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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임진왜란의 기록

임진왜란은 단순한 16세기 전쟁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기억되고 연구되는 역사 주제이다. 전쟁 당시 사람들은 일기·견문록·보고서·문집·실기 등 다양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임진왜란을 기록한 대표적 기록인 《난중일기》, 《징비록》, 《쇄미록》의 원본을 볼 수 있었다. 전장의 분위기를 전하는 《난중일기》, 국왕과 조정의 분위기를 전하는 《징비록》, 전쟁기간 피난을 다녔던 일반 양반이 쓴 《쇄미록》을 통해 전쟁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또한 곽재우의 《망우당집》, 이덕형의 《한음선생집》 같은 문집과 후손들이 편찬한 실기들도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들은 새로운 역사 이야기와 전쟁 영웅의 모습을 만들어냈으며, 이순신·권율·김시민·곽재우 등은 전설과 신화 속 인물로 자리 잡아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의 상징이 되었다.

<1 임진일기 1592년 , 난중일기 친필본, 조선 1592~1598년, 현충사, 국보><2 계사일기 1593년><3 갑오일기 1594년><4 병신일기 1596년>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월부터 전사하기 직전인 1598년 11월까지 약 7년간 진중(陣中)에서 직접 쓴 친필 일기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 상황, 군사 기밀, 기후, 지형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 및 조정과의 갈등 등이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 기록 뿐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연민, 어머니에 대한 효심, 전염병과 가위눌림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슬픔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가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붙힌 이름이다. <임진일기(1592년)><계사일기(1593년)><갑오일기(1594년)><병신일기(1596년)><정유일기(1597년)><속 정유일기(1597년)><7 무술일기(1598년)>로 구성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5 정유일기 1597년><6 (속)정유일기 1597년><7 무술일기 1598년>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 친필본이다. 일기가 작성된 연도에 따라 ‘임진일기’, ‘정유일기’와 같이 표지에 이름을 붙였는데,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하면서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계사일기 1593년>
<5 정유일기 1597년>
<6 (속)정유일기 1597년>

이순신의 마음을 담은 기록,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부터 노량해전이 있었던 1598년까지, 이순신이 남긴 7년의 기록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일기는 크게 세 갈래다. 전란 중에 직접 쓴 친필본, 정조대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 후손이 발체해 옮겨 쓴 《충무공가승》의 <일기초>가 있다. 그중 1595년 을미년의 일기는 친필본에 빠져 있지만 전서본과 <일기초>에 남아 있다. 이순신은 7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성실하게 일기를 썼다. 《난중일기》에는 전투와 군영 경영과 같은 공적인 내용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의 기록부터 선물 목록, 장계나 편지의 초안, 수결을 연습한 흔적도 남아 있다. 또 전장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과 고뇌,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가족에 대한 애틋함, 나라에 대한 걱정,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간 이순신의 성품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록, 징비록 懲毖錄, 류성룡, 조선 1596년, 한국국학진흥원, 국보>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맡아 내정과 군무를 총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임진왜란의 전말과 당시 자신의 경험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604년(선조37)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징비懲毖’는 중국 고전 《시경》의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가다” 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이 책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끝낸 공로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분명히 하였고, 이순신을 천거한 본인의 역할도 강조하였다. 《징비록》은 1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내에서 간행되어 널리 읽혔고, 이어 청대 중국에도 알려져 동아시아 삼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오희문이 임진왜란 당시 쓴 일기, 쇄미록 瑣尾錄, 오희문, 조선 1591년, 국립진주박물관, 보물>

오희문이 임진왜란으로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며 쓴 피란일기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기록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과 류성룡이 장군과 관료로 임진왜란을 직접 지휘한 데 비해 오희문 평범한 양반의 신분으로 전쟁 중 개인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오희문이 한양의 집을 떠난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는 1601년(선조 34)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3,368일) 동안의 일기를 묶어 직접 ‘쇄미록’ 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경》의 “자질구레 보잘것없이 떠도는 사람들이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조선 시대에는 장군의 업적을 한데 모아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정조 대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바로 다음 해, 장군의 조카인 이분이 장군의 일생과 전투 활약상을 정리한 최초의 약전(짧은 전기)인 이충무공 행록이 발간되었으며, 훗날 든 이순신 전기의 뼈대가 된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이순신의 삶을 조명하는 전기 발간이 활발했다.

