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탑파는 오늘날 원각사지구층석탑이 있는 종로 탑골공원 주변에서 살았던 정조대 북학파 실학자를을 일컫는다. 대체로 서울.경기 지역 출신으로 당시 주류였던 노론 집안에서 성장했으나 청나라를 인정하고 발달된 문화를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보였다.
백탑파에는 노론 명문가 출신인 홍대용, 박지원을 비롯하여 서얼 출신이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학문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인물들로 실제로 당대에도 명망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홍대용은 수학과 천문학에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였으며, 서얼출신이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은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다. 또한 백동수는 정조의 지시로 우리나라 전통무예를 정리하여 오늘날 태권도의 기본이 된『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탑골의 역사와 백탑파 인물.
조선의 가장 번화한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운종가를 따라 종묘가 있는 철물교까지 내려오면 탑골(탑이 있는 동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가사십층석탑을 기준으로 그 동쪽을 탑골, 서쪽을 대사동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원각사탑은 멀리서 보면 흰빛이었기에 백탑이라 불렸습니다. 이곳에 새로운 학문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젋은 지식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는 서얼 출신이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 백동수 등과 세상을 함께 논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내는 벗으로 만났습니다. 이들은 편벽된 세상을 벗어나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조선을 꿈꾸며, 서로를 이해하는 지기(知己)가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장맛비에 버섯이 돋고, 썩은 풀은 반딧불이로 변한다. -연암 박지원-
중화에서 벗어나라! 홍대용
홍대용은 노론 명망가 출신으로, 상수학(象數學)의 학풍이 강했던 석실서원에 들어가 23년간 학문을 닦으며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는 청이나 서양의 발달된 문물의 근원이 관측기구와 수학적 접근방법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서양과학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의산문답』은 수많은 자연현상에 대해 서술한 그의 대표작이며, 여러 천문관측기구를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낮과 밤이 생기는 이유는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홍대용은 현실세계의 중심 역시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상대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조선이 가진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놀고먹는 선비들이 생산활동에 종사해야 하며 기술을 혁신하고 문벌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발달된 근대 과학기술의 가치와 중요성을 연구했던 학자이자, 모순된 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했던 지식인이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이 땅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데는 누구나 괴이하게 여기면서 해, 달, 별이 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하늘이 상하가 없는 것은 분명한데도 세상 사람들은 일상 소견에 젖어 있어 그 까닭을 찾아보지 않는다. – 홍대용, 「담헌서」의산문답 –
환영지(寰瀛誌), 19세기, 위백규.
천문과 지리에 능통했던 위백규가 지은 백과사전으로, 우주도와 조선팔도 및 중국과 일본의 지도를 실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經星), 조선후기.
세종대 이순지가 엮은 천문서인 『천문류초(天文類抄)』중 일부만 간추려 필사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천지도(天地圖), 19세기.
