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에 대한 사후 평가는 시대를 거치며 더욱 높아졌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추앙받았고, 조정은 그를 선무 일등공신에 책봉했다. 백성들과 부하 장수들도 사당과 타루비를 세워 그의 충성과 희생을 기렸다. 조선 후기에는 단순한 장군을 넘어 ‘충신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인조는 시호 ‘충무’를 내렸고, 숙종은 아산 현충사에 사액을 내려 국가 차원의 제사를 이어가게 했다. 특히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여 그의 업적을 국가적으로 정리·찬양했다.

1604년(선조 37) 이순신을 선무일등공신에 녹훈할 때 좌의정으로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이다. 이순신은 전사한 직후인 1598년(선조 31) 12월 우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때 다시 좌의정으로 증직되었고, 정1품 공신에게 내려지는 부원군 칭호도 함께 받았다. 부원군 봉호는 덕수 이씨의 관향 경기도 개풍군 덕수리(지금의 개성시 판문군 덕수리)를 따라 ‘덕풍德豐’으로 정했다.
장군의 시호 ‘충무(忠武)’는 삼국지 영웅 제갈공명의 ‘충무후(忠武侯)’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인물 중 한국인에 제일 좋아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제갈공명에 비견되고 있음을 알 수 이다.

1643년(인조 21) 이순신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이 교지를 받기 전까지 이순신은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선조 대에 여수 전라 좌수영성 인근에 세운 최초의 사액사당 ‘충민사忠愍祠’를 따라 ‘충민공’으로 부르기도 했다. 병자호란 후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충신들, 특히 이순신이 다시 주목받았고, 국가 차원에서 그에 대한 현창이 추진되었다. 이순신에게 시호를 내린 것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선조 때 미처 지급하지 못한 노비 5구를 1653년(효종 4)에 추가로 내리면서 함께 준 교지이다. 이순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이후 50년 가까이 지나서야 약속받은 노비 13구를 모두 이순신 집안에서 받은 것이다. 앞서 1605년(선조38)에 여러 지방에 있는 노비가 지급되었던 데 비해서 예빈시· 사재감 · 종친부 등 중앙 관부의 관노와 관비가 지급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전라남도 여수에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탁본한 것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이순신 관련 비 중에서 가장 큰 지대석과 귀부, 용무늬 이수를 갖추고 있다. 전액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썼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김현성이 썼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 노량, 명량 세 곳을 막아낸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는 내용이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옆에는 이 비의 건립 경위를 기록하기 위해 1698년(숙종 24)에 세운 동령소갈비가 있다. 동령소갈비의 반대편에는 1603년(선조 36)에 세운 타루비가 있다. ‘타루비’는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비’라는 의미로 전라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말 반일 내용이 담긴 고적들을 철거한다는 정책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1942년에 명량대첩비, 타루비와 함께 서울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버려져 있었다. 광복 이후 발견되어 여수읍사무소에 임시로 두었다가, 1947년 이충무공과 연관된 고소대에 비각을 세워 타루비, 동령소갈비와 함께 안치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팔사품(八賜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무공을 기리기 위해 명나라의 황제 신종이 하사한 8가지 종류(총 15점)의 기물이다. 이 유물들은 조·명 연합군 작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가졌던 국제적인 위상과 군사적 지휘권을 상징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귀도(鬼刀)는 칼자루에 용의 머리를 새기고 그 위에는 귀신의 머리를 조각하고 붉은색을 칠한 의장물이다. 참도(斬刀)는 칼자루는 상어껍질로 싸고 칼집은 은도금한 쇠로 장식한 의장용 칼이다.

도독인(都督印)은 구리 재질로 만든 대형 도장이다. 조선 후기 수군 통제사를 상징 하는 도장으로 여겨졌다.

영패(令牌)는 군령을 전할 때 사용한 팔각형의 나무패. 주머니에 그려진 표범 문양 때문에 호두령패虎頭令牌 라고도 한다.

독전기(督戰旗)는 전투를 독려할 때 사용하는 깃발이다. ‘군사가 적을 만났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자는 처단한다’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는 문구가 있다. 홍소령기(紅小令旗)
군대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의장물이다. 남소령기(藍小令旗)는 군대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의장물이다. 곡나팔(曲喇叭)은 구리로 만든, 목이 구부진 형태의 나팔이다.

