을 대한제국 군대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대한제국 상징 문양>

대한제국 시기 주로 쓰였던 상징 문양은 태극, 오얏꽃, 무궁화, 매 등 네 가지였다. 국가 상징은 개항 이후 국제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필요해지면서 제정되었다. 국가 상징은 황실을 중심으로 민간까지 널리 사용되었고, 의복 ·공예품 ·국기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보급됨으로써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인식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여러 근대적인 제도들과 함께 활용됨으로써 대한제국이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순종황제가 수여한 훈장증서, 대한제국 1910년>
<순종황제가 수여한 태극훈장, 대한제국 1910년>

순종황제가 수여한 훈장증서와 태극훈장 일괄이다. 훈장증서 테두리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 · 무궁화 ·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훈장 몸체는 태극무늬로, 몸체와 띠를 연결하는 고리는 오얏꽃 모양으로 제작하였다. 훈장 구성 중 하나로 왼쪽 옷깃에 다는 배지는 원형에 태극무늬를 수놓았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영친왕 오찬 초청장, 1926년>

1926년 4월 5일 영친왕 사저에서 열렸던 오찬에 관한 초청장과 식단표, 봉투 세트이다. 이왕직사무관 백작 고의경이 안도 와키코에게 보낸 것으로, 초청장에는 영친왕 부부가 유럽 순방을 떠나기 전 인사를 위해 오찬을 개최한다는 내용이 있다. 식단표에는 전채 요리, 계청갱, 닭새우 요리, 소고기 요리 등이 기록되어 있다. 봉투, 초청장, 식단표에는 각각 단판형의 오얏꽃 무늬를 양각으로 압인하고 금박을 찍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고종이 학부에 내린 훈시, 1904년>

1904년(광무 8) 10월 고종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에게 내린 훈시이다. 실용학문을 강구하고 지식을 쌓으며 불굴의 정신을 길러 조국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을 기여하도록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둘레에 금박의 테두리를 두르고 네 모서리에 오얏꽃 무늬를 장식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의 후원으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황실 공예품 제작 기관이었다. 사라져가는 전통 공예의 맥을 잇고, 황실에 필요한 서구식 생활용품을 근대적인 기술로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황실에서 사용한 여러 생활용품>

개항과 함께 각종 서양 물품들이 대한제국에 소개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프랑스 · 영국·독일 등지에서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의 자기를 수입하여 화병이나 세면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다. 또 서구식 식생활의 유입으로 서양식 식기류와 조리 용구를 이용하였다. 이들 생활용품의 대부분에는 이를 생산한 외국회사 명칭이 찍혀있거나 오얏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은제 주전자, 20세기 초>
<목제 보관함, 20세기 초>

둥근 형태의 찻주전자와 목제 보관 상자이다. 주전자 뚜껑 손잡이는 비취옥으로 만들고 꽃모양 은판으로 장식했다. 주전자 몸체 바닥면에는 ‘美’와 ‘純銀’을, 보관 상자 겉면에는 은제로 된 원형 찻주전자를 의미하는 ‘白銀圓茶罐’을 새겼다. 상자 뚜껑 안쪽에는 ‘京城’, ‘李王家美術工場造’라고 인쇄된 상표가 붙어있어 이왕가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미술품제작소
대한제국 황실은 사라져가는 전통기술의 보존과 부흥, 그리고 민간 수요에 부응할 수 있는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3년)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성미술품제작소에서는 직조, 염색, 금·은·백·동 및 보석 세공, 목공, 자수 등을 취급하였고 점차 도기, 석공까지 다루었다.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이후 운영주체의 변화에 따라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1922년에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명칭이 바뀌어 1936년까지 운영되었다. 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은 공예품에는 제작소와 재질을 알려주는 각인刻印이 있었다. 주로 사용된 각인으로는 미술품제작소를 의미하는 ‘미美’와 재질을 뜻하는 ‘순은’ 등이 있다. 이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공예품임을 나타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은제 향로, 20세기 초>

은으로 만든 소형 향로로 고대 중국의 제례용기인 鼎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둥근 몸체에 다리는 짐승 다리 모양으로 표현했다. 몸체에는 검은색으로 만자문과 기룡문(상상의 동물인 夔鳳 무늬)을 새겨 장식했다. 바닥면에는 재질과 제작소를 알려주는 ‘美’와 ‘純銀’을 새겼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은제 오얏꽃 장식 병, 20세기 초>

실내 장식용 은제 병이다. 몸체에는 오얏꽃 문양을 새겼다. 오른쪽 병은 오얏꽃 장식 아래 유럽으로 건너간 것을 기념한다는 뜻의 ‘도구기념’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 영친왕이 1927년 ~1928년 유럽을 순방한 것을 긴념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침 뱉는 그릇, 20세기 초>

백자로 만든 침 뱉는 그릇으로, 중앙에 적색의 오얏꽃 무늬가 있다. 입 부분에는 세척 시 분리할 수 있도록 깔때기를 씌웠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파도 무늬 욕실용품, 독일 20세기 초>

