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며, 부처가 깃든 성스러운 곳으로 예배와 수행의 대상이다. 탑을 세우는 것은 부처의 진리를 널리 세상에 보이는 과정이기에 불교의 융성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불교미술 조형품의 백미로 자리잡았다. 특히, 통일신라 때 조성된 많은 석탑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 조각수법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발굴당시 사천왕사 서탑터
탑에는 사리를 모시기 위한 그릇인 사리갖춤이 모셔졌는데 대부분의 유명한 석탑에서는 이런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사리갖춤에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이 포함되는데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탑을 발원한 사람의 바램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구성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리갖춤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었기때문에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탑과 장엄
사찰 안의 불교미술은 부처의 세계를 재현하고 장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불상과 함께 불사리를 모신 불탑이 있었습니다. 불탑은 부처의 열반, 즉 윤회를 끊은 영원한 적멸(寂滅)을 상징하므로 가장 본질적이고 성스러운 예배 대상이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634년), 황룡사 구층목탑(645년) 등 다종다양한 형태의 불탑이 조영되었고, 발원자에 따라 불탑에 담은 염원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내부에 불사리를 모시는 장엄도 똑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독특하였습니다. 신라 통일기에 세워진 불탑의 상당수는 기복적 성격을 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라 후기의 석탑에 표현되는 다양한 존상이나 장엄의 근거를 이와 같은 조탑경전의 내용에서 찾기도 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사천왕사 목탑터.
사천왕사는 669년(문무왕 9)과 670년에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文豆累秘法)이라는 불교의식을 행하여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내력을 지닌 신라 통일기의 대표적 호국사찰입니다. 이 절터의 동서 쌍탑 주변에서 악귀를 깔고 앉은 녹유신장상 전이 수습되었습니다. 이 전들은 사찰이 창건된 679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각에 능통한 신라의 승려 양지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중을 제작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양지가 이 상들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신장상 조각들을 복원하면 전의 크기는 높이 90cm, 폭 70cm 가량이 됩니다. 여러 벌의 틀로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발라 구웠습니다. 근래의 발굴조사에서 이 신장상 전들은 A, B, C, 3종류로 이루어졌고, 탑의 기단부 바깥쪽 네 면에 각 6개씩 총 24개를 설치한 벽전(壁塼)이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상들의 존명에 대해서는 사천왕, 팔부중, 신왕(神王) 등의 여러 설이 제기된 바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녹유신장상 전에 표현된 그림의 3가지 형태
녹유 신장상 전(塼, A타입).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던 벽돌이다. 사실적이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서역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녹유 신장상 전 조각
녹유신장상 전(B타입).
녹유신장상 전(C타입)
녹유신장상전 조각
녹유신장상 전 조각.
금동장식, 7세기, 사천왕사터
1936년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구부러진 장식 끝에 보주가 달린 형태로서, 금관의 세움장식 끝의 보주를 연상케 합니다. 편 한쪽에 ‘東塔西’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천왕사의 쌍탑 가운데 동탑의 서쪽에 설치되었던 장엄물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 경주박물관>
녹유전, 7세기, 사천왕사터
녹유전은 표면의 광택으로 인해 불교경전에서 서방 극락정토에 있다고 하는 유리전(琉璃塼)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좌우 양쪽을 비대칭의 우아한 능형(菱形) 곡선으로 처리하여 다른 개체와 연속적으로 맞물리도록 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국보).
경주 사천왕사의 목탑과 함께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적용된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이다. 후대의 석탑과는 달리 각부분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조건축물처럼 여러개의 석재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2개의 탑 모두 해체.수리과정에서 사리엄장구가 발견되었다.
금동사리엄장구, 보물, 신라 682년경.
사천왕사 건축에 크게 기여한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재위 661~681년)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신문왕(재위 681~692년)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의 동.서석탑에 넣었던 사리기의 일부입니다. 서탑의 사리기는 1959년에, 동탑의 사리기는 1996년에 각각 해제.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몸돌 윗면의 네모난 사리구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리 외함의 네 면에는 갑옷을 입은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리 내함은 전각 모양으로서 중앙의 불사리를 모시는 항아리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라 통일기 초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조각솜씨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사리 외함.
외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형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이 완성되어 가던 시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9m에 이르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금동사리 외함.