이순신의 전공戰功이 명나라에까지 알려져 명나라 조정으로 부터 받았다고 전해지는 여덟 가지 의장물이다. 도독인 ·영패 · 귀도 · 참도 · 곡나팔 · 독전기 · 홍소령기 · 남소령기로 구성되어 있다. 팔사품은 조선 후기에 통제영에서 이루어지는 수군 조련 때 삼도수군통제사가 타는 대장선에 배치되었다. 또, 통제영에서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즉, 팔사품은 조선 후기 내내 삼도수군통제사의 상징물이자 이순신을 기리는 기념물로 인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이순신의 글과 관련 기록을 모아 이순신의 4세손인 이홍의가 주도해 편집하고 조카인 5세손 이봉상이 1715년 경에 간행하였다. 《충무공가승》에 이순신의 글은 글 5편과 시 4수 뿐이고, 그 외에는 최유해가 지은 <행장>, 이식이 지은 <시장>, 김육이 지은 <신도비명>과 같은 이순신의 전기와 <충민사기>와 같은 각종 사적의 기록,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 이순신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쓴 상소나 제문 등이 포함되었다. 《충무공가승》은 숙종 대 이순신 현창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고, 1795년 정조의 명령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793년(정조正祖 17) 7월에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며 내린 교지이다. 정조는 “충무공처럼 충성심이 뛰어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음에도 그 사후에 아직 영의정으로 추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라며 이순신에게 영의정 벼슬을 내렸다. 이순신에 대한 추모 사업은 정조 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고와 그에 관련된 기록들을 집대성하여 정조의 명으로 발간된 공식 문집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난중일기》를 포함해 장군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 시문, 그리고 사후 그를 기린 조정의 기록까지 한데 모아 국가 차원에서 편찬한 완결판 기록물이다.




정조의 명으로 이순신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모아 1795년(정조 19) 규장각에서 15권 8책으로 이순신의 문집이다. 검교 유득공이 감독하여 을묘자로 간행하였으며, 이때 정조가 왕실의 내탕금을 내려주기도 했다. 권수에 정조의 윤음과 신도비명을 시작으로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받은 교서와 유지, 역대 임금이 내린 제문,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의 거북선 그림과 해설, 그리고 이순신의 세보와 연표 등이 실려 있다. 이어 권1에서 권14까지 이순신이 직접 쓴 시와 여러 편지글, 장계, 《난중일기》와 <행록>·<행장> · 비문 · 기문 · 제문, 국내외 전적에서 뽑은 각종 관련 기록들이 담겨 있다. 국가가 주도하여 개인 문집을 간행한 대표적인 사례이자 공인된 이순신의 종합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순신 관련 저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시대가 부른 이름, 나라를 구한 충신
이순신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전적지와 연고지 곳곳에 사당과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은 이순신을 선무 일등공신에 책봉했습니다. 여수의 충민사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 백성들이 청원하여 사당을 세웠고, 부하 장수들은 타루비(눈물을 흘리며 세운 비)를 세워 그를 기렸습니다. 인조는 시호 ‘충무忠武’를 내렸고, 숙종은 아산 현충사에 사액을 내려 국가 차원에서 추모했습니다. 영조는 아산의 이순신 종가를 중심으로 사적을 정비하고 그의 후손을 예우했습니다. 정조는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나라의 영웅으로 받들었습니다.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중하고 친히 충무공 이순신의 신도비명을 지었으며,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왕조가 공인한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한 시대의 영웅을 넘어, 조선 왕조가 대를 이어 기린 충신의 표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4년)
근대 이후에는 민족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외세에 맞서 싸운 대표적 인물로 기억되었고, 현대 한국에서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청렴한 지도자, 책임감 있는 군인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이름은 화폐와 우표, 훈장에 새겨졌고, 연구와 기념사업, 영화, 연극, 소설 등 대중문화 매체에서 시대를 넘어 살아 있는 우리들의 표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찬식이 1925년에 박문서관에서 간행한 한글 전기물이다. 《이충무공전서》의 <행록>과 <행장>에 수록된 주요 일화를 바탕으로 했다. “천신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겠더라.”와 같은 문장이 등장하여 영웅 이순신의 위업을 강조하고, 전쟁 장면의 묘사가 자세하여 소설적 흥미를 더한다. 《리순신실긔》를 비롯한 이 시기의 이순신 전기물은 대중에게 널리 퍼져 이순신이 민족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계기가 되었다. 1951년에는 《고대소설 이순신전》이라는 표제로 다시 간행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현충사를 중건할 때 이상범이 그린 이순신 영정, 이상범, 해군사관학교박물관
1932년 6월 현충사 중건 낙성식落成式 때 봉안된 영정으로 이상범이 그렸다. 이상범은 이광수의 연재소설 <이순신>에 그렸던 삽화를 토대로 전해오는 구전과 문헌을 참고하여 이순신의 인품, 성격 등을 재해석한 초본을 만들었다. 무인의 느낌을 풍기는 짙은 눈썹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 굳게 다문 입 등 뚜렷한 이목구비를 한 모습으로 전립을 쓰고 구군복을 입은 차림으로 그렸다. 이상범은 현충사 영정 초본을 바탕으로 새로 건립된 한산도 제승당 영정도 제작했다. 한산도 제승당 영정은 1938년 성재휴에 의해 모사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962년 정읍군(현 정읍시)의 요청으로 장우성이 그려 정읍 충렬사에 봉안한 초상화이다. 이에 앞서 장우성은 6·25 전쟁 당시 충무공 기념사업회로부터 이순신 영정 제작을 의뢰받았다. 《징비록》의 ‘선비 같은 용모’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이순신 종손의 모습을 참고하여 영정을 그려서 아산 현충사에 봉안하였다. 정읍 충렬사에 봉안한 초상화는 현충사 봉안 초상화와 거의 흡사한 도상으로 붉은색 관복을 입고 있고, 양식은 조선 시대 공신 초상화를 따랐다. 장수의 이미지보다는 충효와 문무를 겸비한 선비의 모습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 후기 무관의 초상화이다. 얼굴 방향 및 세부 요소, 손에 든 등채, 전립을 쓴 모습, 의자 형태 등이 이상범이 그린 이순신 영정과 유사하다. 다른 점은 배경에 <수군조련도> 병풍이 있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인물화를 그릴 때 배경이나 병풍으로 주인공의 신분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을 상징하는 요소로 <수군조련도>를 그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이 초상화가 이순신을 그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919년 3월에 처음 우리나라를 다녀갔고, 이후 1939년에 몇차례 더 방문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예복 차림에 관을 쓰고 오른손에 홀을 들어 위엄을 갖춘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상의 일종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립한 일본 오사카성의 천수각에 있는 목상과 매우 유사하다.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으로 제사되기 시작한 이후 만들어진 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격화되면서 그에 맞섰던 이순신 장군 또한 뛰어난 해군 명장으로 인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0



