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군인 금척리고분군(사적)이다. 고분군은 모두 50여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봉분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32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 국도를 개설하면서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당시 훼손된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 뒤 몇차례 조사기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전제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토유물로는 금귀걸이 1쌍 등이 있으나, 많은 편은 아니다. 봉분은 대체로 원형과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다. 4~5세기 마립간 시기에 많이 사용한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하고 있다.
<경주 금척리고분군(사적)>
건천읍에서 경주로 연결되는 옛 4번국도 양쪽으로 넓은 지역에 32기의 봉분 중 서쪽편 봉분들. 경주 대릉원의 고분들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꽤 큰 규모의 봉분들이다.
<북쪽편 건천읍 방향 도로변에 모여 있는 봉분들>
<입구에 있는 봉분>
이 곳에 있는 봉분 중 중간 정도 규모이다.
<도로변에 있는 봉분>
<고분군 북쪽 큰 규모의 봉분>
<중앙에 있는 약간 큰 규모의 봉분>
<주위의 큰 규모 봉분>
<고분군 중앙에 모여있는 봉분들>
<북쪽에 위치한 작은 봉분>
<서쪽편에 떨어져 있는 큰 규모의 고분군>
고분군이 있는 금척리는 대구와 경주를 연결해주던 옛 국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건천읍 소재지에서 경주방향으로 약 2 km 정도 떨어진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금척리는 박혁거세왕이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늘로 부터 받은 금척을 숨기면서 40여기의 봉분을 조성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경주 시내 평지에 위치한 고분들보도 그 규모가가 작아서 삼국시대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쪽에 모량(牟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삼국시대 신라 6부 중 하나인 모량부 출신 박씨세력들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금척리고분군을 가로지르는 옛 4번국도>
1950년대에 경주와 대구를 연결해주는 이 국도를 개설하면서 봉분의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도로변에서 본 금척리 고분군>
<도로 동쪽편 고분>
서쪽에 비해 봉분의 크기도 약간 작고, 숫자도 서쪽편에 비해서 적은 편이다.
<동쪽편에 모여 있는 봉분들.>
<동쪽편 봉분들 중 크기가 작아 보이는 봉분들>
<도로 동쪽편 중앙의 작은 봉분>
<남쪽편에서 본 동쪽편 봉분들.>
<서남쪽 봉분들>
서남쪽에는 안쪽으로 큰 고분들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작은 고분들이 보인다. 북쪽편에 비해서 고분들이 많이 모여 있지는 않다.
<금척리고분군 중 제일 큰 규모의 봉분. 쌍분 형태를 하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 무덤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독특한 무덤으로 4세기 이후에 왕이나 지배계층의 무덤양식으로 금관을 비롯한 많은 부장품들을 묻어두고 있다. 무덤들 쌓는 형식 덕분에 도굴을 피할 수 있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경주 금척리 고분군(사적),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이 고분군은 모두 5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 부분적으로 발굴조사한 결과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밝혀졌으며, 통일신라 이전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현재 흙으로 무덤 위를 둥글게 쌓아 올린 고분 32기가 확인되고 있다. 혁거세왕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척을 하늘에서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이름을 ‘금척리’라 부른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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