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동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남계서원(사적)이다. 조선중기 학자이자 관리였던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이 서원은 고려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모신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졌다. 명종 때(155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초기에 세워진 영주 소수서원이나 안동 도산서원과는 달리 성균관이나 향교처럼 낮은 곳에 강학공간을 두고 높은 곳에 제향공간을 두는 ‘상묘하학(上廟下學)’ 또는 ‘전학후묘(前學候廟)’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구현했다. 문루, 강당, 동.서재, 경판고(장판각), 내삼문, 사당, 전사청, 고직사 등 서원이 갖추어야 할 건물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건물 배치 또한 후대에 세워진 여러 서원들의 모범이 되었다.
<함양 남계서원(사적)>
현존하는 조선시대 서원 중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로 오래된 서원이다. 조선중기 성종대에 활동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정여창을 모신 서원이다.
<남계서원 모형(중앙박물관 전시)>
사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이 불규칙하게 확장된 소수서원과는 달리 공자를 모신 문묘의 건물배치를 서원에 적용했다. 높은 곳에 사당을, 낮은 곳에 강학공간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남계서원 입구>
<서원 앞을 지나는 큰 길>
함양을 지나는 남강변 나즈막한 동산에 자리잡고 있다. 경치가 빼어난 큰 강이나 하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입지조건에서도 후대에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누각인 풍영루>
서원에서 주변경치를 감상하면서 잠시 쉬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화강석을 다듬은 석재 기둥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풍영루 2층 마루에 걸려 있는 글자가 적힌 현판>
<안쪽에서 본 모습>
풍영루(諷詠樓)
풍영루는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 누각으로, 창건 당시 ‘준도문’이라고 하는 출입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집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논어의 내용 중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는 증점(曾點)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 “기수”와 “무어”는 춘추시대의 전설 속에 나오는 곳이다. 출입은 사당의 내삼문과 함께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가는 형태로 기문은 정여창 선생의 후손인 조선 말기 문장가 오담 정환필이 지었다. <출처:문화재청>
<강학공간에 세워진 묘정비>
서원 설립 200년 후에 세워졌다.
묘정비(廟庭碑)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가 지었다. <출처:문화재청>
<강학공간 입구 작은 연못>
남계서원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현 소수서원)에 뒤이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백운동서원이 건립되고 9년 뒤인 1552년에 개암 강익과 함양 유림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우선 향내의 유생들이 쌀과 곡식을 부조하면서 건립을 위한 여론을 환기하였고, 동시에 함양군수 서구연이 강당 건립을 위한 물자와 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강당을 조성하던 중 서군수가 부친상을 당하여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559년 부임한 군수 윤확의 지원으로 급진전하여 공사를 재개한지 7년 만인 1559년에 완성하였다. 1561년 모든 시설들을 갖추고 일두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39세의 나이였던 강익이 초대원장이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풍영루에서 보이는 강학공간>
앞면 4칸 규모의 강당 건물을 중심으로 그 앞에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성균관이나 향교 강학공간에서 볼 수 있는 건물 배치이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나 안동 도산서원에서는 이런 형태의 건물배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남계서원에서 처음으로 이런 건물 배치를 사용한 이후 후대 서원들은 대부분 이런 건물배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당>
남계서원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강당이다. 강당은 유생들이 모여 한문을 논의하거나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정치적인 의견을 수렴하는 공간이다.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양쪽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강당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균관이나 향교 강당 건물인 명륜당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강당 대청마루>
‘명성당(明誠堂)’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2칸, 옆면 2칸으로 다른 서원에 비해서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의 표준에 가까운 규모이다.
<오른쪽 온돌방>
‘거경재(居敬齋)’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왼쪽 온돌방>
‘집의재(執義齋)’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옆에서 본 모습>
강당(講堂)
강당은 경(經)관 논(論)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明誠堂)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라는 뜻이다.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이라하며 ‘경(經)’에 거(居)를 해서 이(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고, 동쪽방은 ‘집의(執義)’라고 하며 ‘호연지기는 도(道)와 짝이 되는 의(義)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출처:문화재청>
<강당에서 내려다 본 풍영루와 강당 앞 마당>
다른 서원에 비해서 마당을 넓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기숙사인 동재>
‘양정재(養正齋)’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경사진 지형에 건물을 지었는데, 다른 서원이나 향교의 동.서재와는 달리 온돌방 1칸에 작은 누마루를 두고 있다.