조선사편수회서 탈초한 《난중일기》 초고본의 원고이다. 일제의 조선사 편찬 때 사료 수집을 담당한 한학자 홍희가 탈초했다. 이를 기반으로 《난중일기초》와 《임진장초》가 1935년에 간행되었다. 조선사편수회는 3·1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역사 편찬 기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일 때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 훈장이다. 정장正章과 약장略章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장의 메달 앞면 중앙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훈장명 ‘대한민국 충무무공훈장’ 과 훈장번호 ‘제8258호’가 양각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거북선을 핵심 문양으로 한 휘장이 달린 대한민국 해군 장교의 정모이다. 두 개의 닻이 교차한 위에 거북선을 안치하고 그 위에 무궁화를 배치하였다. 거북선은 충무 정신을 상징하며 대한민국 해군이 조선 수군의 역사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 정모 휘장은 1950년대 중반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민족의 혼으로 다시 선 영웅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순신은 ‘민족의 혼’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을 살리며 우리 역사를 빛낸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전기와 소설, 신문 연재물이 잇달아 그의 지략과 신념을 상기시키며, 우리 민족에게 자존과 각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31년 충무공 묘소 운영에 필요한 토지가 경매 위기에 놓이자 국내외 동포 2만여 명이 성금을 모았습니다. 이듬해 ‘이충무공유적보존회’에서 현충사를 중건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전국적 문화유산 보존운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이순신은 분단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도 남북한이 함께 기리는 위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화폐와 우표, 훈장에 새겨졌고, 연구와 기념사업, 영화, 연극, 소설 등 대중문화 매체에서 시대를 넘어 살아 있는 우리들의 표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바다를 넘어, 세계가 기억하는 이순신
이순신이 서구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78년, 영국 외교관 윌리엄 조지 애스턴을 통해서였다. 1899년에는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하며 이순신의 이름이 미국과 호주에 알려졌다. 이후 미국의 저술가 윌리엄 위어와 영국의 역사학자 제레미 블랙 등이 그의 전술과 지휘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순신은 오늘날 세계 해전사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23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23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