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공주 송산리고분군(사적), 웅진기 백제 왕족들의 무덤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사적)이다. 웅진기 백제를 대표하는 무령왕을 비롯하여 백제 왕과 왕족들이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고분군이다. 이 곳에는 무녕왕릉을 포함하여 십여기의 무덤이 햇빛이 잘드는 나즈막한 구릉에 남쪽을 향해 줄지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는 고분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 백제 굴식돌방무덤 십여기가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일제강점기인 1920~1930년대에 발굴조사까지 이루어졌다. 대부분 유물들이 도굴되었기 때문에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특히 무령왕릉과 6호분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한 벽돌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당시 무덤의 축조에 있어 중국의 고분양식과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당시의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사적)>

송산리고분군의 무덤들은 경주의 신라 왕릉이나 가야 고분에 비해서 크도 작은 편이며 껴묻거리로 묻은 부장품 또한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편이다. 내부는 중국 남조 귀족들의 무덤이나 고구려 굴식돌방무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웅장하거나 화려한 면모가 거의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나 가야와는 달리 백제가 남조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당시 중국의 정형화된 무덤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왕성이었던 공산성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서방을 죽은자들의 땅이라는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 묘지석의 매지권이나 무덤을 지키는 석수, 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 등 당시 유행하던 도교 사상 또한 많이 반영되어 있다.

<무덤 배치>

아래쪽에 무령왕릉과 5,6호분, 위쪽에 1~4호분이 배치되어 있다. 윗쪽에는 적석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제사유적인 정지산유적과 연결된다.

<송산리 고분군 입구.>

<표지석>

최근에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표지석이 입구에 세워져 있다.

송산리고분 발굴과정
송산리고분군이 무덤7기 중 1~4호분은 1927년에 발견되었다. 4기 모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발굴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이 진행되었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고 1~4호분으로 명명되었다. 발굴 당시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6호분은 1932년에 앞서 발굴한 4기의 고분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위해, 관람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 무덤 역시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1~4호분과 마찬가지로 굴식돌방 무덤이고, 벽돌로 만든 관대가 두개 남아 있으며, 입구에서 널방에 이르는 널길이 우측에 붙어 있다. 5호분도 부실한 조사와 도굴 등으로 인해 약간의 금.은제 장신구와 그리고 토기, 철제 유물 등이 남아 있다. 6호분은 1932년 일본인 가루베지온인 발견, 발굴하였는데, 공식적인 조사는 193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뤄졌다. 특히 사신도로 유명한 6호분은,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으로, 규모가 무령왕릉에 필적할 정도지만, 이 또한 잘못 된 발굴과정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이다.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에 6호분의 현무릉으로 인식되어 주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인지 다행스럽게 도굴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 왕릉은 1971년 여름 장마철에, 5호분과 6호분에 스며드는 물기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4,600여 점 이상에 이르는데, 그 하나하나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학술적 가치또한 매우 높다. 또한 무덤속에서 나온 묘지석으로 인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왕릉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백제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이고, 나아가 새로운 백제사 연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릉 발굴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출처:공주박물관)>

송산리고분군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도굴에 가까운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당시 출토된 유물은 거의 없다. 70년대에 발굴된 무령왕릉조차 사회와 언론은 관심때문에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다. 1971년 배수로 작업 중 우연히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덤은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벽면에는 등장을 올려 놓았던 등감과 창문시설을 설치하였다. 무령왕릉 입구에서는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주인과 만든 연대를 기록해 놓고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 발굴 당시 모습>

배수로 작업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입구가 벽돌로 막혀 있었다.

무령왕과 무령왕릉 발견의 의의
백제 25대왕인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여 목을 백강에 버리고 혼란한 정국을 수습했다. 또한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지배를 강화하는 등 왕권 강화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정치를 안정궤도에 올려 놓았다. 무령왕은 대외교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고구려의 압박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진문물을 과감하게 수입함과 동시에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서 국가의 대외적 발전을 꾀했다. 이렇듯 백제는 무령왕의 뛰어난 통치력을 바탕으로 고대 동아시아에서 그 위상을 높이는데 성공한다. 사실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1년 무령왕릉의 발견을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무령왕릉은 왕릉 자체가 갖은 가치뿐만 아니라 그 안에 부장되어 있던 4,600여 점의 다양한 유물들 하나하나가 백제의 정신이자 세련된 백제 문화의 진수 그 자체였다. 이 가운데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금속공예품은 높은 품격과 고도의 제작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시 백제 장인들의 예술적 감각과 금속을 다루는 기술수준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출토유물인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이라는 것과 연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고대사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술하는데 유용한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동시에 당시 동아시 및 삼국관계에서 차지하는 백제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모형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무령왕릉 널길과 널방>

고구려 고분을 비롯하여 당시에 널리 사용되는 굴식돌방무덤과 형태는 비슷하지만 구운벽돌을 사용하여 널길과 널방을 조성하였다. 중국 남조 지배층 무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무덤형태이다.