동재(東齋)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재’라고 한다. 동재는 ‘양정재(養正齋)’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애련헌(愛蓮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누 이름을 애련헌과 영재헌이라고 지었다. <출처:문화재청>
<서재>
서재도 비슷한 형태의 건물로 ‘보인재(輔仁齋)’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서재(西齋)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라고 한다. 서재는 ‘보인재(輔仁齋)’라고도 하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서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인을 돕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영매헌(泳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 만하다’라는 뜻이다. <출처:문화재청>
<경판고>
서원에서 소장한 장서나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경판고. 벽면은 나무 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환기가 잘 되도록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있다.
경판고(經板庫)
경판고는 ‘장판각’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육한 “어정오경(御定五經)’ 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의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관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체는 나무로 구성한 판벽으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가운데 판벽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제향영역>
남계서원은 ‘사당은 높은 곳에, 강당은 낮은 곳에 위치한다.’는 ‘상묘하학(上廟下學)’의 공간배치가 적용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전묘후학(前廟後學)’의 공간배치를 한 성균관과 다른 공간배치를 보인다. 향교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던 공간배치로 남계서원에서 처음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향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당과 전사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한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뒷쪽에 자리잡고, 강학공간에 속한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원 건축 배치 형식이다. 사당은 실제적으로 서원 향사를 거행하는 곳으로, 이곳에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이곳은 어느 공간보다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어서 단정한 복장을 갖추고 성현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곳이다. 사당 오른쪽 담장 밖에 별사가 있었는데, 서원 건립 후 뇌계 유호인 선생과 송탄 정홍서 선생을 모셨으나 서원 철폐령 때 헐었다. <출처:문화재청>
<강당 건물 왼쪽편에 있는 작은 단>
서원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보인다.
<사당 삼문과 계단>
<삼문에서 보이는 강학공간>
서원 앞으로 남강이 흐른다.
<서원 오른편>
아래쪽에는 원래 서원을 관리하는 살림집인 고직사가 있었는데 최근에 뒷편으로 옮긴것으로 보인다.
<사당 앞 왼편>
정여창(1450~1504년)은 조선중기 성종대에 활동한 학자이자 관리이다. 조선중기 유학을 크게 중흥시키고 사림세력을 이끌었던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때 여러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기자 않았고 연산군 때 안음현감을 지냈다.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되었다고 한다. 중종 때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 등 여러 곳에 그를 모시고 있지만, 이 곳 남계서원이 중심이 된다.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사당>
앞면 3칸 규모의 사당이다. 정여창과 정온, 강익을 모시고 있다. 사당은 판문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띠창살을 사용하고 있다.
<사당 앞에 놓여 있는 석조물>
제사를 올릴 때 제관이 손을 씻은 대야를 올려 놓는 관세위(盥洗位)인 것으로 보인다.
<정료대>
사당에 제사를 올릴 때 조명을 위해 불을 피우는 정료대(庭燎臺). 불을 피우면서 생긴 검은재들이 남아 있다.
사당(祠堂)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한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숙종1)에 동계 정온(鄭蘊)선생을, 동쪽은 1689년(숙종15)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강익(姜翼)선생을 모셨다. 강익선생은 정온선생의 외삼촌이다. <출처:문화재청>
<전사청>
사당 앞 마당에 있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이다. 앞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전사청(典祀廳)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전사청은 제향영역 내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제향영역 밖 독립된 영역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전사청이 건립되지 않은 사당은 고직사에서 제향을 준비하거나 외부에서 준비하기도 한다. <출처:문화재청>함양 남계서원, 사적,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 강익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 서원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79년) 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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