<이순신 전기 중 가장 오래된 간행본, 忠武錄, 조선 중기,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충무록》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순신의 전기<행장行狀>과 이식이 이순신의 시호를 받기 위해 지어 올린 <시장諡狀>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분이 기록한 「행장」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충무공가승》(1716년)과 《이충무공전서》(1795년)에 수록되어 전한다. 《충무록》 내 <행장>이 현존하는 이분의 <행장> 간행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분의 <행장>에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의 관직명과 세계世系가 나오고, 어렸을 적 참외밭 주인의 밭을 망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충무공가승》부터 초기<행장>을 개정하면서 점차 어린 시절의 비화 같은 다소 소소한 이야기들은 없어지고, 영응성과 애국심이 드러나는 글들이 보강되었다. 특히 《충무공가승》과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순신의 마지막 말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충무록》 내 <행장>에 보이지 않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한글본 충무공 행장, 대한제국, 1901년,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말기 전라도 화순군수를 지낸 이도희가 한글로 필사한 이순신 전기이다. 한글 필사본의 존재는 당시 여성들이 소설뿐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의 전기도 구독 하였음을 알려준다. 현재 전하는 <행장>의 한글 필사본은 4종이다. 우리한글박물관 소장본만 계열을 달리할 뿐,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개인(이한우) 소장본은 모두 덕수 이씨 종중 이순신 후손가에서 소장해오던 것으로, 같은 계열의 판본을 필사한 까닭에 내용과 체재가 비슷하다. 다만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에는 시집 간 여성이 갖추어야 할 행실과 덕목을 적은 <직증녹>과 이순신이 쓴 시 4수가 실려 있는 점이 다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한성 건천동에 거주한 이순신과 그의 이웃들에 대해 쓴 허균의 글, 惺所覆瓿藁, 조선 17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허균은 자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에 한성 건천동(지금의 서울시 중구 인현동)에서 이순신과 류성룡, 허균의 형인 허봉, 원균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이순신에 비해 류성룡은 3살, 원균은 5살이 많았고, 허봉은 6살이 적었다. 현재 이순신의 생가 터로 지정된 곳은 두 곳이다. 서울시가 비정한 명보아트홀 자리(중구 마른내로 47)와 민간에서 비정한 신도빌딩 자리(중구 을지로 18길 19)이다. 두 곳의 거리는 200m 남짓이다. 생가 터는 두 곳 중 어느 한 지점으로 특정하기보다 대체로 그 일대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의 무과 급제 교지, 조선 1576년, 현충사, 복제품, 보물>

1576년(선조9) 3월에 보인 이순신이 무과 병과 4인으로 급제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보인은 조선 시대 군역의 한 종류로 군대 간 사람들의 비용과 그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과거 급제 당시에 이순신이 특별한 직업없이 무과 수련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병과 4인은 이순신의 합격 성적이다. 이때의 무과에서는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 21명으로 총 29명이 합격하였으니, 이순신의 성적 순위는 29명 중에 12번째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 이순신이 합격한 과거시험의 전체 합격자 명단, 萬曆四年丙子式年 文武雜科榜目, 조선, 고려대학교도서관>

1576년(선조9)의 식년시 합격자 명단이다. 무과 합격자 중 이순신의 이름이 보인다. 그 아래로 이순신의 자字 와 본관, 거주지, 부모 및 형제에 대한 정보가 함께 적혀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이순신의 어머니가 과거 급제를 축하하며 재산을 증여한 문서, 草溪卞氏別給文記, 조선 1588년, 현충사, 보물>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축하하며 어머니 초계 변씨가 이순신에게 노비와 토지, 집을 나누어 준 사실을 적은 문서이다. 더불어 이전에 이순신의 형과 동생에게 증여한 재산의 구체적인 내역도 다시 확실하게 밝혔다. 원래 문서는 1584년(선조 17) 화재로 불타버려서 1588년(선조 21)에 다시 작성한 것이다. 문서에 보이는 노비는 총 22명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으며, 노비와 함께 토지도 나누어 준 것으로 미루어 이순신 집안의 재산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이 참전한 여진족 토벌을 그린 그림,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조선 1894년, 육군박물관, 복제품>

