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프라하] 유럽 중앙의 요새, 천연의 수도 체코 프라하

2014년 겨울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프라하-유럽 중앙의 요새, 천연의 수도 체코 프라하”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서울역사박물관과 프라하시립박물관이 협력하여 준비한 특별전은 두 도시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유서깊은 성곽도시라는 관점에서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 전시된 유물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중세 동유럽을 대표하는 큰 도시인 프라하의 오랜 역사와 발전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프라하(Praha)는 체코의 수도로 인구는 약 215만명이다. 체코 중심부에 위치한 브라하는 서울의 한강처럼 블타바강이 도시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프라하에는 9세기 말 프라하성이 처음 세워졌으며 12세기에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프라하 도심에는 11~18세기에 건축된 다양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으며, 많은 건축물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전경.

프라하는 도심을 관통하는 블타바강 양쪽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도심은 오랜 세월 확장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으며, 도심을 둘러싼 성곽 또한 상황에 따라서 신축되기도 하고, 철거되기도 하면서 확장되었다.

유럽 도시의 형성과 요새화의 일반적 개관
중세 초기에 성이나 요새 주변의 지역 또는 얕은 여울 구간 주변으로 상공(商工) 촌락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상인과 장인 및 정치적 권력행사에 필요한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 몇몇 도읍지는 11~13세기에 중세 절정기의 도시로 거듭났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황제의 도읍지인 프라하를 들 수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서남쪽에서의 프라하 전경, 필립 완 덴 보쉬(Philip van den Bosche)에 의거 요하네스 웨흐테르(Johanes Wechter)가 그림, 동판인쇄, 1606년

흐라드차니 문장(Hradcany Coat of Arms), 소지구 문장(Lesser Town Coat of Arm), 신시가 문장(New Town Coat of Arms), 구시가 문장(Old Town Coat of Arms)

공간적 위치와 성곽 형태상 프라하와 서울의 비교
도시 설계의 샹상은 유럽과 동양, 즉 중국 문화권에서도 비슷하게 인식되었다.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모양에 규칙적인 도로망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도시가 고르지 못한 지형 위에 설립된 경우가 많아 이상적인 구획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도읍지의 형태는 지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프라하와 서울의 경우도 비슷하다. 다만 기본적인 차이는 축성방법이나 사용된 건축 재료보다 도읍지와 강 사이의 관계, 즉 공간적인 배치와 방향에 접근하는 데에 있었다. 전통시대 한국의 건축가들은 도시의 위치와 배치를 풍수지리의 원리에 기초한 반면 유럽 건축가들은 입지의 지형과 지세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수도 서울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한강 변에 만들어졌지만 강가 한 변에 치운친데 반해 프라하는 대부분의 유럽 수도와 마찬가지로 블타바(Vltava)강 양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양 도시는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큰 강 부근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그들의 성곽은 가파른 언덕으로 올랐다가 다시 강가 저지대로 내려간다. 옛 서울과 가장 유사한 구역은 강의 왼쪽 기슭에 위치한 프라하성, 소지구(Mala Strana)와 흐라드챠니(Hradcany)이다. 유사한 점은 강가의 지형 외에 서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축을 이루어 가장 큰 구역인 소지구를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왕도 프라하 및 주변지역의 지도, 요셉 노보트니(Josef Movotny), 채색된 그림, 1833년.

한강 북쪽에 청계천 주위로 도시가 형성된 서울과는 달리 큰 강 양쪽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다. 정치, 경제, 행정,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도심이 분산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도성도, 19세기 후반.

프라하성 – 체코왕국의 중심 및 역대 도읍지
프라하성은 예전부터 체코 군주, 즉 공작, 왕과 황제, 그리고 최근 대통령 등의 거주지 및 관저로 이용됐다. 그런 면에서 프라하성은 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한 나라의 권력 중심지로서 계속 기능해온 곳 중의 하나이다. 체코 통치자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거주하는 기간을 제외하고 프라하성은 현재까지, 즉 거의 1200년 동안 국가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요새 기능은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당시의 군사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상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성은 체코 국가의 정신적, 행정적인 구심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까지 왕관을 비롯한 왕권의 상징물이 잘 보관되어 있고, 성내 성 비투스 대성당 지하에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프라하성은 9세기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대대적 공사과정을 거쳤다. 그 방어 시스템은 토성 위에 통나무 목책이 세워진 초기 성채부터 중세 절정기의 석성, 탑, 참호와 성문 등의 구조물을 거쳐 화기 사용과 관련된 방어시설까지 유럽 요새 구축 기술의 역사를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프라하뿐만 아니라 전 유럽 차원의 방어 시설 축조술 면에서 15세기 말에 이루어진 프라하성 둘레 일부의 보강 공사가 가장 중요했다. 공사는 비록 소규모였으나 시대에 앞서 있어 화약 무기의 위력을 전적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추성술의 기초를 세웠다. 베네디크트 리드(Benedikt Ried, 1453~1536)의 프라하성 설계는 당시 체코 왕국이 축성술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북쪽 성곽의 보강 사업으로 건축가는 몇 개의 튼튼한 포대를 설계했는데 대포를 설치한 이후 침입자가 거의 넘지 못할 정도의 방어벽이 되었다. 언덕 등성이가 강변으로 내려가는 동쪽에서는 그 당시 매우 현대적 시설인 외보(外堡, barbican)를 세웠다. 이 사업 이후로는 16세기에 아주 소수의 방어 시설문만이 구축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페트르진스키 전망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프라하 전경, 2009년, 얀 블라베츠

제일 오래된 프라하 및 프라하성 그림인 쉬헤델의 ‘Liber chroniarum’에 나온 그림이다. 채색 목판 인쇄, 1493년

동쪽에서 바라 보이는 프라하성, 왼쪽은 소지구, 뒤에는 페트리진 언덕이 보인다. 산드만(F.X. Sandmann) 작, 채색 평판 인쇄, 1840년

리드에 의한 방어시설 서쪽 및 1496년에 축조된 달리보르카 포탑(砲塔), 뒤에는 ‘흑탑’이라는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탑이 우뚝 서 있다. 사진, 19세기 말.

15세기 말에 세워진 리드에 의한 방어시설 중 가장 튼튼한 부분의 모습, 화약포탑, 사진, 19세기말.

프라하 구시가 문장으로 장식된 화승총 사수용 방패(복제품), 가죽,천,린덴나무,아교, 15세기 전반.

구시가 성곽 부근에서 발견된 구형(球形) 포탄

화약통, 철, 호두나무, 대마(삼), 17세기

화승총, 강철, 오리나무, 17세기 전반 이전

프라하-유럽 중앙의 요새, 천연의 수도 체코 프라하
프라하 성곽의 축성 역사는 10세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왕도(王都)의 규모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성곽의 둘레도 길어졌다. 신축되기도 하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중세 때 건설된 도시 전체의 성곽 기능은 점차 체코 역대 왕궁인 비셰흐라드(Vysehrad)성이 시타델라 성채로 개조되었다. 결국에는 프라하 도시권 지역의 요새 기능을 포기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모든 요새화 노력의 결말을 지었다. 19세기 말에 성곽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새로 확보된 부지는 도시 구획화 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