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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왕실의 의례 중 가례, 빈례와 군례

조선시대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를 그 형태나 목적, 내용 등에 따라 5가지로 분류하여 오례(五禮)라고 하였다. 오례에는 제사에 해당하는 길례(吉禮), 장례 절차 등과 관련된 흉례(凶禮), 왕실의 결혼 등 경사스러운 일에 관련된 가례(嘉禮), 외국 사신을 맞는 빈례(賓禮), 군사와 관련된 군례(軍禮)가 있다. 그 중 제사는 매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기때문에 일상적인 업무와 가까웠고, 흉례는 국왕이나 왕비의 장례에 해당하기때문에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기때문에 실제로 오례에서 길례와 흉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왕실의 혼사와 경사스러운 일과 관련된 가례(嘉禮)는 행사의 성격 자체가 즐거운 일을 축하하는 것이기때문에 당사의 경제적.사회적 여건에 따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그 절차나 진행이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기로소 관원들의 명단을 적은 현판(1891년),

기로소 관원의 직함, 이름, 생년, 자, 관향을 차례대로 기록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기로소의 인장(1902년),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만든 관인이다. 왕이 사용했던 인장이었으므로 은으로 제작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장수를 축하하다. 기로연(耆老宴)
기로연은 연로한 고위직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한 기관인 기로소에 등록된 신하들을 위로하려고 매년 2차례씩 열리던 잔치였다. 조선시대의 기로연은 1394년(태조3) 한양천도 후 태조 자신이 60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연로한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이 처음이었다. 기로연은 원칙적으로 정2품 이상, 70세 이상의 문신들만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로소에 들어가 기로연에 참석하는 것은 관리로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기로연에는 왕이 직접 참석하여 신하들을 위로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또한 왕이 직접 기로소에 입소하여 기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는데, 태조는 60세, 숙종은 59세,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각각 입소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수교도, 왕세자 관례 의식 그림(조선후기),

왕세자의 성인식인 관례 의식 절차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왕세자의 관례는 오례 중 가례에 속한다. <출처:고궁박물관>

 

대왕대비께 존호를 올리는 의식 절차

대왕대비께 존호를 올리는 의식에서 왕과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이 직접 어보와 어책을 드리는 ‘친상책보의(親上冊寶儀)’ 절차를 적은 글이다. 궁중 여인들을 위해 한글로 풀어 썼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조의 금보와 옥책(1861년),

‘건시태형창운홍기’라는 시호를 순조에게 올리면서 만든 어보와 옥책이다. 철종이 순조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올린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존호를 올리는 의식
조선시대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은 왕이나 왕비의 생시나 사후에 그 덕을 기리고 찬양하기 위한 것으로 가례 중 하나이다. 생전에 올리는 존호는 ‘가상존호(加上尊號)’라 하였고 사후에도 생전의 행적을 평가해 올리는 것을 ‘추상존호(追上尊號)’라 하였다. 존호를 올릴 때는 상호도감(上號都監)을 설치하여 관련 업무를 추진하였다. 존호는 대개 왕에게는 8자씩, 왕후에게는 2자씩 올렸는데, 존호를 올릴 때는 공덕을 새긴 책(冊, 옥책, 금책)과 존호를 새긴 보(寶), 인(印)을 함께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진연도첩(1712년, 복제),

숙종 즉위 30주년을 기념하여 1706년(숙종32)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잔치를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이 잔치는 임진왜란 이후 100여 년 만에 열린 외연(外宴, 왕실 밖의 사람을 초대하여 여는 잔치)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근정전에서 열린 잔치의 즐거움을 쓴 현판,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렸던 고종의 41세 생신과 즉위 30주년 축하 잔치 때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이 잔치의 즐거움을 쓴 시로 만든 현판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은주전자와 찻잔, 놋쇠신선로

은주전자와 찻잔, 18~19세기 궁중 잔치에 관한 내룡을 기록한 『진연의궤(進宴儀軌)』,『진찬의궤(進贊儀軌)』에서 보이는 은도금일월병과 은 찻잔이다. 궁중에서 왕족이 사용했던 주정(酒亭)에서 사용하였다. 놋쇠신선로, 왕실의 잔치 때 사용하던 놋쇠 재질의 신선로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무신진찬도> 중 왕실의 잔치를 그린 그림

<무신진찬도> 등 왕실의 잔치를 그린 그림을 보면 왕이나 왕비에게 음식을 올리기 위해 이러한 신선로를 사용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중의 모란 그림 병풍,

