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 광주호 부근 개선사지 옛절터에 남아 있는 석등이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받침돌 위에 화사석, 지붕돌, 머리장식을 올려놓고 있다. 아랫받침돌과 윗받침돌은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가운데 기둥은 장고모양을 하고 있다. 화사석은 8면 모두 창을 뚫어 놓고 있다. 화사석에는 13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경문왕과 왕비, 공주가 이 석등을 발원하여 조성했다는 내용과 석등을 유지하기 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위치 등에 관한 실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그 조성연대(891년)를 알 수 있다. 석등의 규모는 높이 3.5m로 꽤 큰 편이며, 이로 볼 때 이곳에 있던 개선사가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높이 3.5m로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이 석등에는 조성연대와 실무적인 내용들이 기록된 글자가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말 (891년)에 조성되었다.
<석등 받침돌>
아랫받침돌은 8각을 하고 있으며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아래받침돌 위에는 엎어놓은 연꽃모양,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 받침돌이 장고처럼 생겼다.
불을 밝히는 등(燈)은 인류의 문명생활과 함께 다양한 형태와 재료로 만들어졌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 조명을 하는 등기(燈器)와 부처에 불빛을 올리는 공양구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조건물을 모방해서 만든 승탑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석탑이나 승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이후 많은 사찰에서 석등을 세웠는데 경주보다는 지방의 화엄십찰이나 선종계통 사찰에서 크고 웅장한 석등이 많이 남아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
화사석은 8각형을 하고 있는데 각 면마다 창을 내었다. 화사석 안쪽에 조성경위와 실무적인 내용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석등이 남아 있는 절터>
개선사지는 담양군 남면 학선리 광주호 서쪽편에 석등만이 남아 있는 절터이다. 석등이 조성된 시기 이전부터 사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어서 사찰이 있었던 흔적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이곳은 가사문학의 산실로 물이 풍부하고 경치가 좋아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정자와 정원을 조성하여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던 증암천 주변에 위치해 있다. 댐 건설로 농경지가 수몰되어 외딴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농사에 적합한 농경지가 많고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평지사찰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위에서 본 모습>
개선사지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었기때문에 석등 외 절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농경지로 바뀐 개선사 절터>
<개선사 절터 인근에 위치한 광주댐>
개선사 절터는 지금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과 합류하는 증암천을 막은 광주호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고립된 지역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농경지와 마을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평지사찰이라 할 수 있다. 광주댐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영산강과 합류하는 증암천을 막았다. 주변에는 소쇄원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선비들이 터를 잡고 풍류를 즐겼던 여러 정자들이 있으며, 화순에서 담양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 이기도 하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보물,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 뿐 아니라 부처님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부가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높이 3.5m로 8각의 화사석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창을 뚫었으며 각 창의 양편에 해서로 136자의 명문을 적어 놓았다. 1행에서 6행까지는 신라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다. 명문에 쓰인 용기 3년은 891년(진성여왕 3)에 해당되므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등의 규모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3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 위키백과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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