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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백의종군

정유재란이 시작되었을 때 왜군의 이간계로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 정탁 등 몇몇 대신들의 목숨을 건 변호로 다시 한번 백의종군 명령을 받는다. 이 시기 원균은 무리한 출정으로 칠천량 해전(1597년 7월)에서 대패하면서 조선 수군은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살아남은 배 12척과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명량대첩의 기적을 일궈냈다.

1597년 두 번째 전면 침략 명령서에는 조선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무모한 전략 대신,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남부 지방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하라”는 매우 잔혹하고 현실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주요 내용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철저한 유린하고 군인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죽이고, 그 증거로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한 차례 쓸어버린 후에는 무리하게 북상하지 말고, 순천, 사천, 울산 등 남해안 거점에 견고한 성(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할 기지를 만들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명령한 문서, 豊臣秀吉朱印狀, 일본 1597년, 일본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
<뒷부분>

1597년(선조 30)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을 결정한 후 휘하 다이묘들에게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린 문서이다. 이 문서에서 특히 전라도는 남김없이 철저히 공략한 후 전략거점성을 지을 장소를 찾으라고 하였다. 재침을 통해 조선의 남부를 확실하게 제압하고자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당시 우의정이었던 정탁은 선조의 서슬 퍼런 분노 앞에서도 장군을 변호하는 목숨을 건 상소문인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를 올렸다. 왕의 분노가 극에 달해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할 때, 정탁이 총대를 메고 사형만은 면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내었다. 당시 체찰사이자 영의정이었던 이원익 역시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구명했다.

<이순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탁이 쓴 상소의 초본, 신구이순신차초, 조선 1597년, 예천박물관>

옥에 갇힌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정탁이 쓴 상소, <신구이순신차 伸救李舜臣箚>의 초본이다. 이 상소는 이순신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순신과 같은 장수는 다시 얻기 어려우며, 그를 죽인다면 오히려 적에게 이로울 것이므로 죽음을 면하게 해 다시 한번 공을 세우게 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약포집》에 따르면 정탁이 올린 두번째 구명 상소로 준비된 글이며, 첫 번째 상소인 <이순신옥사의>로 이미 사형이 감해져 실제로 올리지는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상소보다 훨씬 더 간곡하게 이순신의 구명을 청하는 정탁의 뜻이 담긴 글이다. 《선현유적先賢遺蹟》이라는 표제로 장첩되었고 중간 중간 상소문을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의 파직을 반대한 이원익의 상소, 四道體察使時狀啓, 조선 1597년, 국립진주박물관>

1597년(선조 30) 2월 1일, 도체찰사로 있던 이원익이 이순신의 파직을 만류하는 내용으로 올린 장계이다. 이원익의 글을 모은 문집 《오리집》중 속집에 수록되어 있다. 1596년(선조 29) 가을,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하려는 조정의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원익은 이순신이 가장 탁월한 장수이며, 원균은 부적합하다는 소신을 여러 차례 펼쳤다. 1598년(선조31) 초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되자 당시 야전에 있던 이원익은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출전을 머뭇거린 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이순신이 없다면 적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순신을 변호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시련과 좌절의 바다를 넘어, 맑았다. 옥문을 나왔다. 백의종군
1596년 9월,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재침략을 준비했습니다. 일본의 거짓 정보를 믿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미리 바다에 나가 막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이 적의 계략이라 생각했고 군사 정비에도 시간이 걸려 출전이 늦어졌습니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출전을 지연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이순신의 목숨이 위태롭자 이원익은 이순신을 죽인 후 대안이 있는지 직언하였고, 정탁은 간곡한 상소를 올려 이순신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4월 1일, 이순신은 마침내 옥문을 나와 권율 장군 휘하의 부하로 백의종군의 길에 올랐습니다. 도중에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큰 슬픔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칠전량 해전(漆川梁海戰)은 1597년 거제도 북쪽 칠전량 유역에서 조선 수군과 왜 수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약 7년간의 임진왜란·정유재란 역사상 조선 수군이 당한 최초이자 유일한 전멸에 가까운 대패였으며, 조선 왕조 전체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패배로 인해 조선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왜군에게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

