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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 백탑파이야기] 연행(燕行),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

연행(燕行)은 조선후기 청나라 보낸 사신단의 일정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명과 청은 공식적으로 해외무역을 금지하고 사신단을 통한 조공무역만을 허용했기때문에 연행은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와 함께 조선이 세계와 접할 수 있었던 교류의 창구였다. 연행은 청나라가 심양을 도읍으로 삼을때부터 시작하여 동지사(冬至使)라 하여 연1회씩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북경까지 오가는데는 두달이 넘게 걸렸고 북경에서의 체류기간을 포함하면 반년 정도가 소요되는 험한 여정이었다.

연행에는 대표격인 정사(正使)나 부사(副使) 등 외교사절에 해당하는 공식 인원은 30명이 원칙이었으며 역관을 비롯하여 수행원을 합치면 200~300여명이 참여하였다. 연행에는 공식인원들을 사적으로 수행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들은 북경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백탑파의 대표적 인물들인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등이 북경에 갔을 때에도 이러한 자제군관이었다. 이들은 당시 청나라 북경을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었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대표적인 기록으로 조선시대 3대 연행록으로 꼽는 <노가재연행록>, <을병연행록>, <열하일기> 등이 있다.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
17세기 이후 조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는 청이었습니다. 청은 조선이 군신관계의 틀 안에서 청날 중심의 천하질서에 편입되기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병자호란 등으로 인한 청에 대한 반감은 북벌로 이어졌고 이런 기조는 효종대부터 근 15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청나라의 정치는 안정되고 문화도 전성기에 이릅니다. 조선에서는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하는 청의 발전된 문물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가지는 지식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문화융성과 국력신장을 위해 ‘북학’이란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백탑파의 지식인들도 새로운 세상을 향해 귀 기울였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연행은 그들이 가졌던 사상과 지식을 확장시켜주는 거대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1830년

조선과 청나라의 접경지역인 서북지방.만주이대.연해주(양쪽 경계 1만리 가량)를 그린 대표적인 관방지도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연행의 기록
연행록은 같은 길을 오가면서 남긴 기록몰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중국 사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또한 당시 번화한 청나라의 모습과 이를 지켜본 조선 사신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500여년에 달하는 연행의 역사중에서 18세기는 단연 돋보입니다. 대략 400여 종으로 추산되는 연행록 가운데 18세기의 연행록은 112종에 달하며, 다녀온 사람들이 시선과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기술되었습니다. 단순한 견문록에 그치는 연행록도 있는 반면,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문물을 조선 사회의 개혁안으로 발전시키는 기록물도 상당합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저들이 비록 더러운 오랑캐이나 중국에 웅거하여 백여년 태평을 누리고 있으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번 볼만하지 아니하리오. – 홍대용, 『을병연행록』 –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조선,

조선 사행단이 명나라에 다녀와 공무 및 그 여정을 기록한 그림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무신록(戊申錄), 18세기, 심육.

1728년 심육이 부친 심수현을 따라 연경에 다녀올 때 지은 시가 기록된 필사본 초고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연행연구첩(燕行聯句帖), 1737년, 류엄.

1737년 서장관 이철보의 부사로 연경에 가면서 읊은 시를 기록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대청일통도(大淸一統圖), 19세기.

청나라의 행정구역을 한눈에 보여주는 중국전도다. 조선.일본.유구(오키나와) 등도 표기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3대 연행록
김창업의 『노가재연행개』,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18세기 ‘3대 연행록’으로 손꼽힙니다. 김창업은 숙종 38년(1712)에 5개월 간 연행을 다녀온 후 상세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홍대용은 영조 41년(1765)에 숙부를 따라 자제군관으로 나선 6개월간의 여정을 한문본 『연기(燕記)』와 한글본 『을병연행록』으로 남겼습니다. 특히 그의 연행은 1778년 연행을 떠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780년 가장 늦게 청나라를 가게 된 박지원은 북경뿐 아니라 열하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한 『열하일기』는 이용후생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담겨 있으며, 조선현실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연암 특유의 문체로 강조하여 당대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연경에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기행문을 남겼는데, 그 중 3가의 것이 가장 저명하다. 3가는 곧 노가재 김창업,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이다. 사례로 말하면 김창업은 편년체에 가까운데 평순하고 착실해 조리가 분명하다. 홍대용은 기사체를 따랐는데 전아하고 치밀하다. 박지원은 전기체라 하겠는데 문장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내용이 풍부하고 해박하다. – 김경선, 『연원직지』-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1712년, 김창업,

18세기 지식인들이 가졌던 대청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후 북학파의 연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1765년, 홍대용

