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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왕경인의 생활

신라가 불교를 받아 들인 이후 조성된 불국사, 석굴암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에서 그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경제력 등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삼보 중 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을 보유했던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여겨졌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황룡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7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사찰의 규모와 신라인의 종교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절터의 규모와 가람배치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황룡사지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당시 왕경에 있던 가옥, 도로 등 다양한 도시 기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전성기 때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

궁궐이었던 월성 동쪽으로는 황룡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사찰들과 많은 민가들이 들어서 있다.

<황룡사 금당터에 남아 있는 대좌>

장륙존상으로 알려진 거대한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삼보로 여겨졌던 황룡사 구층목탑터>

거대한 심초석과 기둥을 세웠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발굴.조사결과 심초석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용얼굴무늬 기와, 7~8세기

이 용얼굴무늬 기와의 월지 출토품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솜씨는 황룡사의 높은 사격(寺格)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황룡사터
황룡사는 왕궁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던 신라 제일의 국찰(國刹)로서 왕경 중심부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566년(진흥왕 27)에 준공된 황룡사에는 574년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제작하였고, 584년(진평왕 6)에는 이를 안치할 금당을 세웠습니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약 80m 높이의 거대한 구층목탑을 건립하였습니다. 신라삼보(新羅三寶) 가운데 2개(장륙존상, 구층목탑)을 보유했던 웅대한 규모의 황룡사는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습니다. 황룡사터 발굴조사는 1976년 4월부터 1983년 말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가람배치는 일제강점기에 제기된 1탑 1금당 설과 달리 1탑 3금당 형식임이 밝혀졌습니다. 1984~1986년에는 황룡사 터 서쪽에 인접한, 석조 쌍탑이 남아 있는 작은 폐사지도 발굴조사되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인물무늬 전

선으로 당시 신라사람의 복식을 추정할 수 있는 인물들이 새겨져 있다.

3명의 인물을 새겨 넣었습니다. 맨 왼쪽 인물은 머리에 새 깃털모양의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턱에 끈을 묶었습니다. 당 7세기말에 조성된 장안의 장회태자 이현(章懷太子 李賢, 654~684년) 무덤벽화에 등장하는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사신과 비슷한 모습이어서 주목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연꽃무늬 수막새, 7~8세기

용얼굴무늬 수막새, 7~8세기

보상화무늬 전, 7~8세기

마치 한 점의 만다라(曼茶羅)를 덩굴무늬 액자에 넣은 듯합니다. 옆면에는 ‘황룡’을 상징하듯 역동적인 용무늬가 새겨져 있어 월지 출토 보상화무늬 전의 두마리 사슴무늬와 차별화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청동 용모양 장식, 8~9세기

금동장식

금동원형장식, 금동원형 투조장식

청동봉황모양 장식

청동봉황모양 장식에 새겨진 그림.

청동사자 모양 장식, 8~9세기

금동장식. 사람얼굴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금동 불두, 8~9세기

소조 인물상

얼굴 조각은 불상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중과 입술, 입 양끝의 표현이 사실적이고 섬세합니다. 작은 손은 합장한 자세입니다. 손가락 편은 동금당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곳에 규모가 큰 소조불상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녹유 소조상, 7~8세기

청동장식,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머리카락이 산발인 남자의 모습을 선각하였습니다. 머리에는 꽃모양 장식을 하였습니다. 금강역사나 신장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인물이 새겨진 전

인물이 새겨진 전

인물이 새겨진 전

인물이 새겨진 전

황룡사터에서 수습된 인물상이 새겨진 벽전(壁塼)의 조각들입니다. 배가 불룩하고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배꼽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체에는 기저귀같은 짧은 옷을 두른 채 쪼그려 앉거나 무릎 꿇은 자세입니다. 두 발을 들어 머리 위의 물체를 받쳐 든 역사(力士)나, 괴물인 야차(夜叉).나찰(羅刹)같은 종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비석받침 거북이 머리, 경주 사천왕사터, 신라 7세기

현재 사천왕사터에 있는 머리 없는 2개의 석조 귀부 가운데 서쪽 귀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기로 갈수록 귀부의 머리 모양이 거북보다는 용에 가까워졌으므로 이것은 신라 통일기 초의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천왕사터의 귀부 중 하나에는 문무왕비를 세웠던 것으로 전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성덕왕릉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성덕왕의 릉이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조성된 대표적인 왕릉으로 12지신을 표현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성덕왕릉에 세워져 있는 십이지신 석상

납석제 십이지상(말.돼지), 8세기, 전 김유신 장군 무덤

김유신 장군 묘로 전하는 무덤의 둘레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갑옷과 무기를 든 모습이 불교미술의 사천왕상같은 신장상(神將像)을 연상시킵니다. 말은 정면을 응시하고 돼지는 옆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과 자세의 차이는 말이 정남쪽에 위치하는 무덤의 십이지 배치와 상관성을 지닙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납석제 십지지상(쥐.닭.돼지), 9세기, 전 민애왕릉

경주 내남 망성리에 있는 전 민애왕(재위 838~839년)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도포를 입고 공수 자세를 한 좌상입니다. 쥐, 닭, 돼지의 특징을 잘 살려 표현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청동 십이지상, 8세기, 용강동 돌방무덤

1986년 용강동에 있는 돌방무덤 안에서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양, 원숭이 형상의 청동 십이지상 7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십이지상들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거나 공수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아랫부분의 돌출된 촉을 어딘가에 꽂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납석제 남녀상, 8~9세기

한 덩어리의 돌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네 모서리에는 곡선형의 다리를 나타냈고, 윗면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누운 모습을 새겼습니다. 왼쪽의 여자 머리 옆에는 북두칠성이, 오른쪽의 남자 옆에는 남두육성(南斗六星)이 각각 달과 해와 함꼐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인들이 지녔던 도교적 내세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건녕이년’이 새겨진 묘지석, 895년 경, 천군동

1975년 경주 천군동 명활산성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성산령을 지냈던 배영승(처)의 화장묘에 함께 묻혀 있던 편마암제의 묘지석입니다. 895년(진성여왕9)이라는 확실한 연대가 있어 중요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청동뼈항아리, 8~9세기

보주형의 꼭지가 달린 뚜껑이 있는 소형 뼈항아리입니다. 그릇 내부에는 백색 분말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뼈항아리, 8~9세기

인화무늬 유개합을 이용한 뼈항아리입니다. 신라 통일기의 장례에 다양한 재질의 뼈항아리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녹유 뼈항아리(바깥항아리), 8세기, 경주 남산

녹유뼈항아리(안항아리)

바깥항아리와 안항아리로 구성되었습니다. 무늬를 전면 가득 찍었고, 녹유를 입혔습니다. 바깥항아리의 어깨에는 용머리 모양의 꼭지가 4개 달려 있습니다. 신라 통일기 귀족의 장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영원한 시간과 공간
신라 통일기에는 매장과 함께 불교식 화장도 행해졌습니다. 문무왕(재위 661~681년), 효성왕(재위 732~742년), 원성왕(재위 785~798년),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등도 사후 화장을 택하였습니다. 화장한 뒤 유해를 뿌리는 방법과 병행하여 장골기(葬骨器)에 넣어 무덤을 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라 통일기 장례미술의 특징은 시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십이지(十二支)의 조형과 설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십이지상이나 이에 준하는 상징을 무덤에 넣어 죽은 자의 안식처를 하나의 소우주로 꾸몄습니다. 한편, 왕릉의 봉분 주위에 십이지상이 새겨진 돌들 등으로 이루어진 호석(護石)을 배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