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에는 8도가 설치되고 그 아래에 지방조직인 부,목,도호부,군,현을 두었다. 이외에 조선초기에는 전조의 도읍인 개성에 중앙조직에 해당하는 유수부를 두어 행정 및 국방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필요성 때문에 유수부는 강화, 광주(남한산성), 수원에 확대.설치되었다.
광주부가 있는 남한산성이나 수원부가 있는 수원화성과 마찬가지로 강화산성내 강화부(江華府)에도 국왕이 임시로 거처할 수 있는 행궁이 설치되었으며, 관아 건물로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국왕의 영정을 보관하는 장녕전, 만녕전이 세워져 상당히 큰 규모의 행궁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약탈로 건물은 불타고, 외규장각 도서들은 약탈당했다.
<강화 고려궁지(사적)>
강화부 관아와 행궁이 있던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으로 사적 강화고려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가 몽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이곳에 궁궐을 짓고 39년간 사용하였다. 고려궁궐 건물과 성곽은 화친 이후 몽골의 요구로 모두 파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이곳에 고려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영역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출처:강화군청>
<강화산성 남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화읍 관청리>
강화산성 안쪽으로 고려궁터, 강화부 관아 건물이 보인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궁궐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14)에는 봉선전(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21년(인조9)에는 행궁을 건립하였고, 1638년(인조16)에는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였으며, 1654년(효종5)에는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년(숙종21) 장녕전, 1713년(숙종39) 만녕전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정조6)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에 태웠다.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어 현재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출처: 강화군청>
<강화 행궁 그림>
강화부 궁전도(1781년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중 국왕의 임시거처인 행궁을 그린 그림이다. 행궁건물은 외규장각과 함께 병인양요때 불타버리고 남아 있지 않다.
<강화 유수부 동헌>
강화 고려궁지에 남아 있는 동헌건물, 앞면 8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는 상당히 큰 편이다. 강화유수는 강화산성과 해안에 설치된 군사조직인 진.보를 총괄하는 종2품의 상당히 높은 관직이었다. 동헌 건물 또한 행궁으로서 뿐만 아니라 강화유수의 직위에 걸맞게 지었다고 볼 수 있다.
<동헌을 그린 그림>
강화부 궁전도(1781년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중 그려진 강화유수부 동헌, 뒷편에 손님접대를 위한 작은 정자가 있다.
<‘명위헌(明威軒)’ 이라고 쓰여진 동헌의 현판>
영조대 명필이었던 백하 윤순이 썼다고 한다.
<처마와 공포>
강화부는 행궁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동헌 건물에 단청을 하고 서까래를 이중으로 설치한 겹처마를 하고 있다. 이는 궁궐건물에만 사용하는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대청마루>
강화부 동헌은 앞면 8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가운데 4칸은 강화유수가 재판 등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집무실>
양쪽에는 2칸씩 방을 두고 있는데, 일반적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온돌을 깔지 않고 있다. 한쪽은 강화유수가 개인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다른 한쪽은 손님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동헌에 비해서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옆에서 본 모습>
<강화부 관아 출입문인 승평문>
원래부터 정문이었는지 중문이 남아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관아 문루는 없고, 맞배지붕의 삼문형식을 하고 있는 승평문이 동헌입구에 남아 있다.
강화유수부동헌, 유형문화재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1538년(인조16)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1769년(영조45)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하였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대 명필인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출처: 강화군청>
<이방청>
강화부 이방청 건물은 ‘ㄷ’자형으로 이루어진 단층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상당히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관청건물이다. 건물은 앞면으로 11칸 건물에 양쪽에 5칸씩 달아내어 놓은 형태이다. 강화유수부의 규모가 크다고 하나, 지방 관아 건물로는 상당히 큰 건물로 중앙부처 건물과 비슷한 규모이다. 강화부 소속 관헌들이 근무하는 실무적인 공간으로 장식적인 부분이 거의 배제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서익랑>
익랑이라 할 수 있는 서쪽으로 4칸 달아내어 놓은 건물, 툇마루나 복도를 두고 있지는 않다.
<난간이 있는 복도>
<건물 기단>
건물은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궁궐 건물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뒷편>
강화유수부 이방청
강화유수부의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1654년(효종5)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1783년(정조7)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1915년 이후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구조는 ‘ㄷ’자형 단층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출처:강화군청>
<외규장각>
정조대에 왕실의 주요 문서와 책자 등을 보관하기 위해 강화행궁에 설치된 외규장각. 앞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조선왕실 의궤를 비롯하여 중요한 문서들이 보관되었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은 불타고 책자들은 약탈당했다.
외규장각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로 크게 주목 받게 되고 국왕과 왕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1782년(정조6)에 건립하였다. 왕립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였다.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여 서적을 약탈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현재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출처: 강화군청>
<강화 용흥궁>
강화읍 관청리 언덕에 세워진 강화성공회 성당 아래 주택가에 세워진 한옥건물이다. 원래 초가였던 것을 철종 즉위 후 강화유수가 구한말 서울지역 양반가 저택과 비슷한 규모로 지었다.
<강화향교>
강화유수가 관리하던 강화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것을 여러지역으로 옮겨졌다가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강화는 고을 규모가 크지 않고 국방상 매우 중요시하던 고장으로 서원이 많이 설치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공교육기관이었던 강화향교에서 조선후기까지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고려시대 30년 이상 대몽항전의 중심이 되었던 곳으로 조선초기에는 부윤이 설치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이런 지정학적인 중요성때문에 유수부를 설치하였다. 숙종대에는 강화산성을 개축하고, 해안에 군사조직인 12진.보와 방어시설인 53돈대를 설치하였다. 강화유수는 조선 인조5년(1627)에 설치된 종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중앙부처(경직)에 해당한다. 법규에는 2인의 유수를 두게 되어 있으나 경기관찰사가 1인을 겸임하기때문에 전임유수가 행정과 군사업무를 전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양세력 위협이 크졌던 구한말 강화유수는 수도를 방어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었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러야 했다.
<강화산성 남장대>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로 옮기면서 축조되었다. 몽골과의 화친 후 몽골의 요구로 성곽과 궁궐을 허물었다가 조선시대에 개축되어 석축성으로 바뀌어써다. 현재의 성곽은 숙종대인 1710년에 크게 보강한 것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암문 4개, 수문 2개가 있다.
<강화산성 서문>
강화읍 중심부를 지나서 강화지석묘 방향의 48번 국도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산성의 서문과 성루인 첨화루이다. 지금은 서문 옆에 도로가 있지만 원래는 성벽이 북쪽 북산과 남쪽의 남산을 연결하고 있다.
<연무당 터>
강화산성 서문 안쪽에는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위하는 관아건물이 연무당이 있었다고 하며, 구한말 일본과 조약을 맺은 유서깊은 장소이다. 연무당은 수원화성의 연무대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강화유수의 군방상 지위를 보여주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남문>
강화산성의 정문격인 남문인 안파루이다. 동문이 한양에서 강화유수부를 오가는 사람들이 통과는 출입문이라면, 남문은 강화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성문으로 성문 안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는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종각이 설치되었으며, 강화동종(보물)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강화 남문에 걸려 있던 강화동종(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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