모란은 예로부터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특히 왕실에서 사용하는 모란병풍은 수직방향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로 꽃송이를 번갈아가며 정렬시킨 도상을 매 폭마다. 반복하여 그림으로써 일반적인 화조도 병풍과 달리 도식적인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모란병풍은 질서정연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로 인해 질서가 요구되는 의식.의례 등에 사용된 조선왕실의 대표적 의례용 병풍으로 가례 등의 행사에 두루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수교도첩』,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중 모란 병풍

 왕세자의 관례 의식을 그린 『수교도첩』이나 종묘제례를 기록한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등의 기록에서 모란 그림 병풍이 사용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왕후 책봉 교명(1866년),

명성왕후를 고종의 비로 책봉하면서 내린 교명이다. 왕비에게 내리는 왕의 훈유를 담고 있으며 오방색 비단을 사용하여 장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과 명성왕후의 혼례 때 사용한 항아리(1866년),

고종과 명성왕후의 혼례 때 사용한 것으로, 몸체는 ‘수(壽)’자와 ‘복(福)’자로 장식되었다. 바깥 바닥면에는 ‘대(大)’자가 쓰여 있고, 굽 둘레에는 가례 때 대전에서 사용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과 명성왕후의 혼례
고종은 왕이 된 지 3년 만에 혼례를 치렀다. 고종의 나이 15세, 왕비의 나이 16세였다. 명성왕후는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조씨가 1866년(고종3) 1월 12세에서 17세에 이르는 전국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 뒤 3개월에 걸쳐 시행된 세 번의 간택에서 최종 간택되었고, 운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았다. 가례는 육례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3월21일 고종이 운현궁으로 가서 왕비를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이 행해졌다. 『고종명성왕후 가례도감의궤』에 실린 천연색의 반차도에는 총 2,433명의 인원이 등장하는데, 이전에 1,200명 정도가 참여했던 행차에 비해 두배 정도 큰 규모였다. 또한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도 왕과 왕비의 가마를 뒤따르고 있어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고 있던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왕후 책봉 금보와 옥책(1866년),

18866년(고종3) 고종의 비로 명성왕후를 책봉하면서 내린 금보와 옥책이다. 왕비나 왕세자, 왕세자빈 책봉 시에는 책봉자의 인장인 금보와 책봉자의 공덕을 새긴 옥책, 왕의 훈유를 담은 교명을 내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혼례
왕이나 왕세자가 배필인 왕비나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혼례는 왕실의 가례 중 가장 대표적인 의식이었다. 후보들을 단계별로 심사하여 선발하는 삼간택을 통해 신부감이 결정되면, 가례를 주관하는 임시관청인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혼례에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혼례는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봉영(奉迎), 동뢰(同牢)의 여섯가지 예법인 육례에 따라 행해졌다. 납채는 신부측에 청혼을 하는 의식이고, 납징은 혼인 예물을 보내는 의식이며, 고기는 혼일 날짜를 알리는 의식이었다. 책비는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으로 이 때 책봉을 명한 문서인 교명(敎命)과 옥책(玉冊), 금보(金寶), 왕비가 입을 옷인 명복(命服)을 보냈다. 봉영은 왕비를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으로 조선 후기 이후 왕이 직접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親迎)으로 바뀌었다. 궁궐에 들어온 왕과 왕비는 함께 술을 나누어 먹는 동뢰를 행함으로써 혼례 의식을 마쳤다. <출처:고궁박물관>

반면에 외교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나 군사와 관련된 군례(軍禮)는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가 상당히 깊으며, 정치.경.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행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례(五禮)가 원래 정의되었던 시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로 국가간의 합종연횡(合從連橫)이 성행했고, 국가간의 외교와 함께 국가의 힘을 상징하는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했기때문에 군례와 빈례가 국가의 주요 의례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도 국가로서 외교사신을 접대하고, 군사력을 과시하는 의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는 혼란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안정적이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빈례와 군례가 크게 중요시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이와 관련된 행사를 기록한 의궤 또한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화살(복제)

1) 화전: 화약을 이용하여 적진을 불태우거나 혼란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화살
2) 동시: 사냥할 때 사용하였던 화살
3) 어시: 대사례 때 왕이 사용하였던 화살
4) 박두: 무과 시험과 연습 등에 사용되었던 화살
5) 주살: 연습과 사냥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실로 묶고 쏘던 화살
6) 통아: 길이가 짧은 화살인 애기살을 넣어 발사할 때 사용하던 기구 <출처:고궁박물관>