하늘이 별자리와 땅의 모습을 합쳐 그렸으며, 하늘은 둥글고 따을 네모나다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세계관을 표현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담헌사(湛軒書), 1939년, 홍대용
홍대용의 학문과 사상이 담겨 있는 문집이다. 『계방일기(桂坊日記)』.『의산문답(醫山問答)』.『주해수용(籌解需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자명종(自鳴鐘), 1689년 경,
여행용으로 제작되어 휴대가 편리하고, 항해 때도 사용할 수 있도록 태엽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홍대용은 자명종의 원리를 이용하여 더욱 정밀한 혼천의를 개발할 수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망원경, 1593년
천체에 관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망원경을 이용하여 천문학 연구를 심화시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 1862년, 이준양
『연경실측신서(燕京實測新書)』『성도보천가(星圖步天歌)』를 참고하여 짓고 관상감에서 간행한 천문서이다. <춸처: 서울역사박물관<
천세력(千歲曆), 19세기
조선의 천세력은 청나라의 것을 참고하여 1782년에 처음 제작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시헌사(時憲書), 1844년
서양 역법을 기초로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만들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을 직시하다, 박제가
박제가는 유년기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서얼’이란 신분은 늘 그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사회의 부조리에 일찍이 눈떴으며, 백탑파와 교류하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모색했습니다. 특히 홍대용과 박지원 등은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할 수 있는 더 없이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연행은 박제가가 품은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드넓은 통로가 되었습니다. 4차례 연행을 다녀온 그는 북학파 중 외국문물 수용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일부 사람들에게 ‘당괴(唐傀)’라 조롱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행에서 경험한 실용적인 학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북학의』를 통해 그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은 상업 활동 없이는 개선되기 힘들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내외 상업과 무역의 이점, 농업기술 개량, 양반의 상공업 종사 등 강력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비록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않았지만, 18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오늘날 백성의 삶은 날로 곤궁해지고 쓸 재물은 나날이 고갈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이 팔짱만 끼고서 구제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과거의 안습에 안주하여 편안히 누리면서 모른체 해야 하겠는가? – 박제가 『북학의』 –
북학의(北學議), 1782년, 박제가
박제가가 1778년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록한 책이다. 청나라 선진문명의 우수성과 함께 당시 현실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해시계(日晷), 조선후기
바닥 중심에 빗물을 배출하는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외 설치용임을 알 수 있는 대형 석제 해시계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대전통편(大典通編), 1785년
정조대 서얼 허통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이전(吏典)」에 서얼의 한품서용(限品敍用)이 완화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규사(葵史), 1858년, 달서정사
역대 서얼에 관계되는 사실을 왕조 순으로 모아서 펴낸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정유각집(貞蕤閣集), 조선후기, 박제가
다양한 필사본으로만 전하는 박제가의 시문집 중 하나로 가장 일반적인 서명이 「정유각집」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제가 시집, 조선후기, 박제가
정유각삼집(貞蕤閣三集), 조선후기, 박제가
박제가의 각종 시를 모은 시집이다. 5권5책 중 3책으로, 양식이나 필체 등으로 보아 박제가의 친필로 추정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호저집(縞紵集), 1809년, 박장암
박제가가 중국 지식인들고 교유한 시.편지를 모아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암이 2책으로 엮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책에서 찾은 길, 이덕무
서얼이었던 이덕무는 뛰어난 학식을 가졌음에도 한동안 관직에 나아 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늘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글을 읽고 사는 것이 소원인지라,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책보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될 기회가 왔습니다. 39세의 늦은 나이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출판하는 모든 책을 교정하고 검열하는 일을 맡게 된 것입다. 그는 당시 청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적 방법론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에 다른 북학파 실학자와 달리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연구를 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자주적 입장에서 과거의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살피고, 실증적이며 객관적인 눈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이에 역사, 지리, 풍속, 신변잡기 등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을 저술로 남김으로써 18세기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정유고(雅亭遺稿), 1796년, 이덕무
이덕무의 문학적 기량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그가 죽은 뒤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출처: 아정유고>
사소절(士小節), 1775년, 이덕무
일상생활에서 선비.부녀자.아동의 예절과 수신에 관한 교훈을 예를 들어가며 당시 풍속에 맞게 설명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1795년, 이덕무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가 부친의 시문과 저술을 모은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객건연집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은 영조 52년(1776) 부사 서호수를 수행하며 연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때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네사람의 시집(四家詩集)을 가져가 청의 문인이었던 반정균과 이조원에게 책 제목과 서문을 받아 왔습니다. 제목은 『한객건연집』즉, ‘조선의 나그네가 보따리에 싸온 시집’이란 뜻입니다. 유금이 청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벗들은 그가 마침내 한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금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늦도록 이들은 책을 서로 돌려보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이덕무는 네사람 중에서 노련한 작가라 추대 할만하다. 이조원
유득공은 격률이 유독 높아 이따금 고래가 푸른 바다엣 뛰노는 장관을 보여준다. 반정균
박제가는 불우하여 쓸쓸한 기운이 지나친 듯 싶지만 미치지 못함이 없다. 이조원
이서구는 나이가 이제 고작 20여 세라니 참으로 천재다. 반정균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조선후기,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한객건연집.
