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기는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서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시기는 약 70년(475~538) 정도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웅진으로 천도를 했지만 지방세력의 협조하에 비교적 빠른 기간내에 새로운 왕도를 건설하였다. 웅진기 왕성은 금강과 맞닿아 있는 공산성을 중심에 배치하여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었다. 이 시기 백제는 신라와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및 일본열도와의 관계도 강화하였다. 국가가 안정을 되찾은 무령왕대에는 중국 남조의 양에 사신을 보냈으며,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다시 신라와 가야 그리고 왜에 전하였다.
웅진기 백제는 약70여년 정도로 그 기간도 짧고 국력도 크지 않았기때문에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많지 않은편이다. 공산성은 당시 백제의 왕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 모여있는 송산리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그중 무령왕릉으로 대표되는 벽돌을 쌓아 조성한 전축분(塼築墳)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무덤 양식이다. 일제강점기 송산리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이 많지 않았으나 1970년대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웅진기 백제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웅진기 백제의 왕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 공산성>
고구려의 압박에 밀려 한성에서 내려오면서 터를 잡은 곳이다. 금강이 방어선 역할을 하지만 왕성으로서는 좁아 보인다.
백제의 웅진천도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불타고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아 도읍을 서울에서 공주(熊津)로 옮긴다. ‘웅지백제’란 문주왕의 웅진천도(475년)부터 성왕의 사비천도(538년)까지 공주에 도읍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공주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유리한 천혜의 방어벽을 갖추었고, 백제와 긴밀한 관계의 지방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왕권이 약하여 혼란이 거듭되었으나 무령왕대부터 안정을 되찾았다. 무령왕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물리치고 중국과 교류를 크게 확대하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도읍을 더 넓은 부여(사비)로 옮겨 백제의 힘과 문화를 크게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웅진백제시기는 한성백제의 문화를 이어받고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여 화려한 백제문화를 다시 꽃피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단지, 공주 취리산, 백제
단지, 작은단지, 공주 금학동, 백제
접시, 굽다리접시, 공주 금학동, 백제
세발토기, 공주 산의리, 백제
입큰단지, 공주 금학동, 백제
곧은입단지, 공주 산의리, 백제
곧은목단지, 공주 산의리, 백제
곧은입단지, 공주 금학동, 백제
팔찌, 수정구슬, 공주 웅진동, 백제
반지, 공주 금학동, 백제
금동귀걸이, 공주 웅진동, 백제
은장식못, 공주 금학동, 백제
금나뭇잎장식, 공주 옥룡동, 백제
금제장식, 공주 금학동, 백제
공주의 백제유적
475년 웅진천도로 공주와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백제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공주지역의 대표적인 백제유적은 당시 도성이었던 공산성, 왕의 묘지였던 송산리고분군을 비롯한 백제고분군, 무령왕의 장례장으로 추정되는 정지산유적 등이다. 백제왕실은 웅진천도 직후 벽돌무덤이나 굴식돌방무덤과 같은 외래무덤양식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중국 남조에서 지배층의 무덤양식으로 유행하던 벽돌무덤의 수용은 이후 마한.백제지역의 굴식돌방무덤 축조기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공주박물관>
흑갈유항아리, 공주 수촌리, 중국 남조
네귀달린항아리, 공주 수촌리, 중국 남조
청자잔, 공주 수촌리, 중국 남조
흑갈유항아리편, 홍성 신금성, 중국 남조
백제에 수입된 중국도자기
백제는 3세기 중후반부터 중국 서진의 도자기를 수입한 이래 지금까지 약 100여점 이상의 중국도자기가 백제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백제에 수입된 중국제 도자기는 청자와 흑유계통이 많다. 그 중에서 청자는 입이 넓고 어깨에 고리형의 귀가 붙어 있는 반구사이호, 어깨에 네개 혹은 여섯 개의 귀가 부착된 사이호와 육이호, 그리고 청자완 등이 있다. 어깨 한쪽에 닭모양의 주구를 붙이고 다른쪽에 손잡이를 붙인 닭모양단지는 4세기경에 동진에서 제작된 것들이 백제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양직공도 중 1번째,
파사국(페르시아) 사신과 백제 사신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페르시아와 백제의 복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많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세련된 복식을 하고 있다. 옆에는 백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양직공도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신이 없다. 당시의 외교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오래전에 동이(東夷)에서 나왔고 마한에 속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을 침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진나라 이래로 많은 공물을 바쳤다. 동진 의희(405~418년) 중에는 여전(전지왕)이 송 원가(423~453년) 중에는 여비(비유왕), 제나라 영명(483~493) 중에는 여태(동성왕)가 모두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태를 정동장군에 제수하였다. 얼마 후 고구려에게 격파 당하였다. 보통2년에 여륭(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그 도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담로라고 하는데 중국의 군현에 해당한다.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왕족을 나눠 보내 분거하게 하였다. 주변 소국으로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이 있는데 백제에 부속되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동일하나, 걸을 때 두 팔을 벌리고 걷지 않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를 펴지 않았다. 모자를 관(冠)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複衫)이라 하고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 중에는 중국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 또한 진한의 풍속이 남은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양직공도 중 2번째,
양직공도 중 3번째,
양직공도 중 4번째,
양직공도, 중국 북송
「양직공도(梁職貢圖)」는 두루마리로 된 그림으로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때인 520~30년대에 만들어졌다. 당시 양나라 황제에게 사신으로 온 외국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그 사신을 보낸 나라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백제사신의 모습과 백제에 대해 설명이 남아 있는데, 다른 나라의 사신들의 모습에 비해 단정한 느낌을 줄 정도로 세련된 모습이다. 또한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에 진출하였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정비된 지방통치체제, 영역 확장, 언어, 풍속 등의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전반 웅진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원본은 20세기 초에 유실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북송대인 10세기 초에 모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왕회도(王會圖, 중국 당나라) 중 1번째
2번째
3번째
4번째
5번째. 백제 사신이 묘사되어 있다.