<1 창원 이명리 출토 조총의 총신, 조선, 경남 창원시 진전면 이명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칠천량전투 당시 진해만 방면으로 탈출한 조선군이 상륙 후 벌였던 소규모 전투와 관련된 무기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창원 이명리 출토 삼총통, 조선, 경남 창원시 진전면 이명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2 창원 이명리 출토 삼총통, 조선, 경남 창원시 진전면 이명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삼총통은 조선 전기부터 사용된 총기류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명량해전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단 13척이 울돌목에서 왜선 133척을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이 전투는 단순한 해전 승리를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의 멸망을 막아내고 전쟁의 판도를 바꾼 극적인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명량해전에서 치명타를 입은 왜 수군은 더 이상 서해 진입을 시도하지 못하고 남해안 왜성 지대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3 명량 해역에서 출수된 소소승자총통, 조선, 전남 진도군 오류리 해역 출수, 국립해양유산연구소>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진도군 오류리 해역에서 출수된 소소승자총통이다. 자루 부분의 명문을 통해 1588년(선조 21) 전라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영이 만든 총통임을 알 수 있다. 명문의 ‘소소승자’라는 명칭은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외형은 소승자총통이지만 가늠자와 가늠쇠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총통과 함께 석환과 노기도 출수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칠천량 해전의 참혹한 패배 직후, 선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조치는 조선 조정의 절박함과 선조 임금의 굴욕적인 항복, 그리고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가졌던 대체 불가능한 상징성을 모두 담고 있다.

<1 모친상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 문서, 起復授職教書, 조선 1597년, 현충사, 보물>

칠천량해전 후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린문서이다. ‘기복起復’이란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나라의 필요에 의하여 부모상을 당하여 휴직중인 관료에게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을 뜻한다. 당시 이순신은 모친상 중이 었다. 선조는 이 교서에서 임진년(1592년)부터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파직하고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다시 충청 · 전라 ·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또 한 번 나라를 구해주기를 당부했다. 국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의 교서는 매우 드문데, 그만큼 당시의 전황이 다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받으며 밀부와 함께 받은 문서, 賜符諭書, 조선 1597년, 현충사, 보물>

1597년(선조 30) 7월 2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 되면서 받은 유서이다. 지방의 군사 지휘권을 가진 관직에 제수될 때에는 반드시 유서와 함께 밀부를 받는다.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으로 흩어진 조선 수군을 수습하기 위하여 남해안 연안을 가던 중, 8월 3일 경상도 진주 수곡에서 이 유서와 <기복수직교서>를 함께 받았다. 이순신은 교서를 받기 전날 밤,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꾸었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국왕이 지방군의 지휘권자에게 내린 증명패와 주머니, 조선 고려대학교 박물관>

조선시대 국왕이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관찰사, 절도사에게 내린 병력 동원 증명패이다. 밀부는 동글납작한 나무패 앞면 가운데에 1부터 45까지 숫자와 ‘좌’·’우’를 새기고 뒷면에 국왕의 서명인 어압(御押)을 새겼다. 밀부를 받은 관원은 왕에게 직접 장계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밀부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의복의 왼편에 매달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순신은 1591년(선조24)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될 때에는 제29호 밀부를, 첫 번째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될 때에는 제10호 밀부를, 그리고 1597년 (선조 30)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될 때에는 제 7 호 밀부를 받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명량대첩, 물러나 피한들 살 수 있겠느냐!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으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거의 궤멸하자 이순신은 또다시 통곡했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임명장에 선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선조는 12척만 남은 수군으로는 일본 수군을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편입시키려 했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며 수군을 지켰습니다. 이순신은 수군을 모으고 전선을 수습한 뒤 또 한 척을 더하여 9월 16일, 진도 앞바다 울돌목(명량)에서 일본 전선 133척을 맞아 싸웠습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수의 변화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명량대첩 후 이순신은 보화도에 이어 고금도로 옮겨 수군을 재정비 했습니다. 1598년 8월, 진린제육 제독이 이끄는 명나라의 수군이 고금도로 합류하자 조· 명연합군으로 일본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의 장수들과 조정, 그리고 황제(만력제)까지 이순신 장군을 지켜본 명나라의 평가는 매우 높았으며 여러 기록과 정황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1 복숭아 모양 잔과 받침, 桃盃·俱臺, 조선 16세기, 현충사, 보물>