<발견 당시 널길의 모습>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석과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석수가 무덤 입구에 놓여 있다. 묘지석 위에는 중국 남조 양나라 동전인 오수전이 놓여 있다. 이는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하고 댓가를 지불한다는 의미로 석수와 함께 당시 중국으로부터 도교사상이 전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묘수 앞 제기로 보이는 그릇들>

묘지석 앞에는 제기로 보이는 그릇, 청자단지 등이 놓여 있다. 청자단지는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당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령왕릉 발견 당시 널방의 모습>

나무로 만든 관과 금제관장식을 비롯하여 많은 껴묻거리가 함께 묻혀 있다.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 비해서 껴묻거리는 수량이 많지 않다. 당시 중국 지배층의 무덤조성 형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앞쪽 공간>

앞쪽에는 널방과 공간이 구분되는 약간의 공간이 있다. 일반 주택의 현관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공주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무령왕릉 내부>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
무령왕릉을 축조하는데 사용된 벽돌의 종류는 모두 28가지이다. 주로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있는 벽돌이지만 글자가 있는 벽돌과 무늬가 없는 벽돌도 사용되었다. 연꽃무늬 벽돌은 벽돌을 쌓는 위치에 따라 문양이 3종류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부여 정동리 가마터에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으로 추정한다. 무덤의 벽을 쌓아 올리는 방법은 4평1수(四平日羞)식으로 먼저 벽돌을 눕혀서 4단의 벽을 쌓은 뒤(가로쌓기), 그 위에 1단을 세워 쌓는(세로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라갔다. 글자가 있는 벽돌은 6종류가 보이는데 ‘대방(大方)’, ‘중방(中方)’, ‘급사(急使)’ 등의 문자가 압출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는 사용위치를 지정한 일종의 설계부호로 이해되고 있다. ‘대방’이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은 바닥면에 깔 벽돌이란 의미이다. 벽을 올리는데 이용할 벽돌은 ‘중방’, 천장에 들어갈 벽돌은 ‘급사’라고 표현했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모형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무령왕릉 내부>

바닥에 전돌을 깔았놓았으며, 벽돌로 쌓아 벽면을 쌓았다.

<등잔이 놓여 있던 벽면의 작은 감실>

<무령왕릉 출토 연꽃무늬 전돌>

왕릉의 구조를 크게 나누면,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과 부부를 모신 널방으로 나뉜다. 널길은 남북길이가 2.9m, 동서너비는 1.04m, 바닥에서 천장짜기 높이는 1.45m이다. 천장의 모습은 반원형의 터널형태, 즉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널방은 길이가 4.2m, 너비가 2.7m이며, 왕 부부가 모셔진 관대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3m이다. 특히 무덤방의 북쪽 벽과 동서 양쪽 벽에는 모두 5개의 보주형 등감이 설치되었다. 등감에는 등잔이 놓여 있고, 그 등잔에는 심지자국이 남아 있어 무덤 내의 조명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내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널길과 널방을 구분하는 공간이 배려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마치 가옥의 현관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주는 곳으로 너비는 1.10m 정도이며, 0.15m 깊이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무령왕릉은 백제시대의 건축 수준, 나아가 예술적 감각이나 사상적 배경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 5호분

5호분은 돌을 쌓아 돔형으로 천장을 만든 전통적인 굴식돌방무덤이다.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으며 유물들은 대부분 도굴되었다. 발굴조사과정에서 약간의 장신구와 관장식 일부가 출토되었다.

<송산리고분군 입구에 위치한 5호분>

<송산리 5호분 내부 모형>

<관이 놓여 있던 자리>

송산리5호분은 굴실돌방무덤으로, 구릉 남쪽의 경사면을 파고 들어가 묘광을 만들고 안에 자연활석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이 무덤은 널길과 널방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널방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거의 비슷한 정사각형의 형태이다. (남북 3.5m, 동서 3.3m) 무덤을 만든 방법은, 깬 돌을 이용하여 1.3m 가까이 수직으로 쌓은 다음, 그 위쪽부터는 점차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천장이 돔형태가 되도록 하고, 천장에는 큰 판석을 1매 올려놓았다. 이런 천장의 형태를 궁륭상 천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벽과 천장에는 백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널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은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 한편 널방에는 목관을 올려놓았던 관대 2개가 동서로 나란히 남아 있었다. 1~4호분이 강돌을 깐 것과 다르게 벽돌을 이용했는데, 길이가 큰 서쪽(2.4m)이 남자, 동쪽(1.8m)이 여자용으로 추정된다. 5호분도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도굴되어 금.은제 장신구 및 철제 유물이 약간 발견되었을 뿐이다. 5호분도 웅진시대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하게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 6호분

입구에서 2번째에 위치한 송산리 6호분이다.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을 설치하였으며,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를 그렸다. 벽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통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고 있다.

