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含月産, 해발 584 m) 자락에 자리한 기림사(祇林寺)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643년) 인도 승려 광유가 처음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전통사찰이다.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효대사가 기림사를 크게 중창했다고 하나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당시 기림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불상에서 출토된 복장전적에 고려시대 전적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림사는 조선시대에 크게 번창하여 경주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다고 한다.
<경주 기림사>
기림사는 개울이 흐르는 울창한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지사찰이다.불전들은 낮은 기단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는 등 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응진전 뒷편에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조성된 불전들과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다.
<기림사 일주문>
<사찰입구에 있는 승탑>
<들어가는 길>
<천왕문>
조선시대에 크게 번창한 사찰답게 기림사에 남아 있는 불전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다. 주불전인 대적광전(보물)를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는 응진전을 두고 있으며, 강당건물인 진남루가 대적광전 맞은 편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진남루는 기림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과 비슷한 규모와 형태의 건물로 조선후기 승병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적광전 앞 마당에는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목탑터 등이 있다.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있는 영역 옆쪽으로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조성한 삼천불전, 명부전, 관음전, 삼성각 등의 불전들과 요사채 등이 들어서 있다. 조선후기 경주부 관아의 후원을 받아 크게 번창한 사찰로 당시의 불교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진남루>
천왕문을 들어서면 조선시대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처럼 생긴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인 진남루가 보인다. 진남루 내부는 넓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병영이나 수영에서 운영했던 객사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이다. 승병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 앞 마당>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으로 인조 때 크게 중수하였다고 한다. 건물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지만 낮은 기단에 건물을 세워 웅장하지만 위압감을 주지는 않고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내부에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과 뒷편 탱화인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를 모시고 이다.
<주불전인 대적광전(보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과 뒷편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
대적광전은 축대를 쌓아 조성한 산중사찰과는 달리 편안한 느낌을 준다. 탑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평지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적광전 기단>
기림사 동쪽편에 있는 약사전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크지는 않지만 단정하면서 균형감이 잘 잡혀 있다.
<약사전>
기림사 약사전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림사 약사전이다. 사적기에 대적광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중건기에는 조선 효종 5년(1654)에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 4년(1678)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므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얕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건립되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여기서는 배면에 문을 둔 것이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건축물이다. (안내문, 기림사, 2015년)
약사전 앞에는 목탑터가 있다. 원래 약사전과 함께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사전 앞 목탑터>
대적광전 앞 마당 안쪽편에 있는 응진전은 앞면 5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큰 규모의 불전이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응진전의 오랜 내력을 추정해 볼 수 이다.
<응진전>
기림사 응진전
이곳은 아라한(阿羅漢)을 모신 건물로,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후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은 기둥 6개의 5칸이고 측면은 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막돌 장대석을 한단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앞.뒷면에는 둥근 기둥을 하고 옆면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은 단정한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18세기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중기의 특징을 포함하고 있다. 대체로 수평적 느낌이 강한 단아한 건물이다. (안내문, 기림사, 2015년)
<응진전 내부>
응진전 앞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림사가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지만 경주지방의 다른 사찰에 비해 석탑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응진전과 함께 독립된 공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
<응진전 뒷편>
응진전 뒷편 축대를 쌓아 조성한 마당에는 여러 불전들과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조성한 건물들로 전통사찰 가람배치에서 볼 수 있는 규칙성은 없고 상황에 따라서 건물들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응진전 뒷편 축대를 쌓아 조성한 마당>
<삼천불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작은 요사채>
<요사채>
<성보박물관>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보답하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 생략 ~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만파식적,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범종각>
경주 기림사(祇林寺),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含月山) 기림사는 천축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이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고 불렀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때에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으며,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을, 동쪽에는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라각을, 남쪽에는 무량수전과 진남루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대적광전은 보물 제833호로서 조선후기 맞배양식 건물이며, 유물전시관에 모셔져 있는 건칠보살상은 보물 415호로서 반가상 형태를 취한 보기 드문 보살상이다. 또한 웅진전 앞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기의 석탑양식을 나타내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역시 대적광전에서 불사리와 함께 발견된 고려시대의 금은자사경들은 보룰 제959호로서 기림사의 오랜 역사와 사격(寺格)을 나타내는 성보이다. (안내문, 기림사, 2015년)
<출처>
- 안내문, 경주 기림사, 2015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년
-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만파식적,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