황실에서 사용하였던 욕실용품 세트로 발을 씻는 욕조, 세수용 물병과 대야, 오수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면에 푸른 파도 무늬를 두르고 가장자리에 금색 안료를 뿌려 장식하였다. 바닥에는 독일 도자기 회사의 상표(VILLEROY&BOCH METTLACH)가 녹색으로 찍혀 있어 제작사를 알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오얏꽃 무늬 합, 20세기 초>

황실에서 사용한 백자 대접과 뚜껑이다. 뚜껑의 가장자리에는 굵고 가는 선을 두르고, 뚜껑과 대접의 측면에 오얏꽃을 새겨 넣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전선사가 새겨진 접시, 1911년 이전>

접시 상단에 금색의 오얏꽃과 ‘전선사典膳司’를 새긴 둥근 백자 접시이다. 접시 가장자리를 두껍고 가는 금색의 이중선으로 장식했다. 전선사는 궁중의 연회 · 음식 등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1895년에 설치되었다가 1911년에 해체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은제 오얏꽃 장식 잔, 20세기 초><은제 숟가락, 20세기 초>
<철제로 만든 제과형틀, 20세기 초>
<철제로 만든 제과형틀, 20세기 초>

와플, 젤리, 케이크 등 서양식 다과를 만드는 데 사용한 형틀이다. 하단에 원형의 십자가가 그려진 마크가 찍혀있는데 이는 ‘벤헴 엔 프루드Benham&Froud’라는 영국 회사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만 사용했던 마크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전선사가 새겨진 식기 상자, 1911년 이전>

음식을 담아 옮길 수 있게 만든 상자이다. 상자 내부에는 흑칠을 한 식기 두 개가 들어 있으며, 상자를 여는 문에는 ‘궁내부전선사宮內部典膳司’ 라고 적혀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유리병과 유리컵, 20세기 초>

무늬를 넣어 장식한 유리병과 유리컵이다. 유리병 상단에 꽃과 식물 무늬가 둘러져 있으며, 유리컵 중앙에는 오얏꽃 무늬를 미세한 음각선으로 그려 넣고 기하학적 무늬 띠를 둘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근대식 연회와 황실 식기>

개항 이후 세계 각국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서양의 외교관 등과 교류하기 위한 서양식 궁정연회가 도입되었다. 식탁과 의자 같은 서양식 가구들이 식당에 갖춰졌고 양식기가 유입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근대기 수입 도자기들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자기 회사의 제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금색 오얏꽃 무늬로 장식한 것들이 많아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주문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찬장에는 주로 서양식 요리가 준비되었고 조선음식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트뤼플Truffle, 조선의 애저탕哀猪湯 요리가 나오는 등 동서양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성대한 만찬이었으며 전통술, 샴페인, 맥주 등의 주류와 담배 같은 기호식품도 마련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대한제국 초기에는 조선의 전통을 정비하다가, 1900년을 기점으로 파격적인 서구식 군복 양식을 도입하게 된다. 문관은 유럽식 검은색 코트 형태의 제복을 도입했으며, 무관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독일과 일본식 군복의 영향을 받아 꼿꼿한 세운 깃과 견장, 측면 줄무늬 바지가 특징이다.

<서양식 관복장 도입>

대한제국 황실은 중요한 행사에 황제국 격식에 맞춘 전통 관복을 착용하여 전통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서양식 복식을 도입하였다. 서양식 관복을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한 시기는 1895년 을미개혁 때였다. 우선 군의 근대화에 발맞춰 무관복부터 서양식이 도입되었고, 1900년 에는 문관복도 서양식을 채택하였다. 서양식 관복은 신분에 따라 문양의 종류와 개수에 차등을 두었다. 군복의 표장으로는 오얏꽃을 채택하였다. 문관 복장의 주문양으로는 무궁화를 택하였는데, 궁내부 관원의 경우는 오얏꽃을 주문양으로 활용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황실의 군예복 착용 모습>

대한제국기 군복은 지위에 따라 계급을 나타내기 위한 부착물의 형태가 달랐다. 옷소매에 부착한 ‘인시’자형 계급장[수장체후]의 경우, 원수부의 대원수인 황제는 11줄, 원수인 황태자는 10줄이었고, 대장은 9줄, 부장페하은 8줄, 참위행평는 1줄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 속에서도 고종, 순종, 영친왕 등이 황실의 군예복을 차려입고 위엄을 갖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부장 일상복, 대한제국 20세기 초>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착용한 일상복이다. 옷깃에 은색 실로 수놓은 별의 개수와 소매의 ‘人인’ 자형 장식 줄의 개수로 지위를 표시했다. 부장은 장관급으로 오늘날 중장에 해당한다. 별 3개와 장식 줄 8개로 지위를 표시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오얏꽃 무늬 어깨줄, 20세기 초><군 예복 허리띠, 20세기>
<참위 일상복, 대한제국, 20세기 초>

한제국 육군 참위가 착용한 일상복이다. 참위는 위관급으로 오늘날 소위에 해당한다. 옷깃에 별 1개, 소매 장식 줄 1개로 지위를 나타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대한제국은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관제 정비의 일환으로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훈장 제도를 마련하였다. 1900년 금척대훈장·이화대훈장·태극장·자응장을 제정하였고, 이후 팔괘장과 서성대훈장을 추가하였다. 1907년에는 황실 여성과 공주·옹주에게 수여하는 서봉장을 새로 제정하였다.

