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에 밀려 공주로 도읍을 옮겼던 웅진백제기 왕성 역할을 했던 산성이다. 서울의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즈막한 구릉이 둘러싸고 있어 작은 계곡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원래는 백제의 다른 성곽처럼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석축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웅진기 백제의 왕성이었던 공산성 내에는 백제의 왕궁터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터 등이 남아 있으며, 연꽃무늬 기와를 비롯하여 토기 등 백제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오랬동안 지역의 거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지산 유적에서 본 공산성 전경>
금강변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으로 둘러쌓인 지역에 성을 쌓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역 거점으로서 꾸준히 개.보수되어 왔다. 지금은 조선후기에 쌓은 석축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은 공주시내 중앙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금강의 남쪽에 연접해 있는 공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공산성에 자리를 잡았다. 공산성은 왕성으로서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켜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중심 터전이 되었다. 538년 사비(부여)로 도읍이 옮겨진 이후에도 공산성은 여전히 백제의 북방을 지키는 중심성이었다. 특히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침공 떄에는 의장왕이 공산성에 웅거하여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자 노력하였던 곳이었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추정왕궁터, 저수시설, 목곽고 등 다양한 유적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산성 내에서 확인된 다량의 기와, 연꽃무늬와 바람개비무늬로 장식된 와당, 중국제 자기 등은 백제 시기 공산성의 위상을 보여주며,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등은 백제 멸망기의 상황을 보여준다. 2014년 성안마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곽고와 다양한 목공구는 당시 백제의 목재 가공 기술을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산성 발굴유적 분포도
공주읍지 공주목지도, 19세기
목활자본의 사찬(私撰) 읍지로, 개별 읍지로서는 공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총6권2책 160장의 방대한 분량으로 공주의 강역, 연혁, 사찰, 지역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공산성은 성지(城址)조에 “쌍수산성(雙樹山城), 옛날 이름은 공산산성으로 부(部)의 북쪽 3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청동거울, 추정왕궁터, 백제
봉황모양향합, 추정왕궁터, 백제
흑유완, 성안마을, 백제
연꽃무늬 수막새, 바람개비무늬 수막새, 추정왕궁터, 백제
‘웅천’명 기와조각, 추정왕궁터, 통일신라
병, 성안마을, 백제
뚜껑있는 단지, 성안마을, 백제
등잔, 추정왕궁터.광복루앞광장, 백제
목기, 성안마을, 백제
병, 추정왕궁터, 성안마을, 백제
벼루(추정왕궁터), 벼루(성안마을), 백제
세발토기, 성안마을, 백제
네발토기, 성안마을, 백제
사발, 뚜껑접시, 곧은입단지, 성안마을, 백제
사발, 광복루앞광장. 12각 건물터, 백제
사발, 공산성, 백제
공산성 모형,
금강변 낮은 구릉으로 둘러쌓은 좁은 지역에 왕성이 형성되어 있다.
서쪽편 금서루에서 본 모습.
공산성은 금강 남안에 위치한 백제 시기 산성이다. 본 모형은 현재의 공산성 모습을 일정 비율로 축소하여 제작하였다. 모형의 축소 비율은 지형은 1/300, 건물은 1/200로 색상과 질감을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하였다. <출처:공주박물관>
1) 광복루,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금강과 공산성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공산성에서 유일하게 토성이 겹성으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데라우찌 총독은 공주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중군영 문루의 부재를 활용하여 공산성 제일 높은 곳에 누각을 짓고 ‘웅심각’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퇴락한 누각을 공주시민들이 합심하여 보수하였아. 이듬해 4월 김구, 이시영 선생 등이 공주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둘러본 후, 국권회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모든 면이 개방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2)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24대 동성왕 떄에 궁의 동쪽에 세운 누각 건물로, 높이 5장(3m)으로 전한다. 1980년 대의 발굴조사 시, 공산성 동쪽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중턱 서쪽 사면에서 건물터 1동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건물터가 고층누각이란 이유 등으로 백제시기 임류각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 조사된 건물터를 백제시기의 유구로 볼 만한 적극적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 백제의 임류각 터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복원된 임류각 건물은 정면6칸, 측면5칸이며, 건물터가 확인되 위치에서 위쪽에 새로이 복원된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3) 영동루
남동 방향의 석성과 토성이 분기되는 지점에 세워진 누각이다. 토성이 절단된채 5m 정도의 너비로 남아 있었던 지역인데, 1980년의 발굴조사에서 문터가 확인되어 이후 복원한 것이다. 확인된 문터는 길이 6.5m, 너비 2.46m의 규모로 문지석 2매가 확인되었고, 자연석으로 쌓은 통로벽을 갖추고 있었다. 복원된 문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규모는 남아 있는 기록을 참조하여 3칸으로 복원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4) 진남루, 공산성 주 출입문
공산성 남쪽 문루이자 읍에서 성내로 출입하는 정문인 주문으로, 현재까지도 남쪽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충청도 관찰사 유근이 1602년에 공산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으면서 당시에 함께 개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복적인 보수가 있었음에도 문터 자체는 원상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문터는 석축기단을 좌우대칭으로 높게 조성하고, 두 석축기단에 장대석을 걸쳐 덮은 다음 문루를 세운 누각이다.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으며, 누각 아래에 입구를 열어 성문의 역할도 함께 하였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문루는 누각 건물이긴 하나 특별한 시설이 없고 성의 전면이 남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진남루
공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람루이다. 공주읍 시가지와 연결되는 출입문이다.
