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왕실 어른들과 후궁들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거처할 목적으로 세운 이궁(離宮)으로 임진왜란 전까지는 국왕이 머물거나 업무를 보는 공간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을 중건하지 않고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하면서 이를 보조하는 궁궐로서 역할을 갖게 되었다. 창경궁도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인 문정전을 두고 있다. 문정전은 편전으로 창덕궁 선정전과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많이 사용하지 않고 왕실의 장례 때 빈전이나 혼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반면에 편전을 보조하는 숭문당과 함인정은 국왕이 창덕궁을 벗어나 신하들이나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거나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많이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나 정자처럼 지은 숭문당은 그 위치나 성격이 경복궁 수정전(옛 집현전)과 비슷한 역할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며, 작은 정자이지만 넓은 마당이 있는 함인당은 국왕이 손님을 접견하거나 연회를 개최하는 경회루나 창덕궁 후원 영화당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조는 숭문당과 함인정에 성균관 학자들 초대하여 학문을 논하거나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을 위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함인정 앞 마당>
함인정 앞 마당은 비교적 넓은편이며, 마당 한가운데에 오래된 고목이 자라고 있다. 이곳에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연회나 행사가 있을때에는 천막을 치고 행살를 치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에 표현된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왼쪽(남쪽)에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편전에 해당하는 문정전이 있고, 뒷편에 국왕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거나 신하들을 접견하는 공간인 숭문당과 마당이 있는 정자인 함인정이 자리잡고 있다.
편전인 문정전
창경궁 문정전은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던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창경궁이 세워졌던 성종대에 명정전 등과 함께 세워진 건물로 동향을 하고 있는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남향을 하고 있다. 앞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월대위에 세워졌다.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국왕이 업무를 보는 닫집형태의 어좌가 설치되어 있다. 문정전은 그 규모로 볼 때 창덕궁 선정전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없지만 동궐도를 살펴보면 선정전과 마찬가지로 정면에 복도각을 두고 있다. 선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되는 등 여러가지 사유로 사용할 수 없을 때 국왕과 정삼품 이상 당상관들이 참여하는 어전회의가 열릴 수 있는 곳이지만 실제로는 주로 혼전이나 빈전으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도 이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을 1980년대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문정전>
앞면 3칸 옆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국왕의 어전회의를 여는 등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창덕궁 선정전과 거의 같은 규모이며, 동궐도에서 보면 선정전과 마찬가리로 출입문까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창경궁이 이궁(離宮)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편전으로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왕실 장례가 있을 때 혼전으로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처마와 공포>
<추녀마루 잡상>
<문정전 내부>
정전과는 달리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 있고, 중앙 뒷편에 닫집 형태의 어좌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국왕이 3품이상의 당상관이 참여하는 어전회의가 열리는 공간이다.
<천장>
정전인 명정전과는 달리 어좌 위에 봉황문이 장식된 보개천장이 없고 우물반자 천장을 하고 있다.
어전회의
이곳은 어전회의를 하던 편전이다. 어전회의는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과 중요 국정을 논의하던 회의이다. 조선왕조에서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국정의 근본을 위민정치에 두었으며, 그것은 곧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였다. 이같은 바탕 위에서 나라의 중요 국사는 반드시 어전회의를 거쳐서 시행하였다. 임금의 친림하에 삼공(영의정, 좌.우의정)과 육경(육판서)을 비롯하여 각기 안건에 따라 필요한 현직 및 전직 신하들이 동.서로 정좌하고, 검결, 주서 등 사관이 배석한 가운데 국사가 논의 되었다. 임금은 조신들로 하여금 의견을 충분히 피력하게 한 후 이를 수렴하여 그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이같은 어전회의에서의 공정한 국정심의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가 뒤따랐다. 첫째, 사관제도이다. 국법에 의하여 영의장과 같이 최고의 관직자라도 특별한 경우 외에는 사관의 입회없이 임금과 혼자서 대화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어전회의에서도 사관은 반드시 신하들의 발언과 행동은 물론, 임금의 언행마져 낱낱이 기록하여 남겼다. 이를 사초라 하고, 이는 후에 실록편찬의 기본자료가 되었으니, 군신의 언행은 저절로 신중하고 주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언관제도이다. 만약에 어전회의에서 타당성이 결여된 결정이 내렸을 경우에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에서 그 시정을 요구하였는데 이들 언관에게는 면책특권이 있었다. 이는 선비(유생)들의 언론을 존중하고, 잘못된 어전회의의 결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었다. 어전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이같은 정사처리는 민의에 바탕한 조신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제도로서,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국정운영이었다. <출처:문화재청>
문정전 앞 마당.