이순신 종가에 전하는 복숭아 모양의 잔과 받침이다. 《난중일기》친필본 중 《무술일기》(1598)에 명나라 장수들로부터 받은 선물 목록이 적혀 있는데, 그중 파총 진국경이 선물한 ‘화주배 한 쌍’이 바로 이 술잔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얇은 구리판에 도금하여 만든 것인데, 지금은 손잡이 부분의 나무 줄기와 잎 등 일부에만 도금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갓 위에 다는 옥 장식, 玉鷺, 조선 16세기, 현충사, 보물>

이순신의 유품으로 종가에 전하는 갓 장식이다. 옥로는 고관이나 외국에 가는 사신使臣이 쓰는 갓 위에 달던 것으로 옥으로 해오라기(鷺) 모양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둥근 금동 받침 위에 연꽃잎에 싸여 있는 3마리의 해오라기가 조각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진린이 이순신 등의 전공을 아뢰는 문서, 事大文軌卷二十八, 1619년 편찬, 1935년 영인, 국립진주박물관>

이순신과 함께 참전한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선조에게 이순신의 전공에 대해 상찬한 내용을 담은 문서이다. 진린은 이순신에 대해 “찢어진 하늘을 꿰메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이 있다고 극찬했다. 진린은 1598년(선조 31) 고금도에 합류하여 이순신과 함께 조명연합수군을 이끌고 노량해전에 참전 했다. 이 글이 실린 《사대문궤》는 1592년(선조 25)부터 1609년(광해군 1)까지 명과의 외교문서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노량해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7년 동안 이어졌던 조일전쟁의 유종의 미를 거둔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전투였다. 명나 노장 등자룡도 전사했으며 진린 역시 죽을 위기에 처할 정도로 처절한 전투였다. 살수대첩이나 귀주대첩처럼 노량해전은 패주하는 적들에게 응징을 가하여 전후평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육상에서는 포위전을 벌였던 울산왜성 전투가 왜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 갑옷과 투구>
<1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갑주, 일본 모모야마 시대, 주식회사 오하나, 복제품>

무장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상징하는 달무늬 갑주로 모모야마 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조총을 주요 무기로 하는 공성전이 중심이 되면서 갑옷의 형태도 크게 변화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의 갑옷을 ‘도오세이구소쿠當世具足’, 즉 ‘요즘 시대의 갑옷’이라 불러 이전 시기와 구분하였다. 총탄에 대비하여 가능한 온몸을 철판으로 감싸면서도 움직임을 방해 하지 않도록 하는 다양한 구조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몸의 틈새를 보호하기 위해 팔과 다리에 보호대를 갖추어 전신을 방어하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투구, 일본 모모야마 시대, 일본 다치바나가사사료관,>

무장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투구로 1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투구 뒤의 둥근 장식은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상징하는 달(月輸)을 본딴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다치바나가문의 군사들이 썼던 복숭아 모양의 금박투구, 일본 모모야마 시대 ~ 에도시대, 일본 다치바나가사료관>

이 투구는 서양 갑옷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형태로 둥근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고 해서 ‘도형’ 투구라 불린다. 표면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해서 다치바나 가문에서는 예부터 ‘긴코金甲’라고 불렀다. 다치바나 가문의 병사들이 전투 때 복장을 통일하기 위해 착용했던 것으로 가문의 상징적 장비로 계승되었다. 현재 239점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4 마사쿠니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진 창, 일본 1586년, 일본 다치바나가사료관>

날이 위아래 두 갈래로 나뉜 독특한 형태의 창이다. ‘반슈에 거주하는 마사쿠니 제작播州住政國作’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반슈(播州, 지금의 효고현 일대)는 일본 서부 지방의 유명한 무기 제작지로 이 지역에 당시 창의 명장들이 많았으며, 마사쿠니 역시 그 계통의 뛰어난 제작자로 추정된다. ‘영록 11년(1586) 6월 중순’이라는 제작 일자도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5 가네사다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진 창, 일본 1537년, 일본 다치바나가사료관>

