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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보물), 서역인 얼굴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무인석 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원성왕릉 입구에 세워진 석상 및 석주(보물)이다. 후대 왕릉 석물의 모범이 되는 석물들로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사자상 4점, 석화표 1쌍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무인상은 그 생김새가 서역인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유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을 일컫는다고 한다. 문인상 또한 후대 왕릉의 문인상이 나약한 문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과는 달리 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왕릉을 지키는 사자상은 각 방향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으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다. 사자는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상스러운 동을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왕릉에는 호랑이(석호)와 양(석양)으로 바뀌었다. 원성왕릉을 지키는 석물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조선시대 왕릉 석물의 구성의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또한 조선왕릉은 석물들을 봉분 바로 앞에 배치하고 있지만 괘릉의 석물은 봉분에서 떨어진 능역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왕릉 입구에 도열해 있는 석상과 석주(보물)>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화표석이 제일 앞에 위치하고 있고 무인상, 문인상, 사자상이 나란히 서 있다.

<반대편 석상>


<무인석>

원성왕릉 서상을 대표하는 무인석. 조각수법이 매우 사실적이고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후대 조선왕릉 무인석은 형식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데 비해서 실제 인물을 조각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서역인의 얼굴 특징이 잘 담겨져 있는 무인석 얼굴>

많은 사람들이 통일신라 향가인 ‘처용가’와 민간신앙에 전래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때에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 나가 놀다가 바야흐로 돌아가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은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시어 이를 풀어야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칙명을 내려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왕령이 내려지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이에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왔는데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했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뒤에서 본 모습>

<2015년 무인석>


<맞은편 무인석>

<무인석 얼굴>


<무인석의 복식과 무기>

한반도 고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환두대도를 들고 있다.


<무인석과 나란히  서 있는 문인석>

문인석도 강건한 느낌을 주고 있다. 통일신라 관료들의 복식을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문인석 얼굴>


<뒤에서 본 모습>

불교를 숭상했던 통일신라시대라서 그런지 불법을 수호하는 상스러운 동울인 사자상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에서는 석양과 석호(호랑이)가 대신 왕릉주변에 세워져 있다.

<왕릉을 지키고 있는 사자상>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상>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상>

<서쪽과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상>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자상>

화표(華表)는 중국 궁전이나 능역 앞에 세운 1쌍의 석주를 말한다. 후대에는 구름용무늬를 부조하하거나 날개모양으로 장식한다. 북경 자금성 입구에도 화표를 볼 수 있다. 당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입구에 세워진 1쌍의 화표석>

조선 왕릉은 석상과  석물들이 조선왕릉은 봉분 앞에 세워져 있으며, 문.무인석과 함께 석마가 추가되어 있다. 왕릉 앞에 세워진 석등 또한 원성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자상을 대신하여 석호와 석양이 봉분 주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 세워진 제단 또한 4발이 달린 혼유석으로 바뀌었다. 화표석 대신 망주석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괘릉에 세워진 석상에 비해 사실적인 표현은 줄어들고 만화같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 왕릉 석상과 석물>

괘릉이라고 불렸던 신라 38대 원성왕릉은 신라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인 면을 제일 잘 갖추고 있다. 토함산자락이 들판과 만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원성왕릉은 봉문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으로 둘러져 있고 그 바깥쪽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놓고 있다. 정면에는 서구의 신전 제단처럼 생긴 웅장한 상석이 놓여져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 원성왕릉(사적)>

괘릉으로 불렸던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능역을 들어서면 능역을 구성하는 소나무숲 입구에 석물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고, 그 안쪽에 봉분이 자리하고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조성한 왕릉으로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되는 곳이다.

<왕릉에서 내려다 본 석상들이 세워진 왕릉 입구>

<2015년 가을 원성왕릉>

<2015년 가을 서쪽편 석상과 석주>

<동쪽편 석상과 석물>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 보물 통일신라시대 8세기말,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원성왕릉 입구에는 남쪽으로부터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가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이중 무인석은 박진감이 넘치며 그 인물에 서역인(西域人)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통일신라가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석조물들은 8세기 경 신라인의 사실적이며 예술적인 감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