겉면에 사천왕상이 선으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금동불상
금동 구층 소탑
금동 삼층 소탑
금동사리엄장구,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신라 8세기
1996년 석탑 보수공사 중 3층 지붕돌 윗면에 마련된 사리구멍에서 나왔습니다. 금동 사리함의 표면에는 촘촘히 찍은 둥근 무늬를 바탕으로 사천왕상이 유려하게 선각되어 있습니다. 사리함 안쪽에 별도의 사리 내함은 없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금동과 나무로 만든 작은 소탑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함께 수습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묵서 지편의 내용과 관련있는 것이어서 무구장경 신앙에 의거하여 석탑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장식, 7~9세기, 감은사터
구부러진 꽃술과 연봉우리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끝부분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아 리벳으로 다른 것과 연결하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찰 건축 장엄구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문 장식, 7세기, 고선사터
문에 달린 빗장의 일부였습니다. 덕동댐 건설로 1975년 수몰된 경주 고선사터의 금당터 서북회랑 바깥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끝부분은 세 잎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중간에 수직으로 돌출된 부분은 연꽃처럼 만들어 구멍을 뚫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청동풍탁, 7~9세기, 감은사터
신라 범종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윗면에는 고리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고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청동 풍탁에 버금갈 정도로 크기가 큰 편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사자머리 모양장식( 7~9세기, 감은사터), 금동 신장상 머리(7세기, 전 인용사터)
끈으로 중간을 묶은 머리, 부릅뜬 큰 눈, 콧수염 등 감은사터 금동사리외함에 부착된 이국적인 호인(胡人)형의 사천왕상 얼굴과 유사합니다. 사리장엄구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사자, 7~8세기, 분황사
금동 장식, 8~9세기, 경북 영덕 유금사
세 갈래로 피어나는 식물의 생명력을 형상화한 장식입니다. 신라 후기의 불상 대좌 하대석에 표현된 귀꽃을 연상시킵니다. 어딘가에 부착하여 고정했던 일종의 장엄구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사리함 뚜껑, 706년경,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함 뚜껑에 새겨진 글씨
번역된 내용.
금제 아미타불, 국보, 706년경,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942년 경주 낭산 동쪽의 구황동 삼층석탑 2층 지붕돌 윗면의 사리구멍에서 수습되었습니다. 금동사리함 안에는 각종 사리장엄굴를 비롯하여 금제불입상과 금제불좌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석탑은 692년에 승하한 신문왕(재위 681~692)을 위해 부인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재위 692~702)이 세운 것입니다. 700년에 신목태후가, 702년에는 효소왕이 각각 사망하자 효소왕의 동생이 성덕왕(재위 702~737년)이 706년에 불사리 4과와 크기 6촌의 순금제 아마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석탑에 넣고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로써 금제불좌상은 706년에 넣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삼국통일 이후 정형화되어가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석탑이다. 감은사지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크기는 작아지며, 구성부분의 표현 또한 간략화되었다.
금동사리함, 863년경,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금동사리함.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면불이다. 통일신라 밀교의 영향을 받은 형태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민애대왕 사리그릇(보물).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1층몸돌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민애대왕 사리그릇(보물 ). 납석으로 만든 그릇으로 당시에 유행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1층 몸돌 윗면의 사리구멍에 들어 있던 금동사리함의 네 면입니다. 원래는 모서리에 뚫린 구멍을 연결하여 네모난 형태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정확한 결합방식과 방향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리함 안에는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민애왕(재위 838~839년)을 기리는 내용의 863년(경문왕3)명 납석제 사리단지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금동 사리함 각 면에는 보관을 쓰고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약합을 든 약사불,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 합장을 한 부처의 삼존상을 타출하였습니다. 이상들에 대해서는 밀교의 사방불을 신라식으로 변형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양양 진전사터 삼층석탑(국보).
지대석 위에 이층의 기단부가 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기단부 2층 몸돌에는 팔부중상을, 탑신 1층 몸돌에는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신라는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적인 사건을 거치며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후원하면서 7세기 이후에는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습니다. 호국불교 신앙이 본격화된 것도 신라에서였습니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호국불교 신앙의 출발점은 신라가 옛날부터 과거의 부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이었습니다. 불교의 토착화에 기여한 이러한 생각은 지금의 신라가 바로 부처의 땅이라는 불국토설로 발전되어 불교문화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전성기 신라의 왕경에 대해 “절이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 가는 듯하다.”라고 묘사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당시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줍니다. 8세기 중엽에 조영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 절정기의 산물이었습니다. 불교미술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고 ‘문화재’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도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그러나 불상이나 불탑 속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여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나쁜 풍조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파괴되고 출처를 알 수 없게 되는 등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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