이 창의 칼날에는 ‘八幡大菩薩’이란 명문이 새겨겨 있는데 이것은 하치만 대보살의 신령이 깃든 유물이란 뜻이다. ‘노슈 세키에 거주하는 가네사다 작’이라고 새겨져 있고, ‘천문 6년(1537) 11월 길일’이라는 제작 연대도 새겨져 있다. 세키 지방 역시 일본의 대표적인 도검 제작지로 알려져 있다. 이 창은 임진왜란 때에도 사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순천왜성>
<1 노량 해역에서 출수된 불랑기자포, 조선 전남 여수시 백도 부근 출수, 해군사관학교박물관>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해역 인근 전라남도 백도근처에서 출수된 불랑기자포이다. 자포에 탄환을 장전한 뒤 발사틀 역할을 하는 모포에 삽입해 발사한다. 이미 명종 때부터 군기시에서 제작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주요 화포로 사용되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노량해역에서 출수된 별양자총통, 조선 전남 여수시 백도 부근 출수, 해군사관학교박물관>

별양자총통은 총신의 길이가 평균 76cm로 승자총통에 비해 길게 개량된 개인화기이다. 조선은 승자총통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고 더 멀리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총통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별양자총통과 별승자총통은 총신의 길이를 늘려 사정거리를 개선한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노량해역에서 출수된 지자총통 파편, 조선 전남 여수시 백도 부근 출수, 해군사관학교박물관>

노량해전의 해역 인근 전라남도 백도 근처에서 출수된 지자총통의 파편이다. 백도 주변은 다양한 무기류가 가장 많이 인양된 곳이다. 백도는 순천왜성에서 여수와 남해도 사이를 지나 남해도 남쪽의 외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이다. 노량해협이 봉쇄된 상황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도주한 경로로 추정된다. 이 지자총통의 파편들은 전투 중 발사 과정에서 파열되어 분리된 것으로, 원래는 동일 개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량해전 당시 도망가는 일본 수군을 추격하는 전투에서 수몰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4 사천왜성에서 출토된 총통과 탄환, 조선, 국립진주박물관>

사천 선진리 왜성에서 출토된 철로 만든 총통이다. 《임진장초》 화포를 올려 보내는 장계(1593.8.)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의 조총을 얻어 항상 눈앞에 두고 그 이치를 실험하였더니 총신이 길기 때문에 그 총구멍이 깊고, 깊기 때문에 쏘는 힘이 맹렬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총통을 정철로 두들겨 만들어 조정으로 올려보낸다고 하였다. 아울러 각 고을에 명령하여 이런 총통을 만들도록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아마도 이 때 만든 총통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노량대첩,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노량의 별
명량해전 이후 일본군은 순천·사천·울산 등에 왜성을 쌓고 장기 주둔 했습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했습니다. 이에 조· 명연합군의 육군과 수군이 네 방향에서 일본군을 압박하며 울산왜성 · 사천왜성· 순천왜성을 공격했으나 큰 피해 속에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려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노량에서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11월 19일, 조 · 명연합군은 마침내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노량해전은 필사적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을 상대로 한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자, 이순신이 생애를 마감한 결전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 정왜기공도병(전반부), 일본 19세기,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
<1폭 2폭 해로와 육로를 통해 출발하는 명나라의 군사들>
<3폭 4폭 압록강을 건너는 명나라의 군사들과 이를 맞이하는 조선의 관료들>
<5폭 조선의 수도(한성)에 도착한 명군을 맞이하는 조선의 국왕과 신하들(위) 육로(동,중,서)와 수로로 나누어 출진하기 전 의식을 올리는 명군(아래)><6폭 순천왜성 근처 율림에서의 승리>

