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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가 남아 있는 옛 절터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남간사지(南澗寺址)이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탄생신화가 있는 경주 나정에서 남산 북쪽 남산신성이 있는 해목령으로 들어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남간사의 창건이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나 신라 애장왕때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었던 자리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고 당시 절에서 사용한 초석이나 축대 등을 민가건물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석조가 남아 있다. 절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찰입구임을 알려주는 당간지주(보물)가 남아 있다. 부근에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창림사지와 일성왕릉이 있다.

<남간사지 절터와 당간지주(보물)>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는 같은 형태와 크기로 마주 서 있다. 당간지주 아래 위에 둥근 구멍을 뚫었고 안쪽에 +자 모양의 홈을 판 것이 특징이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며, 그 구조가 단순하며 안정감을 준다.

<당간지주.>

절터는 당간지주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는데 현재 마을의 모습이 옛 사찰의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간사 건물에 사용하였던 초석이나 기단석 등은 민간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마을에는 당간사에서 사용하였던 우물인 당간사지 석정이 남아 있다.

<뒤에서 본 절터>

<주춧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

<남간사지 절터와 마을>

<마을에 남아 있는 석정>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르기를, “법흥대왕(法興大王) 즉위 14년(527)에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없앴다”고 하였으니, 바로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527년)로 서천축(西竺)의 달마(達摩)가 금릉(金陵)에 왔던 해이다. 이 해에 낭지(朗智)법사가 역시 처음으로 영취산(靈鷲山)에서 불법을 열었으니, 대교(大敎)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반드시 원근(遠近)이 동시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여기서 믿을 수 있다. 원화(元和) 연간(806~820년)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沙門) 일념(一念)이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을 매우 자세히 실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권 3 제3신흥법, 원종흥법 염촉멸신,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를 지키던 중요한 방어시설인 남산신성이 절터 뒷편에 있다. 남산신성 아래에 신라 7대 일성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남산신성>

<당간사지가 있는 마을 앞 들판>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탄생신화가 있는 경주 나정이 있다.

<일성왕릉에서 내려다 본 남간사지 주변.>

남간사지 당간지주, 보물, 경주시 탑동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남간사는 해목령을 뒤로하여 서남산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 주춧돌과 우물 등이 남아 있다. 법당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3.6m 높이로 당간지주가 서 있다. 또한 두 기둥은 동서로 70cm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윗부분과 옆모서리를 다듬었고 안쪽은 +자 모양의 홈을 판 것이 특이하다. 아래위에 둥근 구멍을 뚫었는데 그 구조가 단순하며 안정감을 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