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위치한 오죽헌(烏竹軒)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강릉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오죽헌내에에는 별채 외에 살림집이었던 안채와 사랑채, 이의 저서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했던 벼루를 보관하던 어제각, 1970년대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지어진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각종 유품들을 전시하는 율곡기념관과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오죽헌 앞 마당에는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절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배롱나무, 율곡매(栗谷梅), 율곡송(栗谷松) 등이 있다.
<강릉 오죽헌(보물)>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유적지이다. 1970년대 이후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사진은 오천원권 지폐에 등장했던 장면이다.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표시해 놓은 곳>
오죽헌(보물)은 조선초기에 지은 이 집은 별채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사적인 의미와 율곡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역사적인 의미를 같이 갖추고 있는 곳이다. 조선초 최치운(1390~1440년)의 처음 지었으며 그의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다시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해왔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고 문성사, 기념관 등이 지어졌으며,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강릉 오죽헌(보물)>
앞면 3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별당 건물이다. 오른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가족들이 생활하는 안채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손님들을 접견하고 집안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헌(烏竹軒)
조선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는 이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원래 이곳에는 유품인 벼루와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보관하는 어제각이 있던 자리이다. 1970년대 오죽헌을 성역화하면서 새로 지은 사당이다.
<문성사에 모셔진 율곡 이이 영정>
문성사(文成祠)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출처:문화재청>
<오죽헌 마당>
<율곡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배롱나무>
율곡 이이가 이곳에서 살았던 시절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이 넘는 배롱나무.
배롱나무(木百日紅), 강릉시의 시화(市花)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栗谷松).율곡매(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율곡매(栗谷梅)>
강릉 오죽헌 율곡매, 천연기념물
이 나무는 1400년경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다. 사임당은 고매도(古梅圖), 묵매도(墨梅圖)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사임당 당시 율곡매는 상당히 굵었을 것으로 보이며, 본 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란 아들나무로 짐작된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해 훨씬 알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출처:문화재청>
<오죽헌 살림집에 해당하는 안채와 바깥채(사랑채)>
앞편 3칸 규모의 바깥채와 중문을 앞쪽에 두고 뒷편에 ‘ㄱ’자형 안채와 행랑채를 두고 있다. 경북 북부 지방의 ‘ㅁ’자형 한옥과는 달리 개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바깥채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여 있는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살림집 안쪽>
살림집 안쪽으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어제각이 있다.
<어제각>
<어제각 현편>
<어제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벼루와 ‘격몽요결’>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천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출처:문화재청>
<어제각 뒷편 대나무>
어제각 뒷편에는 오죽헌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검은 대나무(烏竹)을 볼 수 있다.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함께 지폐에 인물이 들어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며 존경받고 있다. 조선후기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선비들이 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곳을 많이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별당인 오죽헌은 개인이 살던 가옥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율곡 이이 동상>
<신사임당 동상>
<기념관>
강릉 오죽헌, 보물,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오축헌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가 되는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요 철인이며 정치가로서 구국애족의 대선각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 신씨(1504~1551년)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 자수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년)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9년(1564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군대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사창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유현인 최치운(1390~1440년)의 창건으로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돌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엄과 교훈을 길이 추앙하게 된 것이다. <출처:강릉시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중앙박물관
4. 문화재청
5. 강릉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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