<정왜기공도병>의 전반부, 첫 번째 병풍이다. 명의 육군과 수군의 출전, 조선에서의 환영, 출정 전 서약, 율림전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병풍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오스카 발렌베리가 1906년 도쿄 특사에 임명되었을 때 구입했는데, 후에 그의 딸이 스톡홀름 동아시아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정왜기공도병(후반부), 일본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성 중인 순천왜성을 육지에서 공격하는 조명연합군(1~3폭의 위)>
<순천왜성 앞 바다를 봉쇄한 조명연합수군(3폭 위)><노량대첩(2~4폭 가운데): 명나라 제독 진린이 탄 배(오른쪽),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조선 통제 이순신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음을 알리는 표시(가운데)>
<5폭 승리하여 개선한 명군을 환영하는 잔치><6폭 귀국 후 북경 자금성에서 황제에게 승리를 보고하는 명군(위) 전사한 장병을 위한 사당 건립과 제사 봉행(아래)>

<정왜기공도병>의 후반부, 두 번째 병풍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순천왜성전투, 남해도 소탕작전 등 정유재란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전투 장면이 담겼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12년 영국에서 구입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두 병풍의 역사적 만남, 일본군을 물리친 공적을 기념하는 내용의 병풍 그림, 병征倭紀功圖屏
정유재란 때 조선의 구원군으로 온 명군이 조선 남해안의 일본군을 물리친 공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병풍은 명나라의 종군 화가가 그렸다고 전하는 두루마리 그림 <정왜기공도권을>바탕으로 후대에 제작되었다. 그림의 내용은 원래 중국에서 그린 것이지만, 금채의 사용, 산악의 운곽을 표현한 먹선, 나무를 묘사한 규칙적인 필선, 인물 비례 등을 볼 때 19세기 일본에서 모사하여 6폭 병풍 2점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시선, 조선이 라는 장소, 일본의 회화적 표현 등 다국적 특징을 가진 병풍이다. 이 병풍은 스웨덴 최대의 금융가문 발렌베리 가문의 구스타프 오스카 발렌베리가 1906년 도쿄 특사에 임명되었을 때 구입하였다. 전반부는 구스타프 발렌베리의 딸이 아버지를 기리며 스웨덴 스톡홀롬 동아시아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후반부는 국립중앙박물관이 2012년 영국에서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울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시기 조·명 연합군이 남해안 왜성 지대에 고립된 왜군을 격멸하기 위해 벌인 가장 치열하고 참혹했던 최대 규모의 공성전이다. 전투 자체보다 성 내부에서 벌어진 왜군의 극한 생존기로 더 유명하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강력한 포위망에 갇혀 식수와 식량이 완전히 끊긴 채 약 10일간 버텨야 했다. 비록 성을 함락하진 못했지만, 울산성 전투는 전쟁 전체의 판도를 흔드는 심리적 대격변을 일으켰다. 이 전투 직후인 히데요시 본인이 급사하면서 왜군은 싸움을 멈추고 전면 철수를 택하게 된다.

<울산왜성전투를 그린 병풍, 蔚山倭城戰鬪圖, 일본 1886년, 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징고관>

나베시마 나오시게, 구로다 나가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일본 구원군(화면 아래쪽)이 울산 서쪽의 구릉에 도착하여 태화강을 사이에 두고 조명연합군(화면 위쪽)과 대치하고 있다. 조명연합군의 일부가 얼어붙은 태화강을 건너 전투가 막 개시되는 장면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 2폭>
<3,4폭>
<5 ,6폭>
<울산 왜성>

울산왜성전투를 그린 병풍, 蔚山倭城戰鬪圖, 일본 1886년, 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징고관
1597년(선조 30) 12월 2일부터 1598년(선조 31) 1월 4일까지 울산왜성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를 그린 그림으로 병풍 3틀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가 지역의 다이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가문에 전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한 후 제작한 원본은 1874년에 소실되었고, 현전하는 그림은 나베시마 가문에 있던 다른 사본을 토대로 1886년에 모사한 것이다. 나베시마 가문에서는 울산왜성전투를 그림으로 남겨 전장에서의 무공을 후대에 전하여 가문과 가신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울산왜성전투로 일본군과 조명연합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본군 내에서 전선 축소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22 확인)
  3.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2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