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배반동 낭산 남쪽 사천왕사 절터에 남아 있는 2기의 비석받침돌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사천왕사 입구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목이 없는 거북받침돌만 있고, 비석은 없어졌다가 조선후기 정조 때(1796년) 비석편이 일부 발견되었가, 2009년에도 경주 도심 주택에서도 일부 비석편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거북받침돌은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태종무렬왕릉비(국보)와 거의 비슷하며, 떨어져 나간 받침돌의 머리는 거북 모양을 하고 있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사천왕사 절터 입구>
<서쪽 거북받침돌>
목은 없고 몸통만 남아 있다. 비석을 받치는 부분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으며, 등껍질에는 거북등처럼 육각형을 새겨 놓고 있다. 테두리에는 당초문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조각수법이 세밀하고 양호한 편이다.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거북머리는 후기로 갈수록 머리 모양이 거북보다는 용에 가까워졌으므로 이것은 신라 통일기 초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태종무열왕비의 거북받침돌 머리와 비슷하다.
<서쪽 거북받침돌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머리>
<동쪽 거북받침돌>
비석을 받치는 부분이나, 등껍질에 새겨진 문양이 서쪽에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옆에서 본 모습>
<뒤에 본 모습>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 비(碑)는 비석의 하단부로 조선 정조 20년(1796)에 경주부윤 홍양호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상단부는 2009년 경주 민가에서 새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천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무왕 비(碑)>
문무왕 비(碑),
문무왕 비는 681년 혹은 682년에 사천왕사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라졌던 문무왕 비를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부윤던 홍양호가 재발견하고 경주 관아로 옮겼습니다. 이 때의 탑본이 ‘해동금석원’이라는 청나라 책에 실렸습니다. 이 비석은 또 다시 행방을 알 수 없다가, 1961년에 여기 전시된 비편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른 한 편이 2009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비문의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와 신라 김씨의 내력 등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을 새겼습니다. 비문은 국학소경 김__이 썼으며, 구양순체의 해서는 단아하고 활달한 느낌을 주는데 대사 한눌유가 썼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태종무열왕릉비는 비각안에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 있다. 비몸은 없지만 받침돌의 귀부와 머릿돌의 장식은 아주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걸작에 속하는 조각작품이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것으로 귀부, 몸돌,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비석의 양식을 하고 있는 현재 남아 있는 비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문무왕 비(碑) 거북받침돌과 외형이나 조각수법 등의 거의 비슷하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는 사천왕사 절터(사적) >
<출처>
-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년
- 위키백과,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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