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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수남학구당, 조선시대 사설 중등교육기관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 있는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이다.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등 지역 양반들이 세웠던 정자와 정원 많이 들어섰던 가사문학의 산실인 증암천이 골짜기를 빠져나와 넓은 들판과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시대 향적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절터에 조여심과 양자징을 중심으로 지역의 25개 성씨가 힘을 합쳐 조선중기 선조 때 세워졌다. 대부분 과거에 합격했거나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었지만 평민출신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창평학구당’이라고도 불리며 유교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사설 교육기관으로 담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의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크게 보수한 것으로 4칸짜라 강당건물과, 2층문루, 관리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18개 성씨가 참여하여 운영하고 있다.

<담양 수남학구당>

가사문학의 산실 증암천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 사설중등교육기관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양자징을 중심으로 지역민에게 중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세워졌다. 서원이나 서당과는 달리 인물을 중심으로 특별한 학풍을 형성하지 않고 있다.

<문루>

출입문으로 문간채처럼 보이는 문루를 두고 있다. 문루는 앞면 5칸 건물로 가운데 마루를 설치하여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휴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에서 본 모습>

<강당 건물>

서원이 제향행사를 통해 특정인의 학풍을 본받도록 주입하는 것과는 달리 학구당은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곳이라 할 수있다.  강당건물은 앞면5칸, 옆면 2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학구당 현판>

<넓은 대청마루>

<대청마루 천장>

천장 아래에는 여러 사람이 남긴 글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으며, 가운데 특별한 뭔가(?)가 설치되어 있다.

<강당 마당>

<관리인이 거처하는 살림집>

담양군은 광주광역시 북동쪽에 위치한 군으로 주변에 크고 작은 산들이 있으며 호남지방의 큰 강인 영산강이 흐른다. 담양도호부와 창평현이 합쳐서 오늘날 담양군을 이루고 있으며, 영산강과 지천 주변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경제적 기반의 풍족하여 양반문화가 발달되었던 지방이다. 소쇄원을 비롯하여 부유층들이 조성한 크고 작은 정자와 원림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서원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며, 다른 지역에는 많지 않은 여러 집안에서 힘을 모아 세운 학구당과 같은 사설교육기관이 여러 곳 남아 있다.

<문루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주변경치>

무등산에서 발원한 증암천이 넓은 들판과 만나는 지점이다.

담양 수남학구당, 전남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창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힘을 모아 선조3년(1570)에 학문을 연구하며 유학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학구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창건하여 함께 공부하였다. 이러한 학구당은 당시 조선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사례로 보인다. 학구당의 창건에 참여한 사람들은 김,노,박,송,신,안,양,오,유,이,전,정,조,진,채,현 등 25개 성씨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과거 시험에 합격하거나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정병으로 군대에 입대한 평민 수준의 인물도 섞여 있다. 창립 당시 당원은 안우문을 포함하여 모두 8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환학당 조여심(1518~1594)과 고암 양자징 이 두사람이 연장자이면서 도의와 학문이 으뜸이어서 학구당 창건을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자징을 학구당의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건립 직후 목청전.연은전의 참봉직에 나가느라 창평에 없었고, 1580년대에는 수령직을 맡아 경상도 거창과 충청도 석상에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후 운영에는 깊이 간여할 수 없었지만, 그의 동생 양자정이 당장이나 장의를 맡아 운영에 참여하였다. 이외의 소쇄원 사람들로 양천심, 양천경, 양천회 등이 학구당에 참여하였다. 학업을 위해 1570년 창립당시에 ‘자양집’, ‘가례’, ’19사략’, ‘소학’, ‘서부’, ‘간재집’을, 그리고 추가로 1580년에 ‘문선’을, 1581년에 ‘중용’을 구비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서적이 10권 전질로 있었다는 ‘자양집’이다. ‘자양집’은 주자의 문집인 ‘주자대전’을 말한다. 이를 통해 학구당에서 행한 교육의 수준이 고등교육, 더 나아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과업교육이였음을 알 수 있다. 학구당은 멀리는 여말선초의 서재 교육을 계승한 것이지만, 16세기 사학의 흥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건국 이후 편성된 관학 교육이 이때에 이르면서 쇠퇴하고, 대신 사학이 흥기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사학은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서당,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학당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학구당은 교재나 학사규정 등을 두고 볼 때에 학당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출처:필암서원>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