<송산리 6호분>

<6호분 내부 모형>

무령왕릉과 마찬가지로 벽돌을 쌓아 널방과 널길을 만들었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무령왕릉과 비슷한 구조인 것으로 볼 때 왕이나 왕비 등 상당히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에 새겨진 글자>

6호분 벽돌에선 중국 양나라의 무덤 벽돌을 본보기로 하여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무령왕릉과 함께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벽돌에는 오수전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무령왕릉의 오수전처럼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도교 사상이 반영된 부분이다.

<6호분 내부 모형>

바닥에는 전돌이 깔려 있으며, 관을 놓는 자리가 한곳이다.

<벽면에 그려진 사신도 중 동쪽 청룡>

벽돌로 쌓은 벽면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가 잘 알려져 있는데,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쪽 현무>

<무덤으로 들어오는 널길>

<남쪽 주작>

널길 위에는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과 함께 해와 달, 구름을 그려놓고 있다.

6호분의 가장 큰 특징은, 벽돌무덤으로 고구려와 같은 사신도 있다는 점이다. 무덤 내부는 길이가 3.7m, 폭이 2.2m이고 천장은 터널형이다. 구릉 상부 쪽에 묘광을 파고 벽돌로 전체를 축조하였으며, 벽면은 중국 돈 오수전 무늬의 벽돌이고 가로와 세로 쌓기를 반복해서 쌓아 올렸다. 또한 동벽과 서벽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燈龕)이 각각 3개씩이고, 북벽에 1개가 있다. 동감 바로 위에는 가창(假窓)이 있어 마치 집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무덤은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어 송산리 벽화 고분이라고도 한다. 벽면에 사신도를 그리는 방법은 벽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먼저 서벽에는 백호, 남벽에는 주작, 북벽에는 현무를, 그리고 남벽의 주작 좌우에는 해와달, 구름을 묘사했다. 이 6호분의 사신도는 웅진시대 유일한 벽화이자 부여 능산리 동하총 벽화와 함께 백제의 대표적 고분 벽화이다. 6호분도 도굴과 잘못된 발굴로 인해 아쉽게도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널방에는 관대가 1기만 남아 있어 한사람만 안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왕과 관계가 깊은 인물로 보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학자에 따라서는 동성왕으로 보기도 하고, 무령왕의 전 왕비로 보기도 한다. <출처: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 1~4호분

송산리고분군 중 윗쪽에 위치한 1~4호분이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발견되어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에 가까운 발굴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모두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으로 원래는 5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발굴 당시 금제와 은제, 그리고 금동제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한다.

<송산리고분군 뒷편 1~4호분으로 들어가는 길>

<1~4호분>

1~4호분은 전통적인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을 발굴.조사된 무덤이다.

<입구>

지금은 돌로 쌓아 만든 1개의 고분 입구만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봉분 형태로 만들어 놓고 있다.

<1호분에서 발견된 널고리>

<1호분과 3호분에서 발견된 관못과 꺽쇠>

<1호분에서 발견된 병>

<4호분에서 발견된 금구와 달개 장식>

<4호분에서 발견된 철제칼과 장식>

<8호분에서 발견된 유리구슬>

<송산리 8호분에서 출토된 바리와 단지>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허리띠 장식>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1~4호분 위쪽에는 한성백제기 무덤형태인 적석총처럼 생긴 유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계단 모양으로 3단으로 쌓은 형태로 관을 놓았던 자리는 발견되지 안았다고 한다. 제사시설로 보는 견해도 있다.

<1~4호분 위쪽>

송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적석유구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인 적석총처럼 정사각형의 형태로 된 것인데, 제 1단은 폭이 15m, 제2단은 11.4m, 제3단은 6.9m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계단모양을 하고 있는 3단의 적석유구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겉은 고구려 적석총과 비슷하지만 내부는 흙으로 쌓아 올려 차이가 있다. 목관을 놓은 흔적은 없으며, 대신 그 자리에 10cm 두께로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았다. 아울러 내부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와 옹관편이 수습되었다. 이 유구는 서울 석촌동 2호분이나 4호분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성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가묘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덤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사시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출처:문화재청>

공주 송산리고분군, 사적, 충남 공주시 금성동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에 연접한 송산(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년)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의 두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형태로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