연행 후 천문학.천주당.유리창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방대한 분량으로 기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열하일기(熱河日記), 18세기, 박지원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떠나는 사신단에 참여한 박지원이 연경을 지나 청 황제의 여름별장지인 열하까지 다녀온 뒤 저술한 책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연행의 준비.
사신단은 한양을 떠나 평양, 의주를 지나고 중국의 심양, 요하, 산해관을 거쳐 청나라 연경에 도착합니다. 오가는데 각각 60일 남짓, 연경에 머무는 두어 달 정도를 합하면 총 5~6개월 정도가 걸리는 장기 여행입니다. 인원은 사절단 30명과 수행원을 포함하여 200~300명에 이르렀으며, 한양에서 북경까지 6,300여리가 되는 먼 길을 효과적으로 이동하기 위해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준비물로는 청에 전달할 물품부터 연행 기간 수식에 필요한 일체의 장비가 있었으며, 장기간 여행 시 필요한 개인 휴대용품과 청나라에서 만날 새로운 이들에게 줄 선물도 이들이 챙겨야 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연경성시도(燕京城市圖), 1828년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북경)의 중심부를 그린 지도다. 좌우대칭의 도로망과 건물배치 등 계획도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앙부일영(仰釜日影), 18세기, 휴대할 수 있는 소형시계. 면경철(面鏡鐵). 조선,

남성들이 휴대한 소지품으로, 목판을 옆으로 밀어서 지남철과 거울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모피낭(毛皮囊), 조선후기,

나무통에 낙타 가죽을 씌워 만든 주머리로, 여행시 휴대용품을 넣어 다녔다.

수진팔도지도( 袖珍八道地圖), 18세기

여행용으로 휴대했던 지도로 지역의 다양한 정보도 간략하게 실었다.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열수도(列宿圖), 조선후기

『천문류초(天文類秒)』의 내용을 4책으로 나눠 필사하여 엮은 휴대용 천문서다. 원래 원(元).형(亨).이(利).정(貞) 4책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3책만 남아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휴대용 필묵통, 조선

안경.안경집, 조선후기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연행시 사신단이 중국에서 구입해 오는 물품 중 하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휴대용 약갑, 침통.

부적, 담뱃대, 표주박

유리창과 천주당.
조선에선 볼 수 없는 새로운 문물과 진귀한 풍경으로 가득 찬 유리창과 천주당은 조선 사신단이 들리는 필수 코스로 오랫동안 사랑 받았습니다. 유리창은 원래 유리와(琉璃瓦)를 제조하는 곳이었으나 건륭제 때부터 서화골동시장이 형성됐고, 조선 사신들은 이곳에서 책과 골동품을 사갔습니다. 또한 이곳은 청나라 문인들을 만날 수 있는 교류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천주당은 북경에 들어와 있는 서양인 신부들이 머물던 곳으로, 유리창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이곳을 드나드는데는 큰 제약이 없었으므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물을 가장 쉽고 가깝게 체험할 수 있어 사신단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뒤 알드의 중국(Du Halde’s China), 1735년, 뒤 알드

중국과 인접국가들이 지리.역사.문화 등을 서술한 책이다. 중국 선교사 마테오리치.아담 샬.페르비스트의 모습과 북경 흠천감이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해시계, 조선후기

휴대용 해시계로, 해 그림자를 받는 면에 아라비아 숫자와 간지가 함께 쓰여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양식 해시계, 조선.

휴대용 해시계로, 로마자로 시간을 표기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안경, 조선

1765년 홍대용과 함께 연행을 간 이기성은 안경을 쓰고 지나가던 청나라 문인 엄성과 반정균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건륭통보(乾隆通寶), 18세기 후반.

청나라 건륭제 때의 화폐다. 앞면에 ‘건륭통보’라 새기고 뒷면에는 만주자와 아라비아자로 주조지를 표시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그곳에서 만난 인연
연행에 참여한 많은 지식인들 중, 특히 백탑파는 청의 문인들과 인연을 맺어 오래도록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던 그들에게 북경은 기회이자 동경의 땅이었고 그곳에서 만난 인사와의 만남은 현실에 막혀 늘 답답했던 조선과는 달리 그들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차별없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홍대용과 엄성, 이덕무와 반정균, 박제가와 나빙, 유득공과 기윤의 돈독한 우정의 흔적들은 그들의 문집과 서화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들은 귀국 후에도 먼 타국의 서로를 그리워하며 기약없는 편지를 주고 받았고, 인편을 통해 선물을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만났을 당시의 일을 잊지 못해 가슴에 평생토록 품고 지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강개선면산수도(康愷扇面山水圖), 1801년, 강개

유득공에게 청나라 화가 강개가 부채에 그려준 산수화다. 뒷면에는 청나라 문인 조강이 유득공에게 시를 한 수 적어 보낸 선면이 배접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철교외사유상(鐵橋外史遺像), 1770년, 해강

『철교유조책(鐵橋遺照冊)』에는 1766년 연행에서 홍대용과 만나 교유했던 엄성의 초상화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반정균이 김선행에게 보낸 부채, 18세기, 반정균

반정균이 1766년 홍대용과 함께 연행한 부사 김선행에게 매화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서 준 부채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전동원 선면 서악화산묘비, 전동원

1801년 북경에서 만난 유득공에게 금석학에 밝았던 청나라 학자 전동원이 부채에 써준 글씨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