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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범패음악을 도입한 진감선사의 탑비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이다. 통일신라 말 승려였던 진감선사의 탑비로 진성여왕 때(887)에 세워졌다.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이 온전히 남아 있다. 머릿돌에는 보주를 다투는 용이 조각되어 있으며 앞면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거북받침돌이나 이수에서 보여주는 조형미나 조각수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문인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남아 있어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국보)>

우리나라에 범패음악을 도입한 진감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통일신라말 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쓴 탑비이다. 서예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유물이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거북받침돌>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은 다른 탑비에 비해 약간 왜소해 보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등에는 6각의 무늬가 채워져 있다.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뒤에서 본 모습>

진감선사 혜소는 당나라서 출가하여 공부하다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상주와 지리산 등지에서 남종선(南宗禪)과 범패음악을 널리 전하였다. 880년(문성왕 12)에 쌍계사에 입적하였는데,  승탑은 쌍계사 뒷편 능선에 모셔져 있다.  탑비는 그의 죽은지 37년이 지난 887년에 지역문인들이 그를 기억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때 왕이 시호를 내렸으며, 그가 수행했던 옥천사’도 ‘쌍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몸돌에 새겨진 글>

당대의 문인 최치원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

보주를 다투는 용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가운데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뒤에서 본 모습>

쌍계사는 통일신라 때 의상의 제자인 삼법화상과 대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혜능대사의 머리를 모셔다가 지금의 금당자리에 모셨다고 전해진다. 이후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차를 들여와 절 주위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옥천사(玉泉寺)였는데, 정강왕 때 두개의 계곡이 만나는 자리라 하여 쌍계사(雙磎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불교음악인 범패를 가려쳤기때문에 우리나라의 불교음악을 이끌어 온 사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동 쌍계사>

가람배치나 형식을 중요시 하지 않는 선종 사찰답게 사찰경내 중심에는 진감선사탑비가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모습>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 국보,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신라말의 명승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이다. 선사의 속성은 최씨로 804년(애장왕 5)에 당으로 들어가 신감대사(神鑑大師) 아래에서 계를 받았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신라로 돌아와 역대의 왕에게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옥천사(玉泉寺)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은 885년에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라 추시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고, 정강왕은 옥천사를 쌍계사(雙磎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비석은 887년(진성여왕 1)에 건립되었다.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는데 그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꼽힌다. 전체 높이는 363cm, 비신의 높이는 213cm, 너비는 약 1m, 두께는 22.5cm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