조선후기 북학파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4명의 시를 뽑아 엮은 시집으로, 『사가시집(四家詩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1776년 유금이 연행 중 만난 청나라 문인 이조원과 반정균에게 이 시집의 평을 받고 돌아와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서 더욱 유명해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강산초집(薑山初集), 1789년, 이서구
이서구의 20대 작품만을 모아 엮은 시집이다. 수록된 작품 대부분에 산수에 대한 흥취와 고독이 담겨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일지록약(日知錄略), 18세기, 이덕무
명나라 유학자이자 고증학의 대가인 고염무의 저서 『일지록』을 이덕무가 친필로 쓴 약본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우리 역사의 재발견, 유득공
유득공은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서얼이었으며, 숙부인 유금과 함께 백탑파와 교류하며 시와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우리 역사의 활동무대를 사실에 입각해 밝히고, 역사지를 실증적으로 서술했습니다. 또한 발해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이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고대사를 ‘남북국시대’로 새로이 인식한 것이며 자주적인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역사의식을 논하기 시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가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 자신만의 확고한 지식을 구축하고 문장가로, 시인으로, 역사가로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든든한 벗들과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정조가 있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우리나라에 관련된 수천년 간의 사실을 경전에서 총서와 패설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산경되는 것들을 거의 빠짐없이 찾아내어 베껴 기록하였다. 거의 잠자고 밥먹기도 잊은 채 5~6년 공력을 들여… 이를 『해동역사』라 이름 하였다. 유득공 『해동역사』
발해고(渤海考, 오른쪽, 1784년, 유득공).
발해의 역사.지리.인물 등을 정리한 책이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발해의 역사서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사史’가 아닌 ‘고考’로 제목을 붙였다.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왼쪽, 1778년, 유득공). 단군의 왕검성부터 고려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곳의 왕도를 읊은 시집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춘추(春秋), 1797년 이후
유득공의 소장본이었으며 1책 첫 면에 ‘규정검서(奎章檢書), 신득공인(臣得恭印)’이 날인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기록, 경도잡기
유득공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 흐름을 같이하는 세시풍속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경도잡지』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주로 사대부의 생활문화에 국한되어 있는 내용이나, 그간 지식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우리 민족의 풍속에 대한 연구가 이 시기에 들어와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합니다. 그는 18세기의 다양한 문화를 기술하고 있으며, 많은 문헌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연원과 유래까지 밝히려 했습니다. 그의 아들 유본예 역시 서울의 주요 사적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을 편찬하여, 도성을 중심으로 산재한 성곽.궁궐.관청.산천 등의 모습과 연혁을 자세하게 기술함으로써 부친의 대를 이어 19세기 한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술한 또 하나의 기록물을 탄생시켰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도잡지(京都雜志), 조선후기, 유득공
정조대에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다. 18세기 한양의 풍속과 세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1615년, 한백겸
역사와 영토에 대한 지식을 종합하여 저술된 최초의 사찬 역사지리서이다. 조선 후기 실학적 지리학의 맥을 형성.전개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수차도설(水車圖說, 조선후기, 왼쪽).