6번째
번객입조도(蕃客入朝圖, 중국 남당) 중 1번째.
백제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2번째.
3번째. 고구려, 신라, 일본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4번째.
‘당염림본왕회도’와 ‘오대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는 대문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으로 중국 남조 양나라때 작품인 ‘양직공도’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당염립본왕회도’는 7세기초, ‘오대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국가박물원 소장의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만 남아 있는 반면, 이들 그림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어 삼국인들의 용모와 복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하지만 3점의 그림에 그려진 사신들의 모습이 매우 다르고, 관련 국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동일한 작품에 대한 모사본이 아닐 가능성이 크므로 향후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연꽃무늬벽돌, 중국 난징 출토
연꽃무늬 전돌, 중국 난징 출토
연꽃무늬 수막새, 중국 난징 출토
‘양관와위사의’명 전돌, 공주 송산리, 백제
이 벽돌은 벽돌무덤인 송산리 6호 무덤의 널길을 막는데 쓰인 것으로 측면에 새겨진 글은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중국 양나라 관영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 혹은 “양선이위사의(중국 양나라 사람 선(宣)이 분묘의 축조를 관리하였다.”로 읽히고 있다. 백제의 기와와 벽돌의 제작, 혹은 분묘의 축조에 중국 양나라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벽돌의 형태와 문양은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과 닮았기 때문에 무령왕릉을 쌓기 위한 벽돌을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연꽃무늬수막새, 공주 송산리.공주 공산성, 백제
연꽃무늬 전돌, 무령왕릉, 백제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시 웅진동과 금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백제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분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 이외에 굴식돌방무덤 십여기가 알려져 있다. 1920~1930년대부터 백제왕릉으로 추정되어 발굴조사까지 이루어졌으나 무령왕릉을 제외한 모든 고분들은 이미 도굴된 뒤였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었다. 내부에서는 소량의 금.은제품들이 화려했던 고분부장품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중국에서 유행한 벽돌무덤으로, 남조에서 많이 보이는 장방형 터널식 고분이다. 이는 당시 무덤의 축조에 있어 중국의 고분양식과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당시의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공주박물관>
웅진기 백제의 대표적인 유적인 공주 송산리고분.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웅진기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모여 있다.
목관 복원 추정도
널고리, 송산리 1호분, 백제
꺾쇠(송산리 3호분), 관못(송산리 1.3호분), 백제
굽다리접시(무령왕릉 출토), 세발토기(송산리고분군), 백제.
깊은바리(송산리8호분), 두귀달린단지(송산리8호분), 백제
병, 송산리1호분, 백제
동전무늬전돌(송산리고분군),연꽃무늬전돌(무령왕릉), 백제
문자있는 전돌, 무령왕릉, 백제
은팔찌, 은사슬, 송산리고분군, 백제
은제장식(송산리고분군), 금제금구(송산리4호분), 달개(송산리4호분), 백제
유리구슬(송산리8호분), 금제구슬(송산리고분군), 백제
호박옥(송산리고분군), 흑옥(송산리고분군), 백제
허리띠장식, 송산리고분군, 백제
화살통장식(송산리고분군), 화살촉(송산리1.3호분), 허리띠장식(송산리4호분), 백제
대도장식(송산리4호분), 철검조각(송산리4호분), 손칼(송산리고분군), 백제
그릇받침, 傳 공주 송산리
그릇받침은 바닥이 둥근 항아리를 받치기 위한 것으로 형태에 따라 화로모양그릇받침, 바리모양그릇받침, 원통모양그릇받침, 고리모양그릇받침 등으로 구분된다. 원통모양의 그릇받침은 백제토기 중대형에 속하며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다. 정지산유적과 같은 제사유적을 비롯하여 도성이나 대형 고분과 같은 중요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화로모양과 바리모양은 일상용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과 제사유적과 신라 및 가야지역의 여러 의례 관련 유적을 볼 때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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