함경도 병마절도사 장양공 이일이 이 지역을 노략질하던 여진족의 본거지 시전 마을을 정벌한 일을 그린 것이다. 이 전투에 참여한 장수와 병사들의 이름이 그림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위 중 12번째에 이순신의 이름이 보인다. 이순신이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 참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병사들의 명단 뒤에 있는 이일의 8세손 이재관이 쓴 글에 따르면, 이일의 손자 이견이 조부의 공을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고자 그렸고, 이 그림을 다시 1849년(헌종 15)에 다시 그렸다고 한다. 시전 마을 일대의 지세와 조선 군사들과 여진족의 전투 모습도 다양한 자세로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해전인 노량대첩(1598년)에서 전사하셨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포상과 예우는 모두 추증과 공신 책봉 형태로 이루어졌다. 전쟁 직후(1604년) 선무공신 1등 책봉되고 좌의정 추증되었으며, ‘덕풍부원군’에 봉해졌다. 가문에 대해서도 면, 면역 등의 혜택과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었다. 숙종 때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신도비가 건립되었으며,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었다.

<1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이순신을 공신에 책봉한 문서, 이순신 선무공신교서, 조선 1604년, 현충사, 보물>

1604년(선조 37) 이순신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하며 내린 교서이다. 이순신은 권율(1537~1599), 원균(1540~1597)과 함께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앞에 기록되었다. 교서에는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건원보 권관으로 여진족 울지내鬱只乃를 사로잡은 일, 녹둔도에서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억울하게 백의종군을 하였던 일, 정읍현감을 거쳐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의 공을 모두 적었다. 선조는 교서에서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직한 것에 대해 조정의 계책이 잘못되었고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이순신 집안에 노비를 내려주는 문서, 賞給教旨, 조선 1605년, 현충사, 보물>
<뒷부분>

이순신을 공신으로 녹훈한 이듬해 1605년 노비를 지급하면서 함께 내려준 교지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신이 되면 공신교서 또는 녹권을 주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은전을 내렸다. 또한 부모와 부인의 품계를 올려주고, 후손들에게도 사면의 혜택을 주었으며, 노비와 전답田畓 등 경제적인 혜택도 내렸다. 이순신은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어 노비 13구, 전지田地 150결, 은자 10냥, 옷감 1단,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했던 바로 지급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노비 13구 중 8구만 우선 하사하였다. 이때 하사한 노비들은 전라도 부안, 충청도 온양 · 직산 · 천안 · 은진 등 인근 지역의 관노와 관비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이순신의 부인에게 작위를 내린 문서, 尚州方氏貞敬夫人教旨, 조선 1603년, 현충사, 보물>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이 우의정으로 증직됨에 따라 5년 후인 1603년 이순신의 부인 상주 방씨 또한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은 정1품 · 종1품 관원의 정실부인에게 내려진다. 이순신은 우의정으로 추증될 때 가장 높은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기 때문에 방씨 또한 외명부에서 제일 높은 품계인 ‘정경부인’ 작호를 받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바다의 끝에서 나를 돌아보다
노량의 전투가 끝나고 파도는 고요를 되찾았습니다. 몸은 바다에 묻혔으나 나는 아직 잠들지 못했습니다. 바다의 끝에서 나는 조용히 지나온 길을 돌아봅니다. 나는 한성의 문신 집안에서 태어나 글과 예법을 익혔으나, 스물두 살 무렵 활과 무예로 나라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 결심이 결국 나를 만들었습니다. 청탁과 아첨을 멀리 하며 불의에 물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올곧음이 나를 외롭게 했으나 그 외로움이 나를 더욱 굳게 했습니다.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변방에서 국경을 지켰습니다. 두만강 녹둔도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패전의 책임을 지며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나는 여진족의 거점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고나서 고을 수령이 되어 목민관으로 소임을 다하였고 전쟁이 나를 부를 때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23 확인)
  3.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