수차 중 용미차(龍尾車)에 대하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금은 용미차를 개발하여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 1756년, 안정복, 오른쪽). 고조선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20여년간 정리한 책이다. 신화.설화.지리까지 함께 실은 역사지리서이며, 도설을 통해 우리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게 하였다.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 박지원
박지원은 당대 집권세력인 노론 출신의 양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출세 길을 버리고 사회가 직면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백탑파는 든든한 벗이자 지원자였습니다. 그는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경제와 사회전반을 한단계 이끌어 올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그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흔이 넘어 떠난 연행에서 탄생한 『열하일기』에서는 문벌제도의 비생산성과 상공업진흥, 농업생산력의 향상 등을 위한 이용후생에 관해 구체적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또한 『양반적』과 『호질』에서는 기득권층의 관념적 명분론을 비판했으며, 『허생전』에서는 북벌의 허구성과 시장경제의 발달, 해외무역 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문학을 통해 당대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단어적으로 조명했으며, 전통적 사대부 문학관의 가치관과 주제를 거부하고 그만이 가진 ‘개성’으로 18세기 문학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항상 서로 만나면 며칠씩 묵으면서 위로는 고금의 치탄과 흥망의 까닭과 옛날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고 시골에 숨어 있는 대절과 제도의 연혁, 농공의 이익과 폐단, 산업경제, 산천과 국방, 천문, 관상, 음악, 초목과 새.짐승, 육서와 산수 등을 관용하고 포괄하여 기록하시었다. 박종채, 「과정록」
박지원 초상, 18세기 박주수. 박지원의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을 대표하는 문호
박지원은 기존과는 달리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행을 다녀와 지은 『열하일기』에선 그의 독창적인 글솜씨가 여지없이 드러났고, 이는 당시 한양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정조는 그의 글이 패사소품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여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외에 다양한 한문소설을 지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호질』, 『허생전』, 『마장전』, 『예덕선생전』,『양반전』 등이 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였고, 현실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적시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글에 열광했고, 그는 철저한 비판정신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감각, 명확한 논리로 편견과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당신은 평소에 그렇게도 글을 잘 읽지만 현관(縣官)에게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구려. 쯧쯧 양반이라니, 한 푼짜리도 못되는 그놈의 양반. 박종채 『과정록』
연암집(燕巖集), 1900년, 박지원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시문집이다. 문장가로서의 풍모와 북학파 실학자로서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저술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연암속집(燕巖續集), 1901년, 김택영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서(序).기(記) 등 산문만을 추려서 엮은 책이다. 조선말 학자 김택영이 박지원의 후손에게서 필사 원고를 넘겨 받아 발간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영대정집(映帶亭集), 18세기 박지원
박지원의 필사본 문집으로,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지 않은 『영대정집서(映帶亭集序)』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지원 휘호 ‘저실기측(咀實其測)’, 18세기, 박지원
‘열매를 씹어 깊이 음이하여 헤아려라’라는 말로, 학문과 문장을 깊이 연구하고 체득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박지원 휘호 ‘함영지출(含英之出)’, 18세기, 박지원
‘입에 머금었던 꽃술을 뱉어내라’라는 말로, 가슴에 간직한 발르 문장으로 풀어 표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열하일기초(熱河日記抄), 1834년, 박지원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의 초록본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열하일기』의 내용을 간추려 기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국화도(菊花圖), 18세기, 박지운.
남산 아래의 벗
남산 아래에는 몰락한 양반과 가난한 선비가 주로 모여 살았습니다. 홍대용은 이곳 남산 기슭 영희전 북쪽에 살았으니, 박지원이 살던 전의감동과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박제가는 남산 아래 묵동과 필동 사이를 왕래하며 거주하다가, 백탑에서 조금 떨어진 낙산 아래 어의동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백동수 역시 훈도방 근처에 머물며 폭넓은 인관관계로 백탑파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면서 서로 왕래하고 모임을 가지며 한양의 중심에 모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몰락한 양반이나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던 남산골을 그린 그림.
수표교
도회인물 대보름밤 답교놀이 하는곳은
운종가의 최고다리 수표교가 있을뿐
달높이뜨고 사람들 흩어지길 기다렸다가
이곳에 홀로와서 기분좋게 거닌다네. – 이서구 –
청계천을 건너는 대표적인 다리인 수표교를 그린 그림.