화살통,

화살을 담아 운반하는데 사용한 통이다. 폐쇄형으로 만들어서 화살이 비에 젖지 않도록 했으며,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끈을 달기도 했다. 나무나 종이 노끈으로 만든 소박한 것도 있지만, 옻칠을 하고 자개를 올리거나 상어가죽으로 감싼 화려한 것도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화살집, 시복(왼쪽), 활집(오른쪽), 

화살집, 시복(왼쪽), 화살을 넣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화살집이다. 주로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활집(오른쪽), 활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활집이다. 『진연의궤』등의 기록에서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왕명을 전달하는 화살,

신전(信箭), 임금이 교외에 거동할 때 선전관을 시켜 각 영에 군령을 전하는데 쓰던 화살이다. 살촉에 ‘령(令)’자를 새겼고, 깃 아래에는 ‘신(信)’자가 달린 작은 깃발을 달았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의 활쏘기 의식 『대사례의궤』 중 <대사례도> 부분, 1743년

예궁,

의례 때 사용하는 활, 군례 등 의례에서 의식용으로 사용하던 활이다. 조선의 활은 반대방향으로 굽혀 시위를 걸어 사용하는 활(만궁彎弓)을 타국의 활에 비하여 탄력이 강하였다. 무소뿔과 참나무, 소 힘줄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조의 활쏘기 의식
조선시대에는 활을 쏘는 것이 유교의 권장과목인 육례(六禮,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하나로 꼽혔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고, 활쏘기를 겨루는 것은 군자의 도라 여겨져 무술로써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소양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궁궐에서도 활쏘기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자의 교육과정에 활쏘기를 넣어 수련하였으며, 왕이 되어서도 궁궐 또는 근교에서 자주 활을 쏘았다. 왕이 직접 쏘지 못할 때에는 종친과 신료들을 궁중으로 불러 활을 쏘게 하고 구경하였다. 왕의 활쏘기는 명분과 예법을 세우기 위한 상하 간의 질서를 확립하는 예악으로 이용되었다. 공식적인 왕의 활쏘기는 대사례, 연사례 등이 있다. 특히 대사례는 왕이 신료들과 함께하는 최고의 활쏘기 행사였다. 조선의 국왕은 이와 같은 행사를 통해 군신간의 예와 화합을 유지하고, 군왕으로서 국가 통치의 중요한 덕목인 무예를 연마하고자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휴대용 사각 방패, 흉방패,  삼인검, 사인참사검,

휴대용 사각 방패, 흉방패, 화살을 막기 위해 사용하던 방패이다. 조선 후기의 병서인 『융원필비』에 소개된 장패와 유사하지만, 뒷면에 손잡이가 있고 길이가 짧은 것으로 보아 병사가 휴대하여 몸을 가릴 수 있는 용도로 사용했던 흉방패의 일종으로 보인다. 삼인검, 벽사용 검으로 인년, 인월, 인일, 인시 가운데 세가지 인(寅)의 조건을 갖추어 만든 것을 삼인검이라 한다. 사인참사검, 도검은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도구로 인식되어 왔는데, 특히 인년의 인월, 인일, 인시(새벽 3~5시)의 네가지 인을 갖추어 만들어진 것을 사인검이라 하였다.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전용이 아닌 의례용 검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임금의 칼, 어도(御刀), 허리에 차는 칼, 패도(佩刀)

갑옷, 두정갑(복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무장복이다. 겉면에는 정을 박고 안감에는 철편을 덧대어 전투시에 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허리의 양쪽 면을 터서 무릎까지 내려오게 하여 활동을 편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금고 깃발,

명령을 내릴 때 신호로 북이나 징을 치던 취타대를 인도하는 군기이다. 취타수를 부르거나 앉고 일어서고 걷고 서는 것을 지휘할 떄 사용하였다. 황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금고(金鼓)’ 두 자를 붙였으며 붉은색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출처:중앙박물관>

군영의 네 문과 중앙에 세운 군기,

날개 달린 호랑이를 그린 군기이다. 가장 자리는 황색으로 통일하고 바탕색을 청색.적색.백색.흑색.황색의 오방색으로 각각 2개씩 제작하여 군영의 네 문과 중앙에 세웠다. <출처:고궁박물관>

