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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 화엄사를 크게 중건한 벽암선사의 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 금강문 앞에 세워져 있는 ‘벽암국일도대선사비’이다. 조선중기 승려인 벽암선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비석은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전통적인 탑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머리받침돌이나 머릿돌의 조각수법 등은 양호한 편이나 돌의 재질이 좋지 못해 마모가 심한편이다. 통일신라나 고려말에 세워진 비석보다 오래된 느낌을 준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글을 짓고 형조판서를 지낸 오준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벽암(碧巖)은 보은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출전하여 호남지방에서 활동했으며, 인조 때에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병자호란때에는 의승들을 모집하여 참전을 준비하였으나 강화가 성립하여 지리산으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벽암은 승려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고, 전국 각처에 산성을 축성하는데 참여하여 불교가 정치적으로 인정받고 조선후기에 새로이 부흥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화엄사와 쌍계사를 중수하는 등 거듭된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사찰들을 복구하는데 기여하였다. 속리산 법주사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으며, 그의 승탑은 조계산 송광사에 위치하고 있다.

<구례 화엄사 벽암국돌대선사비>

지리산 화엄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승려 벽암대사를 기르는 비석이 화엄사 금강문 앞에 세워져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며 전체적인 조형미가 뛰어난 편이다.

<거북받침돌>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거북받침돌이다. 웅장하고 힘찬 모습으로 조각하였으나, 돌의 재질이 양호하지 못해 마모가 심한편이다.

<머릿돌>

용이 구름속에서 보주를 다투는 전통적인 탑비와는 달리 인동당초문과 귀신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글이 새겨진 비몸>

위쪽에 ‘벽암국일도대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아래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벽암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면서 조선중기 급격하게 위축되었던 불교를 중흥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세워진 벽암선사비>

팔도도총섭으로 남한산성 축성을 이끄는 등 전국적으로 큰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례 화엄사>

화엄사는 삼국시대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의상대사가 크게 중수하여 화엄십찰의 하나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 화엄사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전했으며, 당시 사찰은 전소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사찰은 인조대 벽암이 크게 중수하였다. 전국적으로도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다.

구례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 1663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각성(1575~1660년)의 탑비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출처: 화엄사>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