죽리탄금(竹裡彈琴), 18세기, 김홍도
밝은 달밤에 대나무밭에서 한 선비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고, 그 뒤에서 동자가 차를 끓이는 모습이다.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산수인물화첩》<탐금관월>, 16~17세기, 이경윤
《산수인물화첩》중 한폭으로, 거문고를 타며 달을 감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홍대용, 거문고의 대가
홍대용은 다양한 재주를 지녔던 인물로, 당대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속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을 때 거문고만큼 좋은 악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소양 자체가 뛰어나, 연행으로 천주당에 갔을 때 처음 본 파이프오르간의 건반을 몇번 눌러보고는 바로 거문고 악보에 맞춰 곡을 그럴싸하게 연주해 내 서양 신부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악기인 양금이 있었는데, 이것을 개조하고 연주법을 개발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세상만사가 원래 하늘의 정함을 꾀할 수 없나니,
내 집에 잇는 거문고 묘한 소리 터질 땐 마음이 편안하노라.
– 홍대용, 『담헌서』「시時친구의 운을 따서 이국옹에게 부침」-
거문고, 1918년
선비들의 필수품 중 하나로 이들은 거문고 연주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였다. 홍대용은 16세부터 거문고를 배워 당대에 알아주는 거문고 명인이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양금신보(梁琴新譜), 1610년, 양덕수
양덕수가 거문고 도(道)의 단절을 막기 위해 임진왜란 전후의 거문고 곡을 모아서 편찬한 악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윤회매(홍매),
이덕무는 밀납으로 빚어 만든 매화인 윤회매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백탑파와 함께 감상하기도 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해금(奚琴), 조선
고려시대에 들어와 궁중 및 민속음악에 폭넓게 연주되었다. 유금은 거문고와 해금을 연주하는 실력이 뛰어났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양금(洋琴), 조선
마테오 리치에 의해 1580년 경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홍대용은 연행을 다녀오면서 양금을 구입해 와 스스로 연주방법을 터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백동수, 무(武)로써 문(文)을 이루다.
알려진 무가(武家)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무예와 검술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습니다. 이덕무와는 처남 매부 사이였으며,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동무였습니다. 호탕한 성격으로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러한 인맥으로 백탑파의 구심점이기도 했습니다. 서얼이었던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다가,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에 초관으로 근무하며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동개(筒箇), 조선
화살집과 활 넣는 통을 한 줄로 묶어, 어깨에 맬 수 있도록 줄로 연결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비지(武備志), 조선후기, 모원의
240권의 병법서로, 백동수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 때 참고했던 병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단호흉배(短狐胸背), 무신관 중 당하관의 공복(公服)에 부착했던 표장이다.
호수(虎鬚, 조선).
군복차림을 할 때 깃에 꽃았던 장식으로, 4개가 한 조를 이룬다. 호랑이 수염으로 만들었다 해서 ‘호수’라 불렀다. 전립(戰笠, 19세기 말), 무관의 관모로, 벙거지 혹은 짐승의 털로 만들어 모립(毛笠)이라고도 한다. 장식물은 계급에 따라 달았다. 목화(木靴, 조선후기).관복 차림에 신던 신으로, 바닥은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영숙(백동수)은 진작부터 당시에 이름이 알려져,
사귐을 맺은 벗이 온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
목사와 관찰사에서, 그다음은 현달한 사람과 이름난 선비들이
또한 이따금 왕래하였다…
대저 말달리고 활쏘며 칼로 치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와 인장, 바둑과 장기, 거문고와 의술, 지라, 방기(方技)의 무리로부터
저잣거리와 교두꾼과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등의
천한 사내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길에서서 만나 정을 나누지 않은 날이 없었다.
– 박제가, 「정유각집」-
환도(環刀), 조선
문.무관이 군복에 찼으며, 칼집에 고리를 달아 끈을 드리워 찼기 때문에 환도라 불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등채(藤策), 조선
무관이 융복이나 구군복 차림 때 손에 드는 지휘봉으로, 말채찍으로도 쓰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화살통과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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