군사신호체계, 깃발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전투에서는 깃발과 북, 징 등은 중요한 명령 전달 수단이었다. 조선시대의 군기에는 지휘관을 상징하는 깃발, 각급 부대 장수를 비롯한 모든 병사의 계급과 소속을 식별하기 위한 깃발, 하급부대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깃발, 방위를 비롯한 각종 신호 깃발 등이 있었다. 총지휘관인 대장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깃발을 지니는데, 대장이 있는 곳에는 각 영 대장의 직책을 나타내는 사명기, 대장이 있는 본영임을 표시하기 위한 수자기 등이 걸렸다. 그 외 해당되는 군영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오방기 등도 함께 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장어영’ 현판(1881년),

장어영(壯禦營)에 걸렸던 편액이다. 장어영은 1881년(고종18)에 금위영.어영청.총융청을 합하여 만든 군영으로 그 이듬해(1882년)에 해체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의 군사제도
조선시대의 군사제도는 국가의 정세에 따라 변화가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임진왜란과 개항기에 외세가 개입하면서 그 체제가 크게 변화하였다. 전기에는 전국을 진관으로 나누어 오위도총부가 지휘.감독하였다. 오위는 의홍위(중위).용양위(좌위).호분위(우위).충좌위(전위).충무위(후위)를 말하는 것으로 전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중앙방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오군영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오군영은 수도 내 도성과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같은 도성의 외곽을 방위하였으며, 전국은 속오법에 의해 방위체제가 개편되어 소부대 편제인 속오군이 지방을 수비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병학지남(1787년),

조선에 맞는 군사 훈련 전술을 정리한 책이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와 『연병실기』를 참고하여 썼다. <출처:고궁박물관>

부츠의 『한국의 무기와 갑옷』, 1934년.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 회보』에 실린 글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각종 무기를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세브란스 의전의 치의학 교수였던 부츠 J.L.Boots가 기고한 논문을 단행본으로 편집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비격진천뢰(보물),

선조 대에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한 일종의 시한포탄으로 임진왜란 때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완구에 넣어 발사하면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진 후 폭발하여 그 안의 ‘마름쇠’라 불리는 작은 철편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출처:고궁박물관>

‘비격진천뢰’에 관한 기록
…. 비격진천뢰를 성 밖에서 성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 ….. 『선조수정실록』26권, 1592년

휴대용화기, 소총통(보물),

도화선에 손으로 불을 붙이는 휴대용 화기이다. 발사과정에서 탄환이 힘을 받아 멀리 나가도록 총신을 약간 구부러지게 만들었다. 또 총신을 길게 만들어 탄환이 명중할 수 있게 제작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의 발전된 형식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총구가 3개인 연발총(삼혈총, 조선후기).

길이가 짧은 3개의 총열을 한데 묶어서 연속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든 소형 화기이다. 삼안총, 호포, 삼혈총통, 삼혈조총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살상용으로 쓰였으나 후기에는 낮은 명중률과 조총의 보급으로 인해 주로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블랑기 4호, 블랑기자포(1966년),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탄약 용기로 모포 하나에 자포 5개로 구성된다. <출처:고궁박물관>

 불랑기 5호, 불랑기 5호(1874년)

불랑기, 블랑기는 중국 명나라를 통해 유입된 화포로 아라비아인들이 서양인을 파랑기Farnagi(중세의 Frank)라고 말한데서 유래한다. 모포와 자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포탄과 화약이 든 자포를 모포에 결합시켜 장전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작은포, 소포(1874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병인.신미양요를 겪은 뒤 화포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크기에 따라 소포.중포.대포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이 포는 2개의 바퀴가 달리 포받침 위에 설치하여 목표물을 자유룹게 조준하여 발사할 수 있다. “무게 285근 화약 1근의 소포를 동치 13년(1874)에 운현궁에서 따로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어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다. 군례(軍禮)
조선의 국왕은 나라의 안위를 책임지는 군사를 총지휘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 제도의 운용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이민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같은 대규모 전쟁을 겪으면서 군사제도의 약점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 통수권자로서 임금의 권위를 만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주요 군대 의식에 임금이 참석하여 사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군례이다. 군례의 종류는 군대의 규모.실정과 병마 등을 검열하는 열병의식, 무술을 조련하는 강무의식, 싸움터에 나가는 출정의식, 적을 죽이고 귀나 목을 잘라 임금에게 바치는 헌괵의식,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베나 비단에 글씨를 써서 매다는 노포의식 등 군사활동과 관계된 중요한 의식이 포함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