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文廟)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통칭하는 말로 중국에서는 공묘(孔廟)라고 부른다. 공묘는 공자가 죽은 노나라 애공이 공자가 살았던 집에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되었으며,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각국에 공자의 사당이 세워졌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서 유래한 행단(杏壇)은 문묘(文廟)가 교육기관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며,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자사당인 문묘는 교육기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 북경에서는 최고 교육기관으로 문묘를 국자감이라고 부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국자감이라 불렀다고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꾼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방에서도 고을 수령들이 공자 사당이 문묘를 세우고 지역인재들을 양성했는데 이를 향교라고 부르며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이라고 불리는 서울 문묘는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뒷쪽에 두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에는 출입문으로는 성현들의 혼백이 드나드는 신삼문을 두고 마당 양쪽에 이름난 유학자들이 위패를 모시는 동.서무를 배치하고 있다. 이런 공간배치는 궁궐 정전 영역, 불국사 등 사찰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로마의 신전이나 공공건물에서 볼 수 있는 바실리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문묘(보물)>
성균관 문묘(보물)는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앞쪽에 제향공간, 뒷편에 강학공간을 두고 있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태조7년에 세워진 이래 여러차례 중건을 거쳐 구한말 고종대에 크게 중건한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곡부(曲阜)나 베이징 공묘(孔廟) 대성전이 유리기와을 얹고 대리석기둥을 사용하는 등 자금성 태화전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진데 반해 서울 문묘 대성전은 단정하면서 절제된 미(美)를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쌓은 월대에 세워졌으며, 중국 공묘와는 달리 답도를 두지 않고 국왕도 어도를 따라 걸어 올라 제향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대성전>
대성전은 공자와 제자들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원래는 공자와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성균관 문묘에는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뛰어난 유학자 18인의 위패를 같이 모시고 있으며, 동.서무는 비워두고 있다고 한다.
<옆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단층 건물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곡부 공묘 대성전>
공자의 고향이나 노나라 수도였던 곡부(曲阜,취루)의 공묘 대성전이다. UNESCO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로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지역에 남아 있는 많은 공묘(or 문묘)의 모범이 되는 것으로 최대 규무이다. 명대 중건하면서 자금성과 비슷한 형태로 지어졌다.
<베이징 국자감 공묘 대성전>
서울 성규관의 모범이 되었던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베이징 국자감에 있는 공묘 대성전이다. 취푸 대성전이 2층 월대위에 건물이 세워진 것에 비해 1층 월대위에 세워졌다. 황제가 방문하여 곳으로 계단에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 계단>
황제가 방문하는 국자감과 취푸에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어나 성균관 대성전은 신도와 어도와 연결된 2개이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 국왕은 어도와 연결된 계단을 걸어 올라 제향을 올렸던 것에 비해 중국 황제는 가마를 타고 답도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입문>
대성전 내부 공간으로는 들어가는 출입문은 판문으로 되어 있으며 양쪽으로 창문을 두고 있다. 건물은 조선시대 이전 건물양식과 중국의 건물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중기 명필로 잘 알려진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성묘(聖廟)라고 적힌 현판>
<처마와 공포>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위패를 모신 성묘
태조는 한양 천도 후 태조 4년(1395)에 문묘의 창건을 명하였으며, 태조 6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정종 2년(1402)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5년(1602)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은 남향으로 모두 20간(間)이며, 남북으로는 4개, 동서로는 5개의 기둥이 있으며, 앞에는 당(堂)이 있고, 뒤에는 실(室)이 있다. 대성전은 높은 장대석기단을 쌓고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짠 다포(多包)양식이다. 정면 5간(間) 측면 4간(間)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단층구조이다.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초제공, 이제공은 모두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놓이는 첨차는 삼분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출첨들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끝은 교두형이지만 삼제공 끝은 역시 삼분두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의 현판(懸板)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출처:성균관>
<동무(東廡)>
동무(東廡) 는 1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앞쪽에 복도를 두어 대성전이 있는 제향공간에서 회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동.서무에는 원래 중국과 우리나라의 뛰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으나 지금은 비워놓고 있다.
<회랑을 형성하고 있는 동무 앞 복도>
이런 공간배치는 로마시대 신전이나 주요 공공기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실리카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회랑을 구성하는 공간배치는 불국사를 비롯한 삼국,통일신라시대 사찰, 중국과 한국의 궁궐 정전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서무(西廡)>
동무/서무 (보물), 현인들의 위패를 나누어 모셨던 곳
태조의 한양 천도 이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대성전의 좌·우측에 있으며, 동무는 서향, 서무는 동향이다. 각각 11간(間)으로서 맞배지붕 양식이다. 동·서무에는 본래 공문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국의 한(漢)·당(唐)·송(宋)·원(元)의 제현(諸賢) 및 우리나라의 18현(賢) 등 112위(位)를 동·서로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고, 그 밖의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 위패를 태워서 땅에 묻음)하여 현재 동·서무는 비어 있다. <출처:성균관>
<성균관 문묘 신삼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성현들이 혼령이 드나드는 신문으로만 사용했으며, 국왕이 출입하는 어문은 동쪽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곡무 공묘 대중문>
곡부(曲阜) 공묘 4번째 출입문에 해당하는 대중문이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으로 성균관 문묘 삼문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대중문(大中门)은 북송대 처음 세워져 공묘(孔廟)의 출입문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대중문 앞으로 3개의 출입문과 3개의 패방을 세우고 주변에 진귀한 수목들을 심어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문묘 동쪽편에 있는 국왕이 출입하는 어문>
삼문을 하고 있으나, 서무(西廡)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대성전 마당
대성전 앞 마당에는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측백나무, 회화나무 등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수목들을 심어 정원을 이루고 있다. 중국 공묘 정원에는 측백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숲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서울 문묘는 측백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하고, 은행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문묘를 대표하는 나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당 한쪽편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중국 곡부의 공묘 규문각 앞.뒤에 있는 13비정과 비석들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에 있는 공묘(孔廟)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간략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문에서 대성전으로 이어지는 신도(神道)>
<비각>
마당 한쪽편에 세워져 있는 비각이 있다. 곡부(曲阜) 문묘에는 대성전 바깥에 역대 황제들이 세운 15개의 비정과 수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반해, 서울 문묘에는 대성전 마당에 1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거북바침돌>
<대성전 마당>
제향공간인 대성전 앞 마당에는 크고 작은 수목들을 심어 놓고 있는데,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서 유래한 행단을 연상시키는 은행나무, 회화나무, 측백나무 등을 심어 놓고 있다.
<은행나무와 측백나무>
<은행나무>
대성전 뒷편 강학공간인 명륜당 마당에는 행단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서울 문묘일원, 사적, 1398년(태조7) 건립, 1869년(고중6) 중건
문묘일원은 조선시대 국가 통치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서, 공자(孔子:기원전551~479)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훌륭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고 인재들을 길러내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1398년(태조7)에 서울 문묘를 처음 지었고, 이후 여러번 고쳐 지었다. 1869년(고종6)에 크게 수리를 했는데 그 모습이 현재 남아 있다. 문묘는 공자의 사당이고, 성균관은 교육기관인데 이들을 묶어서 문묘 혹은 성균관이라 하였다. 지방에 있는 공자의 사당과 중등교육시설은 문묘 혹은 향교라고 하였다.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문묘의 제사 공간은 대성전 앞으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보고 있다. 교육공간에는 수업하는 장소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도서관이었던 존경각, 지원 시설인 양현고 등이 있다. 서울 문묘는 검소하고 소박하면서 질서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매년 행해지는 석전제는 귀중한 무형 문화유산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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