<대한제국의 훈장제도>

대한제국의 훈장제도는 1900년(광무 4) <훈장조례>를 제정하면서 시행되었다. 금척대훈장, 이화대혼장, 태극장, 자응장 4종이 처음 마련되었다가, 1902년에는 팔괘장이 태극장과 같은 격으로 추가되었고, 1902년에는 여성에게 수여하는 서봉장이 제정되었다. 훈장은 패용한 자의 지위를 드러냄과 동시에 국가를 나타내는 것이어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 태극, 매 등을 훈장의 문양으로 채택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태극장, 대한제국 20세기>
<이화대훈장, 대한제국 20세기 초>
<팔괘장, 대한제국 20세기 초>
<서성대훈장, 대한제국 20세기 초>
<연미복, 대한제국 20세기 초>

서양식 예복으로, 상의와 하의, 조끼로 구성되었다. 상의 뒷자락이 제비 꼬리처럼 길게 갈라져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었다. 1900년 《문관복장규칙》을 제정해 서양식 문관복을 제정하면서 약식 예복으로 공식적인 행사에서 착용할 수 있게 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문관 칙임관 1등 대례복, 대한제국, 재현>

1900년(광무 4)에 제정한「문관복장규칙」에 규정되어 있는 문관 칙임관(정1품~종2품의 관료) 1등 대례복이다. 대례복은 대한제국 시기 문관들이 황제가 참석하는 공식적인 국가 행사와 외교 행사, 궁중 연회 때 입었던 제복이다. 대례복 상의에는 대한제국 상징 문양의 하나인 무궁화를 수놓았는데 무궁화의 개수로 등급을 나타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어린 시절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고난의 삶을 살았다. 영친왕비는 일본 황족 출신이지만, 영친왕과 결혼 후 한국으로 귀화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이었으나, 서로에 대한 신뢰로 평생을 함께 했다. 해방 후 오랜 기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1963년이 되어서야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들이 남긴 황실 복식과 유물은 대한제국 시기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대한제국 황실가족>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일시 ‘귀국했던 1918년에 찍은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 부부의 자개병풍, 20세기>
<영친왕 부부 사진>
<붓걸이, 20세기>
<연적, 각이 진 주전자, 20세기>
<덕혜옹주가 작사한 노래 악보, 1925년>

덕혜옹주가 작사한 노래 악보이다. 덕혜옹주는 경성 일출소학교 5학년이던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다. 이 악보에는 덕혜옹주가 일본 도쿄에서 교육을 받던 당시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작사한 두 노래가 실려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조선풍경.인속사진첩, 1911년>

일한서방 · 일지출상행 · 해시상회에서 발행한 사진첩이다. 당시 조선의 풍경 및 풍속 사진과 함께 대한제국 황실 인물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고종, 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을 각각 덕수궁이태왕전하, 창덕궁이왕전하, 창덕궁비전하, 이왕세자은전하로 표기하고 있어 대한제국 황족을 일본의 왕공족으로 격하시킨 사실을 보여준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황실황족성감, 20세기 초>

일본 황실 인물들의 사진과 이력을 모은 책이다. 고종, 순종과 황후, 영친왕 및 의친왕 부부. 의친왕의 아들 등 대한제국 황실 인물들의 사진과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한일강제병합조약으로 일본 황실에 대한제국 황실을 포함시키고 황족이 아닌 왕공족으로 격하시켰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금지옥엽첩, 1928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순종황제 어차와 순정효황후 어차는 단순한 탈것을 넘어, 대한제국 황실의 근대화 의지와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내부는 서구식 자동차임에도 불구하고, 좌석과 실내 마감을 금색 비단(황색 비단)으로 장식하여 황실의 전통적인 화려함을 유지했다. 당시 기술적 한계로 타이어 내부에는 공기가 들어가지만, 휠 자체는 튼튼한 목재로 제작되었다.

<순종황제 어차><순정효황후 어차>
<순종황제 어차, 1918년경,>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로 미국GM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7인승, 31.25마력, 8기통 엔진, 배기량 5,153cc로 연식은 1918년경으로 추정된다. 차체는 철재가 아닌 목재이고 외부는 칠향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20대만 남아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순정효황후 어차, 1914년 경>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탔던 어차로 영국의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 20마력, 4기통 엔진,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경으로 추정된다. 순종황제 어차와 같이 차체는 목재이고 외부는 칠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마감했다. 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동차로 순종황제 어차와 함께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황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26년
  2.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3.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4.27 확인)
  4.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4월 2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