동궐도에는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복원되지 않고 있으며, 마당에는 건물터가 남아 있다. 마당 서쪽편에는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고 한다.
<문정전 행각>
<바깥에서 본 모습>
문정전 행각에는 솟을대문 형태의 작은 출입문이 문정문이 있다. 앞쪽의 궐내각사를 통해서 신하들이 주로 출입했던 출입문으로 보인다. 동궐도에서는 바깥으로도 복도각이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본 모습>
문정전 일원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의견을 나누던 창경궁의 편전으로 동향인 명전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편전이면서도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으로도 자주 쓰였다. 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도 문정전이 혼전으로 쓰이던 것과 관련이 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었고 1986년에 건물을 다시 세웠으나, 서쪽에 있던 담장과 화계 정원은 아직 재건하지 않았다. <출처:문화재청>
숭문당과 함인정
숭문당과 함인정은 정전인 명정전 뒷편에 편전인 문정전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조선후기 국왕이 주로 거처하며 정사를 논의하던 곳은 창덕궁이며, 창경궁 정전과 편전은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숭문당은 성균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주변에 세자 시강원을 비롯한 궐내각사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궐 후원과도 가까운 까닭에 창덕궁에 비해서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숭문당은 건물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조용한 분위기로 학문과 국사를 논의 하기에 적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숭문당에서 국왕이 문.무과 장원급제자를 접견하거나 기존 관료들이나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함인정은 작은 정자로 후원의 부용지의 영화당과 함께 경복궁 경회루와 같은 기능을 하던 공간이다. 특히 영조는 이곳에서 성균관 유생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숭문당과 함인정 일대는 경복궁 경회루와 집현전이었던 수정전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숭문당>
앞면 4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경사진 지형을 활용하여 앞쪽에 초석을 세우고 툇마루를 설치하여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나 정자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궁궐건물이지만 잡상을 설치하지 않고, 처마도 홑처마를 사용하고 있다. 경종대에 이 건물을 처음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불탄것을 순조대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주로 영조가 많이 사용한 건물이라 할 수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앞쪽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이용하거나 휴식공간으로 활용했다.
<처마와 공포>
현판은 영조가 쓴 어필이라고 한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간단한 초익공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를 사용하고 있는 등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
<숭문당 툇마루>
난간을 설치하여, 문을 열면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뒤에서 본 모습.
<뒷편 툇마루>
뒷편에 있는 작은 마루를 통해서도 출입할 수 있으며, 사방에 문을 달아내어 개방된 느낌을 주고 있다.
<복도각>
<빈양문>
정전인 명정전과 함인정 출입문인 빈양문과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숭문당 뒷편 작은 정자인 함인정>
경회루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창덕궁 후원 영화당과 비슷한 규모이다. 국왕이 학자들이나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된 공간으로 영조는 이곳에서 문무과에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였다고 한다.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공식 연회가 있을 때에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행사를 치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편에는 국왕의 침전인 환경전과 경춘전이 있다. 지금은 같은 공간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많은 행각들과 담장으로 분리된 공간이다. 경복궁 침전 왼쪽(서쪽)에 경회루가 있는 것과 비슷한 공간배치이다.
<앞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4면이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는 정자이다. 공포는 이익공 공포를 사용하였고, 지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있다. 궁궐건물로서 단청으로 건물들 장식하고 있다. 이곳에는 원래 인양전이 있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인경궁에 있던 함인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함인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순조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처마와 공포>
<마루>
마루는 우물마루를 하고 있으며, 국왕이 앉는 가운데 마루는 1단 높게 설치하고 있다.
<천장>
천장도 중앙에는 우물천정을, 바깥쪽에는 연등천정을 하여 격을 달리하고 있다. 천정아래에 중국 시인 도연명이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사시(四時)’가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있다.
<함인정 앞 마당>
숭문당과 함인정
숭문당과 함인정은 명정전의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년에 다시 세웠다. 앞족에 설치한 누각형 툇마루로 출입하였고, 영조 임금의 친필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함인정은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1833년에 다시 세웠다.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는 건물 이름의 뜻을 상징하듯, 사방이 터진 개방형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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