5) 금서루
공산성의 서문으로, 현재는 추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5년의 성곽 보수 시에 돌로 쌓아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 규모로 복원한 것이다. 이것도 본래의 성문터가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부분적으로 조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여지도서』에 따르면 서문은 3단이란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1990년 본래의 문터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복원하였다. 복원된 문루는 개구식으로 새롭게 입구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올린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산성 서문에 해당하는 금서루.
1975년에 복원하였다. 문루 아래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있으며, 지금은 공산성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6) 공산정
옛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다. 1970년대 전망대 형식으로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으로 불렸다. ‘공산정’은 시민공모에 의해 2009년 새로이 지어진 것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서문인 금서루와 북문인 공북루 사이의 구릉에 우뚝 서있다.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에 오르면 금강과 공주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산정
금강과 주변지역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위치한 정자이다.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최근에 전망대 용도로 지은 정자이다.
7) 공북루, 공주의 출입 관문
조선중기에 개축된 북문루. 남문이자 정문인 진남루와 함께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출입 관문이었다. 정면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건물로,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금강에 바로 접해 경치가 좋았던 까닭에 본래 기능인 문루뿐만 아니라 정자로서의 기능도 겸했을 것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가 있었는데, 16세기 무렵에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이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유근이 1602년에 공산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으면서 그 터에 공북루를 짓고, 그 옆에는 월파당을 지었다고 전한다. 유근이 공북루를 신축한 후에도 여러 차례 개보수가 이루어졌는데 공북루와 함께 세웠던 월파당은 많이 퇴락하여 철거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산성 북문인 진북루.
금강 나루를 통해 금강 이북 지역과 연결되는 공주의 관문이다.
8) 연지와 만하루
연지와 만하루.
북문인 진북루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 유지들이 금강 경치를 감상하면서 풍류를 즐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9) 영은사,
공산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구체적인 창건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사찰 내에서 통일신라시기 우물 뚜껑 등이 출토되어 적어도 통일신라시기부터 불교 관련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은사 앞 빈터에서 건물의 기단석으로 볼 수 있는 석렬과 그 주변으로 와적층, 배수로 형상의 시설과 6점의 통일신라 불상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쪽에는 원통보전이란 법당이 있고, 북단에 강당인 관일루가 위치한다. <출처:공주박물관>10) 쌍수정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전각이다. 인조가 이괄의 난(1642년)을 피해 파천했을 떄 머물렀던 장소로 전해진다. 인조는 피난하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서 정난의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후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인조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머물렀던 쌍수에 금대와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인조의 유서가 깃던 쌍수가 고사하자 1734년(영조10)에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왕의 유지를 기념하여 정자를 세우고 쌍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쌍수정 앞 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연병장으로 사용되었다. 1985~86년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기 벽주건물터, 연못, 목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어 웅진도읍기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산성 서남쪽 정상부에 위치한 쌍수정.
주변에 웅진기 백제의 왕궁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쌍수정 아래 웅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여러동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대전 월평동유적,
대전 월평동유적은 월평동 산성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에서는 나무로 만든 지하창고, 울타라의 나무기중자리, 울타리를 에워싸는 도랑, 돌로 쌓은 성벽, 집터, 둥근 저장구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처음에는 고구려가 일시적을 사용하다가 후에 백제가 시설을 보강하여 장기간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시설은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숟가락, 가야금, 말안장, 유리를 녹이는 도가니 등 생활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나왔다. <출처:공주박물관>
대전 월평동 유적 발굴.조사
안장가리개, 대전 월평동, 백제
검은칠기그릇.나무숟가락. 대전 월평동, 백제
가락바퀴, 어망추, 대전 월평동, 백제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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