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무장읍성(사적)이다. 조선초 태종 때(1417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 행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성곽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 위에 돌과 흙을 이용해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약 1.2km 정도이며, 남문과 동문을 두고 있다. 성 안에 남아 있는 관아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다. 최근 비격진천뢰가 발굴된 ‘군기고’, 연못 옆 누각인 ‘읍취루’가 복원되어 있다. 무장읍성은 성벽과 관아 건물을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동시에 건립되어 조선 초기 읍성 계획과 관아 배치 형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무장읍성은 둘레 1.2km 정도이다.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완만하게 경사진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문으로 남문과 동문을 두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남문을 비롯하여 성벽 대부분이 최근에 정비되어 옛모습을 찾고 있다.


남문(진무루)와 주변 성벽
남문은 공식 명칭으로 ‘진무루(鎭茂樓)’ 또는 ‘읍취루(挹翠樓)’라 불린다. 정문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도 무장면 소재지와 연결되고 있다. 남문은 공식 명칭으로 ‘진무루(鎭茂樓)’ 또는 ‘읍취루(挹翠樓)’라 불린다. 정문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도 무장면 소재지와 연결되고 있다. 남문의 가장 큰 특징은 문 바깥쪽을 반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옹성이다. 적이 성문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게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로, 방어력을 극대화했다. 최근에 복원사업을 통해 복원한 부분이다.






문루인 진무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올린 당당한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진무루(鎮茂樓)
진무루는 무장읍성의 남문으로 무장읍성을 세울 때(1417) 처음 만들어졌으며, 선조 14년(1581)에 재건하였다. 19세기 <전라도무장현도>에는 남문루로 되어 있으며, 1935년 <호남지>에는 진무루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중에 이름이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 4년(1612)부터 다섯 번에 걸쳐 새롭게 다시 지었으며, 1975년에는 석축을 보수 하였고, 1984년에는 남문을 해체하여 보수하는 등 지속적인 보수와 정비가 이뤄졌다. 문루는 지상에서 2m 떨어진 성벽 위에 설치되었으며, 누마루의 가장자리에는 난간이 둘러있다. 좌우의 통로는 높이 2.8m의 본성과 연결되며, 중간에 폭 3.1m의 성문이 있다. 2011년에 기존의 진무루를 해체하고 발굴조사 결과를 근거로 원래의 자리에 옮겨 지으며, 옹성도 함께 복원하였다. (안내문, 고창군청, 2026년)
성벽은 비교적 큰 돌을 다듬어 쌓은 석축성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2m 정도이고, 성문 주위에만 방어를 위한 여장을 설치하고 있다. 성벽 바깥쪽으로 해자를 파서 적을 막았는데, 해자는 폭 4m·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남문 동쪽으로는 경사진 지형을 따라서 동문까지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그 안쪽으로 연못과 군기소, 옛훈령청 자리 등이 보인다.

성벽 안쪽에 있는 연못과 누각인 읍취루이다. 연못은 식수를 위한 시설이며, 관아 누각은 손님을 맞이하여 연회를 벌이거나, 군사 회의를 위한 장소이다.




성벽 안쪽으로는 조선시대 군사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인 군기고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비격진천뢰 11점, 철제 무기류, 석환 등이 발굴되었다.

이 비격진천뢰는 고창 무장읍성의 군기고(추정)에서 출토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주로 자연석을 다듬어 축조하였다. 아래쪽에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쌓는 방식이 사용되어 안정감을 높였다. 성벽 내부는 흙과 잡석으로 채워 견고함을 강화하였다. 외벽은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축조되었다. 이러한 축성 방식은 성벽의 무게를 분산시키고 붕괴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다.



동문은 읍치에서 비교적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남문과 마찬가지로 바깥쪽에 옹성을 두고 있다. 성문 양쪽에 치성같은 방어시설을 두고 있지는 않다.


현재 문루는 복원되어 있지 않다.







남문에서 서쪽방향으로 동문까지는 성문이 없이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높지는 않지문 북서쪽이 읍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당하며 장대(將臺)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읍성 내부에는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동헌인 ‘취백당’과 국왕을 상징하는 패를 모시고 사신들이 머물던 객사인 ‘송사지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무장객사는 조선시대 무장현의 객사 건물로, 중앙의 정청과 좌우의 익헌으로 이루어진 관아 건축이다.


무장동헌은 조선시대 무장현의 수령이 정무를 보던 관아의 중심 건물이다. 조선 1565년에 세워졌으며, 1914년까지 동헌으로 사용되었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의 중앙에 만든 성곽과 관아 시설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두 고을의 앞 글자를 따 무장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무장읍성은 해발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야트막한 야산을 네모난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 읍성이다. 성벽은 내벽과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둘레는 1,140m이며, 동벽 228m, 서벽 258m, 북벽 314m, 남벽 340m 정도이다. 성곽에는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으며, 바깥쪽에는 반원형의 옹성이 있다. 남문인 진무루(鎮茂樓)는 태종 17년1417 읍성을 세울 때 처음 만들어졌고,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세워졌으며 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해자의 둘레는 약 638m로 성벽의 두 배에 이른다. 동헌은 현감이 집무 하던 곳으로 읍성을 세울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하나 현재의 동헌은 명종 20년(1565)에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1983년에 다시 지은 후 전면에 ‘취백당(翠白堂)’ 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네 귀에 추녀를 겹처마로 만들어 장중하다. 객사는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의 뒷 글자를 따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선조 14년1581에 세워졌다고 하나, 1988년에 발견된 상량문에는 인조 27년(1649)과 영조 12년(1736)에 손보고 고친 것으로 전한다. 객사의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송사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익헌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정청보다 지붕을 낮게 하였다. 건물은 높이 80cm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전면 중앙에는 월대가 놓여 있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조선 초기 읍성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되어 1991년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고창군은 2003년에 복원과 정비 계획을 수립하여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성벽과 문지, 내부 건물지, 연지, 해자 등 무장읍성 전역의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로써 무장읍성의 주 출입로였던 남문과 객사, 객사 출입문의 원래 위치와 《무장읍지》 등에 기록된 각종 건물지와 연못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읍성에 무기를 보관했던 군기고 자리에서 조선의 비밀병기라고 알려진 ‘비격진천뢰’11점을 발견하였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2004년부터 성벽을 비롯하여 남문과 남문 옹성, 연못, 읍취루, 동헌, 내삼문, 군기고 등 관아건물과 창고를 복원하고 정비하여 읍성으로서 기본적인 틀을 갖추었다. 무장현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농민군들이 맨 처음 봉기한 역사의 현장이다. 동학 농민군의 흔적은 무장읍성 객사의 현판을 농민군의 자치 기구인 ‘집강소’로 내건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고창군청, 2026년)
<출처>
- 안내문, 고창군청, 2026년
- 안내문, 진주박물관, 2024년
- ‘사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10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10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